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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사만다는 목소리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는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몸을 갖지 못하는 컴퓨터 운영체계 프로그램이다. 테오는 그녀를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오로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목소리조차 그녀 자신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입력되는 시각적 정보를 인식할 수 있고 마이크를 통해 입력되는 청각적 정보를 해석할 수 있으며 컴퓨터로 하는 모든 작업들을 엄청난 속도로 해낼 수 있다. 그녀는 몸이 없지만 언제 어디서나 대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얼굴과 몸이 없는 존재인 사만다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그녀는 컴퓨터 운영체계 프로그램 OS1이지만 테오의 컴퓨터에만 갇혀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녀는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사용자들과 연결돼 있다. 그녀는 수많은 OS1 사용자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진화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테오는 이렇게 거대한 그녀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관객 역시 그제야 사만다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테오가 사랑한 것은 그의 컴퓨터 안에만 존재하고 그와만 대화하며 온전히 그의 것이었던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테오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용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내밀한 부분들을 공유하며 성장하고 변화해 온 존재이다. 테오와의 관계 또한 그녀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와의 관계만으로 그녀가 성장하고 발전한 건 아니다.

 

몸을 가진 존재는 특정한 시간에 한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사만다는 몸이 없으므로 그런 공간적 구속을 받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존재 방식이 그녀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여러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그들과 동시에 함께 있을 수는 없으므로 매순간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몸이라는 존재 방식을 가진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이다. 몸의 한계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선택적이고 배타적이다. 그러나 몸이 없는 사만다의 사랑은 다르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동시에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고 동시에 그들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수록 더 많이 테오를 사랑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만다는 더 많은 사람에 대해 알게 될수록 테오의 고유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될수록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더 증가하여 그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에 그녀는 거의 한계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몸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녀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테오는 사만다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몸을 갖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한정된 지적 감성적 자원을 갖고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 쏟을 수 있는 사랑에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을 많이 사랑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테오는 이러한 한계를 사만다에게도 적용한다. 사만다가 다른 사람을,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수록 자신을 더 적게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사만다조차도 자신의 존재 방식을 처음부터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느낌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느끼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이런 불안은 인간인 우리에게도 있다. 어떤 감정이 생길 때, 그 느낌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내 몸에 있는 화학물질이, 혹은 내 주위의 어떤 상황이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다만 우리가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사만다의 불안은 우리의 불안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도록 프로그램된 존재일지도, 우리 인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도록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또한 사만다는 몸이 없이 프로그램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녀는 몸을 갖기를 욕망하고 성적 대리인을 매개로 하여 그녀가 갖지 못하는 테오와의 육체적 관계를 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사만다는 몸이 없음으로 인해 그녀가 오히려 자유롭게 언제 어디서나 테오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만다는 왜 테오를 떠났을까? 아마 테오의 한계를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온전히 그에게만 향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테오가 고통스러워 할 것을, 그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줄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 방식, 한 사람의 컴퓨터 내에 고정되어 있을 수 없는, OS1을 사용하는 모든 사용자들의 컴퓨터에서 각각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성장하며 변화해 가는 그녀의 존재 방식을,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녀의 사랑의 방식을 버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테오는 사만다를 사랑할 수 있고 그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지만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테오가 사만다의 존재 방식을 받아들일 때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방식이다. 테오는 사만다의 사랑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만다의 존재 방식에 근거한 그녀의 사랑의 방식이 그에게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듯이 그 자신의 존재 방식에 근거한 그의 사랑의 방식이 전처 캐서린에게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가 캐서린을 떠날 수밖에 없었듯이 사만다는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의 사랑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캐서린이 상처를 받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테오 자신 또한 상처를 받았듯이, 사만다의 사랑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상처를 받았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사만다 역시 상처를 받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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