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왕국

2014.01.27 09:24

menaceT 조회 수:4412

Disney-Frozen-Poster-2013.jpg 

 

Frozen (2013)

(RealD 3D 자막)

 

1월 23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서사 자체가 그렇게까지 탄탄한 영화라고 하긴 힘들다. 아무리 스케일이 큰 척 해 보아도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소소해서 살짝 맥 빠지는 구석이 있고, 이야기 진행도 무척 급하다. 그러나 사실 이는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추억 버프를 걷어낸 뒤 그때 그 영화들을 다시 보면, 엄청 장대하고 깊이 있어 보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의 서사가 사실 굉장히 소박하고 아기자기하며, 한 시간 반 내외의 상영 시간 안에 지루할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이야기 진행이 무척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기본 타깃이 어린이들인 이상 쉽게 바뀔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겨울왕국'은 그 간단하고 급한, 결함이 있는 서사 안에서 나름의 미덕 역시 지니고 있다. 

 

  여태껏 대부분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별 능력도 없어 보였던 비주류들과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서사를 보여주곤 했다. 일곱 난쟁이의 도움을 받는 백설공주, 티몬과 품바의 도움을 받아 복권하는 심바, 식기나 가구들로 변해 성에 고립되어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그 존재 자체가 비주류의 전형인 야수와의 사랑을 이루는 벨, 선술집에서 만난 껄렁패들이 조력자가 되고 좀도둑과 사랑을 맺게 되는 라푼젤 등 그 예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노틀담의 곱추'의 콰지모도나 '뮬란'에서 직접 남장을 하고 군대에 뛰어들어 소수자 입장에 놓이는 뮬란의 경우는, 그러한 서사의 조금 더 나아간 버전으로서 비주류 자체가 서사의 중심에 선다.

 

  그런데 이번 '겨울왕국'은 보통 한 명으로 등장하는 '공주'의 역할을 엘사와 안나 둘로 나누어 두고는, 엘사는 콰지모도나 야수, 뮬란 등의 연장선 상에서 직접 비주류, 소수자의 입장의 역할을 떠맡게 하고, 안나는 소수자와 연대하는 디즈니 애니 속 인물들의 보편적인 상을 이어받아 얼음장수 크리스토프, 순록 스벤, 눈사람 올라프, 트롤들 등과 연대하며 문제를 직접 해결해 가는 역할을 맡도록 한다. 이러한 역할 분담 하에서 신체 상의 차이 때문에 비주류가 되어버리곤 마음의 문을 닫고 늘 스스로를 숨겨야 했던 엘사는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게 되고 타인에게까지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워 간다. 한 편, 신체적인 문제는 없으나 닫힌 문 안에서 올바른 관계 맺기를 알려줄 이조차 없이 자라 온 안나는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때 이러한 두 캐릭터의 변화 양상은 닫힌 문과 열린 문, 얼음과 눈보라, 노래 가사로 언급되다 나중에 클라이맥스의 핵심이 되는 '얼어붙은 심장' 등의 명료한 상징물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즉, 기존에 비주류들과의 연대를 다뤄 온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서사가 엘사와 안나라는 두 주인공으로의 분화 하에서 더욱 성숙한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이야기하는 수준으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닫힌 문, 열린 문 비유는 노래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에서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있던 엘사와 안나가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에선 'tell the guards to open up the gate'이라며 처음으로 타인에게 문을 열어젖힐 준비를 한다. 그러나 안나가 운명의 상대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는 반면, 엘사는 'conceal, don't feel, don't let them know'라고 아버지가 일러준 바를 계속해서 되뇌이며 마음의 문은 여전히 닫아걸고 있음이 그 노래 안에 함께 드러나고 있다. 그 뒤 안나는 'Love Is an Open Door'에서 'all my life has been a series of doors in my face, but suddenly I bump into you', 'love is an open door' 등의 노랫말을 통해 한스에게 '열린 문' 운운하며 너무 쉽게 마음을 열어 보이고, 엘사는 일련의 사건 뒤 'Let It Go'에서 'turn away and slam the door'라며 더욱더 굳게 마음의 문을 걸어잠그려 한다는 데서-이것은 무의식 중에 아렌델 자체를 얼려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둘의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Reprise)' 이후 안나의 얼어붙은 심장이 문제가 되면서 양측 모두 좀 더 성숙한 관계 맺기를 배워가며 둘은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한 편, 안나의 얼어붙은 심장은 맨 첫 곡 'Frozen Heart'와 연결되고 있는데, 'Frozen Heart'로 시작되는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안나와 엘사의 돈독한 자매애, 이를 증명하는 눈사람 올라프의 존재, 트롤들의 도움,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크리스토프와 스벤의 존재 등 작품의 갈등을 해결하는 요소들이 모두 총출동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또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공주상의 변화 과정을 따라갈 때도 '겨울왕국'은 어떤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디즈니의 공주들은 대체로 남성들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들이었다. 90년대에 나온 '알라딘'의 재스민조차도 일견 주체적인 듯 보이나 실상 남성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공주 상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아마도 실사와의 접목을 시도한 '마법에 걸린 사랑'의 지젤 캐릭터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 영화 도입부에서만 해도 '진정한 사랑의 키스' 운운하며(이는 '겨울왕국'에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인용되더니, 이야기의 반전의 핵심 소재가 된다.) 왕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지젤은, 영화 결말부에 이르면 벽을 기어오르고 직접 칼까지 빼 들며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험에 빠뜨리려 하는 용에 맞선다. 근작인 '라푼젤'에서도 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액션이 대부분 라푼젤의 몫으로 그려졌다. 

 

(스포일러)

 

  이제 '겨울왕국'에서 그러한 공주의 모습은 완벽히 변모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왕자 한스는 고국에선 열두 번째 왕자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도 없는 존재인데다 끝내는 악당임이 드러난다. 한 편, 크리스토프는 볼 품 없지만 성실한 남성으로 그려지다 한스의 정체가 밝혀지면 '왕자'를 대체할 멋진 남성의 이미지로 본격 부각되기 시작한다. 아마 그 노선을 이어갔다면 이 이야기도 결국 '라푼젤'의 라푼젤과 플린 라이더가 보여준 수준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는 이야기를 한 번 더 꼬아 끝내 이야기의 갈등과 해결의 자리에서 크리스토프조차 배제시킨다. 

 

  이처럼 왕자, 혹은 왕자를 대체할 만한 현대적 시각에서의 멋진 남자조차 모두 지워진 자리에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공주들의 연대, 아니, 비로소 남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관계를 맺는 법, 사랑하는 법을 배운 두 자매, 두 여성의 연대이다. 이로써 영화는 디즈니 공주 이야기의 관습,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라푼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온 시대에 따른 변주의 양상까지도 보기 좋게 뒤틀어 버리면서 더욱 진일보해 나간 것이다. 

 

  늙은 트롤이 안나의 '얼어붙은 심장'을 고칠 유일한 방법으로 '진정한 사랑'(더 정확히는 'act of true love')을 언급하자,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정한 사랑의 키스(true love's kiss)'로 오해되어 한스, 크리스토프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매다, 마침내 자매애에 기반한 희생으로 귀결되기까지의 과정은, 이러한 관습이 변형되어 오고 다시 또 전복되기까지의 과정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act of true love를 true love's kiss로 오인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디즈니 영화를 접하는 관객들의 선입견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기껏 크리스토프 역에 뮤지컬 배우 출신 조나단 그로프를 캐스팅해 놓고는 'Reindeers are better than people.' 같은 노래라 하기도 애매한 것 하나만 달랑 부르게 한 것도 크리스토프 캐릭터가 대변하는, '마법에 걸린 사랑' 이후의 디즈니 영화 속 변형된 관습의 또 한 번의 전복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복의 과정을 통해 영화가 건져낸 엘사와 안나의 사랑은 여태껏 디즈니 공주 이야기들이 매몰되어 있던 남녀의 로맨스 구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여성상, 그 여성들 간의 연대, 자매애, 부모가 없는 불완전한 가정 하에서 비주류들과 연대해 가며 이룩해 낸 새로운 가족의 양상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엘사 스스로가 남들과 다른 비주류였음을 마지막 여성 연대의 결말과 연결지어 볼 때 동성애의 가능성도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만듦새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영화를 디즈니 최고작이라고 하긴 어려운 구석이 있다. 아까 언급한, 디즈니 영화에 흔한 단점들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당장 디즈니의 전작 '라푼젤'과 비교해 보더라도 연출 등으로 훨씬 끌어올릴 수 있었을 이야기가 조금 밋밋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또한 이야기의 완급 조절에도 실패한 듯 보인다. 많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그렇듯 '겨울왕국'도 뮤지컬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각각의 노래들은 정말 듣기 좋은데도 불구하고, 노래들이 죄다 초중반에 몰려 있다 보니 가장 격정적이어야 할 마지막 부분이 영 심심하다. '라푼젤'이 클라이맥스에 'I see the light' 넘버와 함께 입이 떡 벌어지는 등불 씬을 준비해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Let it go' 넘버가 나오는 씬은 분명 강렬하지만, 후반에도 이에 상응할 만한 무언가가 영화를 지탱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또한 엘사, 안나, 올라프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구축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심리 그 자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그닥 성실하지 않다는 것도 아쉽다. 뮤지컬 넘버들이 줄줄이 나오는 초중반에선 노래가 이를 보충해 주지만, 노래가 없는 후반부에선 이러한 단점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버린다. (3D 효과 역시 여타 영화들에 비하면 밋밋한 편인데, 이는 디즈니나 픽사 영화들이 대부분 편안함, 공간감을 추구하는 데서 생기는 공통적인 단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지금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 때 완전히 맛이 가 버린 것만 같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이제 꾸준히 변화해 가고 있다. 단번에 모든 걸 바꾸어 버릴 극단적인 변화가 아니라, 과거를 긍정하되 가장 익숙한 것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가면서 시간에 발맞추어 가는 변화. '겨울왕국'은 디즈니가 왜 아직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지, 왜 아직도 우리가 그들의 내일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훌륭히 증명해 내는 작품이다.

 

+영화 시작 전 '말을 잡아라'라는 단편이 나오는데 이게 또 예술이다. 내용은 사실 별 게 없지만 그 시도 자체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스크린을 하나 두고선 스크린 안팎의 영역을 흑백 2D 셀 애니메이션(여기 등장하는 미키와 미니는 요즈음 관객이 상대적으로 익숙한 모습이 아닌, 몇 년 전부터 디즈니 로고로 다시 쓰이고 있는 '증기선 윌리' 시절의 초기 모습이다.)와 컬러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나누더니, 기존 2D 셀 애니 제작 방식을 역이용해 미키와 미니가 악당을 곯려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의 모습이 그려진다. 옛 애니메이션에 대한 존경과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에 대한 긍정과 의지를 한꺼번에 담아낸,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집약해 보여주는 놀라운 단편이다.

 

+엔딩 크레딧 다 올라가면 짤막한 장면이 하나 더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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