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4.02.22 21:50

경험담 조회 수:4801

월터의 씁쓸한 여행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롯데시네마 명작열전에 선정, 2월 재상영을 확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척이나 의아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명작'이라 불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정의 변-"상상과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을 꿈을 되새기게 만들며 2014년 대국민 공감무비의 탄생이라는 호평과 찬사를 얻었다"1) -을 찾아보고도 납득 할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첫 느낌은 '찝찝하다'였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여운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끝까지 재미있게 봤지만,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은 지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무능한 사회초년생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당혹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영화는 '자아찾기'과 '도전'사이를 교묘히 왔다 갔다 했지만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연애의 권태로움 보단 썸타기의 설렘을 즐기는 어장관리人처럼

 

'자아찾기'가 이 영화를 구성하는 한 축이자 목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소 결과론적일지라도, 감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네이버 영화'에서 공감 461개를 얻은 평-"숀을 찾으러 가는 그 길은. 결국 잊고 살던 나를 찾으러 가는 길. 모히칸 헤어에 보드를 타던 그 때."-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자아찾기는 생각보다 일찍, 허망하게 끝난다. 헬기에 올라탄 이후로 월터는 더 이상 헛것을 보지 않는다. 월터가 그간 해왔던 상상들은 '만일 지구가 멸망하다면' 같은 종류의 공상이 아니라, 지극히 상황 구속적인, 예컨대 이휘재의 '인생극장'과 같은 상상이었다.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일을 상상해왔다. 따라서,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됐음을 뜻한다. 헬기 탑승을 기점으로 월터는 그 이전의 자신과 구분되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아찾기'란 목표는 영화의 중반부에 조기 성취 된다.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도전'이 영화를 끌고 간다. 하지만 영화 속 월터의 도전은 지나치게 장애물을 넘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것들은 25번 사진을 찾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월터를 만족시키는 일은 아니다. 장애물을 넘어서 하고자 하는 것은 직장생활이지, 삶의 정수 느끼는 일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라이프지의 모토-"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와는 대비된다. 이러한 느낌없는 도전은 역설적으로, 그를 해고한 턱수염 사내Beard guy가 하는 일과 매우 닮아 있다.

 

숀이야 말로 라이프 모토의 헌신이며, 이상형이다. 그에게 촬영은 부차적인 것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눈표범을 보고도 셔터를 누르지 않는 숀의 행동은 월터의 도전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월터는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뿌듯해 했을지 모른다. 여행일기를 쓰며 난 예전과 다르다 자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숀을 보고, 십년이 넘게 호흡을 맞춰왔지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인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은 고작 "사진 어딨어? 빨리 줘 그것 때문에 나 짤리게 생겼어"같은 것이다. 이쯤되면 절박하다기 보다는 무섭게 느껴진다. 헤어진 연인이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데이빗 보위의 노래 'Space oddity'는 라이프지의 모토와 함께 '도전'을 상징한다. 노래는 턱수염 사내가 "Can you hear me?"하고 월터를 놀릴 때 최초로 인용된다. 여자 주인공은 턱수염 사내가 주인공에게 했던 희롱을 꼬집으며, '그의 행동은 노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노래는 인간의 도전을 찬양하는 노래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 노래의 기능과 역할은 그린란드 펍씬에서 잘 드러난다. 헬기 탑승을 망설이는 월터에게 여주인공이 노래를 불러준다. 여주인공의 노래와 데이빗 보위의 원곡이 오버랩 되고, 원곡의 우주선 발사 카운트 다운과 함께 주인공은 헬기에 올라탄다.

 

모토처럼 이 곡도 발사부터 발사 성공을 축하하기까지의 부분과 그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각각은 모토의 두 부분-'장애물을 넘어', '느끼는 것-에 대응 한다. 곡에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뒷부분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I'm floating in a most peculiar way and the stars look very different today / For here am I sitting in the tin can far above the world / Planet earth is blue and there's nothing i can do.' 하지만 영화에서 이 부분은 '언급되지 않음'으로써 무시된다. 영화가 도전을 보는 방식은 결국 턱수염 사내가 탐을 보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표 달성이지 목표가 무엇이고, 그 과정에서 뭘 느꼈고 하는 것이 아니다.

 

25번 사진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혼란은 정점을 찍고, 허무함으로 변질되었다. 도대체 월터는 왜 그런 여행을 한 것이며 나는 왜 귀한 시간을 써가며 영화를 본 것인가. 영화는 그 동안 이야기 해온 것과 다른 결론은 내렸다. 버려진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몇 장의 사진 갖고 숀의 소재를 파악해야 했던 월터처럼, 25번 사진만 갖고 영화의 주제를 추론해내야 했다. 하지만 어떠한 결론-'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다.', '니가 만날 멍때리든 말든 열심히 일하는 모습 보기 좋으니 계속 일해라'-도 반동적일 수 밖에 없었다.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반동적 결론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이력서를 쓰는 마지막 장면은 최종구형처럼 내게 그것을 강요했다. 월터의 자랑은 바다에 빠진 것, 히말라야에 간 것이지 누구를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스펙처럼 자신의 모험을 줄줄이 늘어 놓는 것을 보면 지난 서울시장 선거 당시 목욕봉사 사진을 올려 화제가 됐던 의원이나, 무너진 리조트에서 '살려주세요'라는 사진을 찍은 기자가 생각난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가끔 모험도 필요하다', '이러한 모험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행해질 때 가장 효과가 좋다.'라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찝찝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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