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겨울왕국(Frozen, 2013)

2014.01.24 09:18

샌드맨 조회 수: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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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제 취향은 꽤 마초적인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 뮬란 등으로 이어지는 유서깊은 디즈니의 공주 뮤지컬은 제 어린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좀 느끼하고 낯간지러운 구석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주공략층인 여자아이들 뿐 아니라 까칠한 사춘기 소년이나 어른들마저 사로잡을만큼 매력적인 작화와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모두를 미소짓게 만드는 해피 엔딩의 힘이 있었으니까요. 이 유서깊은 시리즈가 점점 시류에 뒤쳐지며 2000년대 명맥이 끊겼다는 건 매우 아쉬운 일입니다. 물론 2009년 공주뮤지컬과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잇는 '공주와 개구리'가 있긴 했지만, '귀하게 자라나 예쁘고 연약한 바비인형 몸매의 백인 공주 대신 가난하고 평범한 외모지만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흑인 여주인공을 보여주겠다'는 '정치적 올바름'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작 작품의 재미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며 '디즈니 공주 뮤지컬은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가...'라는 씁쓸한 뒷맛만을 남겨줬죠. 


그리고 이 위기를 멋지게 반전시킨 작품이 바로 2010년에 개봉한 '라푼젤(Tangled)'입니다. 널리 알려진 동화속 공주님+ 예쁜 화면 + 팝스타가 참여한 음악 + 사랑스러운 동물 조연 + 해피엔딩이란 디즈니 공주 뮤지컬의 계보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달라진 시대상에 맞게 훨씬 활달해진 주인공, 게다가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이 아닌 3D CG(!!) 등을 과감하게 도입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완벽한 부활을 알렸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DVD 직행영화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팅커벨 시리즈가 라푼젤의 발판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3D 애니메이션은 픽사에만 의존한 채 고사하기 일보직전의 셀 애니메이션을 힘겹게 붙잡고 있던 디즈니가 3D 애니메이션에서 독자적인 활로를 모색하고 또 여아들을 공략할 공주 뮤지컬의 시동을 건 작품이죠. (팅커벨 시리즈 의외로 걸작입니다. 5,6학년 정도 아이들과 함께 봤는데 처음에는 남자녀석들 이런건 여자애들이나 보는 거 아니냐며 투덜대더니 나중에는 빠져들어 눈이 초롱초롱;;)


그리고 '라푼젤'의 성공에 힘입어 디즈니의 공주 뮤지컬이 완전히 돌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선언한 작품이 바로 '겨울왕국'이 아닐까 합니다. 일단 이 작품에서는 '라푼젤' 이후 디즈니가 확연히 자신감이 붙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수많은 풍등이 날아오르는 호수 위에서 'I See the Light'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노래가 많지 않았던 '라푼젤'에 비해 '겨울왕국'에서는 대놓고 디즈니 특유의 공주 뮤지컬임을 선언하듯 시종일관 수많은 뮤지컬 넘버들이 흐릅니다. 각 인물들의 솔로, 남&여 듀엣, 여&여 듀엣, 합창까지 종류도 다양하고요. 또, '포카혼타스', '뮬란', '공주와 개구리' 등에서 의도적으로 백인 공주 여주인공을 탈피하려 했던 것과 달리 '겨울왕국'의 주인공은 전통적인 동화속 공주님이죠. '노틀담의 곱추', '포카혼타스' 등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좀 더 높은 연령대의 관객층을 공략하며 약간 어두운 이야기를 담아냈던 디즈니였지만, 이제 유치할지언정 어른과 아이 모두 즐거워하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겨울왕국'은 안데르센 형제의 유명한 동화인 '눈의 여왕'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소재만 빌려왔고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상당히 방대한 구성의 모험소설이고 또 카이와 겔다의 사랑이 강조되며 눈의 여왕이 악역으로만 등장했던 원작과 달리, 이 작품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엘사와 안나 자매간의 가족애를 다루고 있고 '눈의 여왕' 엘사도 주연으로 등장해 독자적인 구성을 보여주거든요.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디즈니의 모습과 '라푼젤' 이후 힘을 얻은 새로운 디즈니의 모습이 잘 섞여있습니다. 시종일관 노래가 흘러나오는 뮤지컬적 구성에 더욱 충실해졌으면서도 공주다운 우아함보다는 쾌활함이 앞서는 말괄량이 주인공 안나를 따라 흐름이 매우 경쾌하죠. 또한 캐릭터를 다루는 솜씨가 매우 인상적인데, 오랫동안 마법을 숨겨왔지만 결국 대관식에서 탄로나고 만 엘사가 홀로 산속으로 도망치며 자책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점점 자신감와 자유로움을 느껴가는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은 본편 최고의 트랙 'Let It Go'와 어우러지며 매우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쾌활하고 강단있는 캐릭터의 주인공 안나나 의외로 순정파 크리스토프도 꽤 매력적이지만 영화속 재난의 원흉이자 가장 큰 피해자로서 훨씬 복합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 엘사가 더 돋보입니다. 개그를 담당한 눈사람 올라프도 역대 디즈니 조연캐릭터 중 순위권에 들만큼 매력적이고요. '눈의 여왕' 을 자매간의 가족애에 대한 이야기로 재구성한 이야기 역시 상당히 좋습니다. 엘사의 복합적인 캐릭터는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이고, 이런 엘사 덕분에 어떻게든 언니를 되찾으려는 안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지죠. 


믿고 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답게 눈과 귀가 즐겁습니다. 작품 제목답게 배경은 거의 겨울(사실 여름인데 엘사의 폭주로 겨울화)인데, 엘사의 마법에 의한 재난이긴 하지만 눈과 얼음에 뒤덮인 겨울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상당히 스펙터클한 장면들도 있고요. 2D 디지털로 봤는데 입체감이 느껴지는 묘사들도 꽤 있어 3D로 봐도 좋을 뻔 했습니다. 또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어느때보다도 풍성한 뮤지컬 넘버가 계속 흘러나오고요. 역대 디즈니 공주 시리즈 중 가장 연애 비중이 적은지라 '라푼젤'에서의 풍등 장면처럼 입이 떡 벌어지게 로맨틱하고 달콤한 장면이 없는 건 좀 아쉽지만, 엘사가 마법을 부리는 장면들, 특히 얼음성을 만들어내는 장면(근데 여기서 '왓치멘'의 닥터 맨하탄이 유리의 성 만들던 장면 떠오른 건 저 뿐인가요?;;)은 그에 못지 않은 스펙터클을 줍니다.


'디즈니 공주 뮤지컬 장르가 완전히 돌아왔다.' 이 영화에 대한 한줄 평입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란 말처럼, 전형적인 공주 동화를 벗어나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왔던 디즈니가 결국은 자신들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죠. 그리고 그 결과는 더할나위없이 뛰어납니다. '슈렉'의 거침없는 삐딱함도 좋았지만(하긴 이 슈렉조차 시리즈가 지속될수록 결국은 정석적인 가족애 이야기로 회귀했더라죠) 디즈니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렇게 해맑은 얼굴로 영원토록 변치 않을, 꿈과 희망이 넘치는 해피엔딩을 노래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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