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아

2014.03.27 18:49

menaceT 조회 수: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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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cerclerouge/40209181040

 

Noah (2014)

(IMAX 2D)

 

3월 23일, CGV 왕십리.

 

  나는 여태껏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는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 세 편을 본 상태였다. 그 작품들에는 모두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버린 이의 절박함이 묻어나 있었다.

 

  ‘레퀴엠’은 약에 중독된 이들이 점차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빠르고 자극적인 연출로 그려내며 보는 이를 무섭게 사로잡는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는 자신이 다루는 소재에 대해 과할 정도로 진지하게 무게를 잡으면서도 그 서사에 있어서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는 단점 역시 지니고 있었다. ‘더 레슬러’는 달랐다. 이 작품에 이르러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시각적 자극은 줄이고 캐릭터와 서사에 좀 더 진중하게 다가서는 방법론을 취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프로레슬링은 그 자체로 연기와 각본, 연출이 가미된, 실제와 픽션의 경계 사이에 선 스포츠이자 엔터테인먼트이다. 그리고 영화 속 두 인물은 딱 그 프로레슬링의 속성을 닮아 과거의 환영과 현실의 경계, 바로 그 지점에 갇혀 있으며, 그런 서로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낀다. 환영이 만든 세계에 갇혀 있느냐, 아니면 현실로 걸어 나가느냐, 어느 한 쪽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선택의 순간. 한 인물은 현실로 걸어 나가지만 다른 한 인물은 그 환영 안에 갇힌 채 환영으로서의 자신을 완성시킨다. 둔중하게 그 인물들의 선택의 과정을 따라가는 그 영화에서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레퀴엠’에서의 치기는 줄이고 대신 훨씬 성숙한 주제 의식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작품 ‘블랙 스완’은 예술적 성취욕과 주변의 영향으로 점차 광기에 사로잡혀 가는 한 인물이 마침내 예술의 영역, 환영의 영역에서 자신을 완성시키기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러나 비슷한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레퀴엠’, ‘더 레슬러’ 등의 전작과 비교할 때, ‘블랙 스완’이 보여준 것은 사실상 제자리걸음 혹은 퇴보에 가까웠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서사적으로는 ‘더 레슬러’에서 보여준 두 가지 갈래길 중 한 방향만을 피상적인 수준에서 반복하고 있었으며, 그 연출에 있어서는 ‘레퀴엠’에서 시도한 것을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반복할 뿐이었다. 기저에 마땅히 깔려 있었어야 할 무언가를 상실한 채, 영화는 꼴라주처럼 이런저런 현상들을 치덕치덕 붙여 바르기에 바쁜 듯 보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차기작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루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도무지 그가 어떠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예고편이 나왔을 때 의구심은 우려로 변했다. 영화의 규모는 훨씬 커졌으며, 그저 얌전하게 성경 내용을 재연하려는 듯 보였다. 작은 규모의 뛰어난 영화들을 만들던 감독들이 제작사에 치여 가며 재미없는 대작을 찍어내곤 차츰 스러져 가는 일은 할리우드에서 흔한 일인지라, 대런 애로노프스키 역시 한 번의 퇴보 이후 그렇게 몰락해 가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다. 그는 오히려 ‘노아’를 통해 새로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했던 것이다.

 

(스포일러 있음)

 

  예고편을 보았을 때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영화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이름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대로, 성경을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나름의 재해석을 더한다. 영화 중반부에 노아의 내레이션과 함께 전개되는 천지창조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성경을 부정하지도, 맹목적으로 재연하지도 않으리라는 의도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이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재해석 속에 등장하는 신은 성경에서 묘사하는 신과 달리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모습이 더욱 우리의 현실에 가까운 듯 보인다.). 따라서 신의 뜻은 늘 모호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타락천사, ‘감시자’들의 설정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돕기 위해 나서는 순간 신에 의해 버려졌고, 인간에게 핍박받는 동안에도 신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으나, 노아의 대업을 돕고 자기 희생을 하는 순간 그들은 다시금 구원된다. 그들의 타락과 구원에 대해 신은 어떠한 이유도, 어떠한 언급도 덧붙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노아는 성경에서 단순히 묘사된 ‘의인’이 아닌 훨씬 다면적이며 현실적인 함의를 품고 있는 인물로 탈바꿈한다. 노아는 꿈을 꾸고 환영을 본다. 그러나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섬뜩한 비주얼로 스크린 위에 펼쳐내는 그 지옥도가, 과연 신이 노아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대비할 것을 명하는 메시지인지 영화는 확답을 내리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셋의 핏줄이란 이유만으로 아비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살인자의 핏줄임에도 번영을 누린 카인의 후손들에게 영영 쫓겨야 하는 본인의 처지로 인한 전 인류를 향한 원망과 염세주의로 인한 환각인지도 모른다. 노아가 보는 비전에는 늘 최초의 인간을 유혹한 뱀의 형상과, 카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장면이 반복해 등장한다. 전자는 셋의 후손들이 대대로 뱀의 허물을 팔에 동여매며 기억하고자 했던 죄의 무게와 연관되어 셋의 후손으로서 노아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인류 전체에 대한 회의감을, 후자는 카인의 후손들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감을 드러낸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들이 신의 메시지라는 데 조금의 의심도 가지지 않으며 그 강력한 믿음으로 자신의 가족과 감시자들마저 설득해 방주를 짓기에 이른다. 그러나 믿음의 실체가 분명치 않은 만큼, 이는 사실상 한 광신도가 그 맹목적인 믿음을 주변에 설파해 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노아의 방주로 동물들이 한 쌍씩 찾아들고, 노아가 비전을 보고 예상한 바와 같이 홍수가 들이닥치고, 인간 군대를 막는 과정에서 자기 희생을 한 타락천사들이 다시금 구원받기에 이르면, 일견 노아의 믿음이 맹목적인 광신이 아니었고 그 믿음에 실체가 있었음이 증명된 듯하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타락한 인간을 멸하기 위한 신의 뜻이었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사람을 태우지 말란 분명한 메시지가 부재하다면, 과연 무엇을 근거로 노아는 자기 가족 외의 인간이 방주에 타는 것을 막는가? 방주 밖 바위에 매달려 인간 탑을 만든 이들이 질러대는 비명에 노아의 가족들은 그들을 태우자 말하지만, 노아는 오히려 그들에게 신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려 한다. 심지어 그는 인류의 온전한 멸절을 위해 셈과 일라가 기적적으로 얻게 된 아이를 살해하고자 맘 먹기까지 한다. 뱀의 허물을 아비로부터 물려받지 못해서일까? 그는 방주에 탄 그 순간부터 죄의 기억을 잊기라도 한 듯, 마치 카인이 아벨을 죽였듯 자신의 손으로 직접 친족 살인을 재현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믿음은 영락 없는 광기의 형상이요, 어두침침한 방주 안의 공간에서 그 광기는 더욱 그 음산함을 더한다. 노아 역시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기존에 만들어 온 인물들처럼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있고 그와 현실의 경계선 상에서 번민하며 절망 혹은 광기에 사로잡혀가는 인물임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레퀴엠’과 ‘블랙 스완’에서는 마약과 예술에 대한 집착 안에 갇혀버린 인물이 광기에 사로잡혀 가는 그 ‘현상’ 그 자체가 중요했다. 반면 ‘더 레슬러’에서는 두 인물에게 현실로 나올 것인가 계속 그 곳에 머물러 스러져 갈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더욱 그 서사적 깊이를 더했다. ‘노아’의 노아라는 캐릭터, 광신이라 해도 좋을 믿음의 굴레 하에 놓인 그 인물을 두고 애로노프스키가 내린 서사적 선택은 ‘더 레슬러’ 쪽에 가깝다. 그렇다. 그는 노아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계속 그 광신에 사로잡혀 수동적인 신의 대행인을 자청할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것인가?

 

  방주를 짓는 행위 자체가 노아의 믿음에서 비롯된 행위이고, 방주가 지어진 뒤에는 그 방주 안의 공간 자체가 노아의 광신의 근거가 되어 그를 지탱하는가 하면 그 광기가 본격적으로 표출되는 무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방주는 사실상 노아를 가두고 있는 믿음이란 굴레, 노아가 바깥 세계와 자신 사이에 두고 있는 경계이자 벽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노아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실마리는 방주 안보다는 그 바깥에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방주 바깥의 두 인물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므두셀라와 두발가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 속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간단히 언급된 것과 달리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타락천사들이 인간들에게 핍박 받을 때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도왔고, 비전을 본 노아가 자신을 찾아오자 그에게 조언을 해 주는가 하면, 나메의 애원을 듣고는 불임이던 일라를 잉태할 수 있는 몸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기도 한다. 신의 메시지를 직접 들었다고 믿는 노아에게조차도 그러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므두셀라는 신적인 존재 혹은 노아보다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의 대리자, 그것도 아니면 신과 더 직접적으로 교감하는 존재 정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노아는 인류의 멸절이 신의 뜻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신과 가까운 듯 보이는, 아니, 어쩌면 신적인 존재 그 자체일 수도 있는 므두셀라는 스스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긍정하며 일라에게 기적을 행한다. 그 기적을 행한 뒤 므두셀라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산딸기를 발견해 입에 집어넣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홍수에 몸을 맡긴다. 그가 발견한 산딸기는 어쩌면 인류의 멸절이 다다른 그 순간 비로소 발견한 인류 안의 희망 혹은 그들에게 다시 걸어보는 기대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편, 두발가인에게는 인류가 그 어떤 생명보다 존귀하며, 때문에 인류의 생존이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물을 먹는데도 주저함이 없다. 그는 셋의 후손인 노아 대신 자신이 직접 뱀의 허물을 손에 매 자신이 최초의 인류의 적통임을 주장하며, 인류를 대표해 노아의 방주를 탈취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신에게 감히 직접 소리를 지르며 대답을 요구하는가 하면, 군대를 이끌고 타락천사들에 맞서는 등, 신적인 존재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카인의 죄로 인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처했고 그들이 고생할 때 신은 그들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그를 비롯한 카인의 후손들이 신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차라리 원망에 가깝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두발가인은 신을 부정하거나 혹은 이로부터 독립하길 원하는 인간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며,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현재의 우리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이처럼 므두셀라는 신의 위치에서, 두발가인은 인간의 위치에서, 신과 인간의 중간자를 자처하는 노아의 양 편에 선 채로 동시에 그의 맹목적 믿음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홍수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모두 방주 밖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홍수가 덮치는 그 순간, 일견 노아의 믿음이 인정받는 듯한 그 순간에, 다시 므두셀라의 기적으로 인해 잉태된 새 생명, 직접 방주에 틈을 내어 들어온 두발가인 본인의 형태로 방주 안을 파고들어 다시금 노아의 내적 세계를 위협해 온다. 이후, 나메와 셈과 일라는 므두셀라로 인해 잉태할 수 있게 된 그 새 생명으로 인해 노아와 갈등을 겪고, 함은 직접 두발가인을 먹이고 간호하며 노아에게 복수할 궁리를 한다. 가장 가까이서 그의 믿음에 힘을 실어 주며 방주를 함께 건설했던 그의 가족이, 이젠 방주 밖에서 날아온 두 의심의 씨앗으로 인해 노아의 믿음을 가장 가까이서 의심하며 그와 갈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고한 듯 보였던 노아의 방주라는 공간은 그 내부에서부터 쪼개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믿음은 꿈, 환상, 비전의 영역에서 쌓여 왔다면, 그의 믿음에 대한 의심은 이렇게 현실적인 영역에서 쌓여 나간다. 더해가는 노아의 광기, 그리고 그에 따라 격해지는 가족들과의 갈등, 이것이 영화 ‘노아’의 후반부를 채우고 있다. 전작 ‘블랙 스완’에서는 한 사람이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혀 내적인 벽을 쌓아가는 그 현상의 나열에 치중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이처럼 그 벽이 외부에서 은밀히 스며든 무언가로 인해 안에서부터 허물어져 가는 과정이 더 중점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침내 찾아온 선택의 순간. 신의 섭리처럼 쏟아지던 비는 그치고, 인간의 입장을 대표하던두발가인은 함의 손에 죽는다. 므두셀라와 두발가인의 형태로 구현되었던, 신과 인간 양극단에서 노아를 잡아당기던 인력이 마치 노아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마냥 한 발씩 뒤로 물러선 이 자리, 노아 역시 자신의 광기를 오롯이 표출하던 방주 안의 어둠에서 잠시 벗어나 방주 밖, 그것도 모서리 부근에 서서 (자신이 세워둔 벽의 안과 밖 그 경계에 서서) 그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두 손녀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믿던 신의 뜻과는 반대되는 독자적인 선택을 내린다. ‘더 레슬러’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아’에서도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캐릭터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노아는 자신이 공고히 쌓아두었던 벽 바깥의 세상으로 나갈 것을 택한 뒤 방주에서 내린다. 방주에서 내린 노아가 자신이 신의 뜻을 저버렸다며 포도주에 취해 절망의 나날을 보낼 때, 그에게 ‘신은 선택지를 준 것이고, 노아는 자비를 선택한 것’이라 말하는 일라의 대사는 이 점을 더욱 명료히 드러내 보인다.

 

  ‘노아’를 두고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 중 가장 빼어난 영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의 밀도만 두고 보면 오히려 내가 본 그의 영화 중 조금 처지는 편에 속한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 있어선 조금 더 내달릴 수 있는데도 몸을 사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영화 자체의 활력에 있어서도 최고라 하긴 어려운 셈이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시각적인 면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그 테크닉이 빛나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서사에 있어서도, 비록 밀도 있게 영화 안에 녹여내는 데 실패했다고는 하더라도, 전작들의 연장선 상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만은 분명하다.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의 인물들이 보였던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인물을 끌어오되 이를 인류의 멸절 위기와 재출발에 관한 신화와 접목시킴으로써,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이야기를 좀 더 보편적이며 본질적인 위치로까지 끌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일라의 말에 기운을 되찾은 노아는 딸들을 축복하고 이에 화답하듯 하늘에는 무지개가 뜨지만, 그에 앞서 포도주에 취한 아비를 본 뒤 가나안으로 홀로 떠난 함의 존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함은 아벨을 살해한 카인처럼 친족 살인의 욕망을 품고 있었다. 죄를 범할 욕망을 품은 것 자체로도 이미 그 죄를 지은 셈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던가? 함이 친족 살인의 욕망 앞에 고민하다 두발가인을 칼로 찔렀을 때, 카인의 후예인 두발가인은 함을 바라보며 ‘비로소 man(남자를 의미할 수도, 아니면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이 되었다’고 말한다. 카인의 후예이자 인류의 대표자 역할을 하던 두발가인의 자리를 함이 물려받은 셈이다. 두발가인의 죽음 이후 뱀의 허물은 다시 셋의 후손인 노아에게 돌아갔고, 이에 따라 노아는 자신의 번뇌로부터 벗어나 다시 죄를 기억하며 인류의 새 출발을 축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카인이 지은 친족 살인의 죄는 그렇게 함에게로 상속되어, 함이 길을 떠남에 따라 다시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어쩌면 다시 시작한 인류는 착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극중 인물들의 염원은 그렇게 음울한 암시로 바스러진다. 노아가 겪었던 그 광기의 흔적 역시, 비록 노아 자신은 벗어났다 하더라도, 새로이 길을 떠난 함을 통해 인류의 역사 안에 다시 뿌리내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에서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기록해 온 현대인들의 면면으로 이어져 온 것이리라.

 

  대런 애로노프스키와 흔히 비교되곤 하는 감독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을 들 수 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69년생이며 98년작 ‘파이’와 2000년작 ‘레퀴엠’으로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70년생이며 97년작 ‘부기 나이트’와 99년작 ‘매그놀리아’로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으니 연배로 보나 그 필모그래피로 보나 상당히 유사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로 현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를 사람 간의 이야기로 촘촘히 풀어내더니 ‘매그놀리아’에서 두 인물을 꼽아 재구성한 듯 보이는 소극 ‘펀치 드렁크 러브’로 이를 살짝 위로하고는, 대뜸 과거로 날아간다. 그리고는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갓 들어섰을 때의 미국, ‘마스터’에서는 2차 대전 전후의 미국, 이렇게 미국의 역사를 되짚어가며 그 병리적 현상의 기원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노아’가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그런 전환점인지도 모르겠다.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으로 자기 안에 갇힌 현대인들의 면면을 기록하던 그가 비로소 ‘노아’에 이르러 그 기원을 탐구하고 여태까지의 필모그래피를 갈무리하려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의 그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스케일, 지금까지의 그의 영화들에서 다룬 이야기들의 근원이자 총정리 격인 이야기, 여러 모로 ‘노아’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에게 있어 과도기적 작품으로 보인다. 더 큰 무언가, 혹은 더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도약하기 위한 몸짓이 이 영화에 묻어나고 있다. 봉준호에게 ‘설국열차’가 있다면, 애로노프스키에게는 ‘노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도무지 나쁘게 말할 수가 없다. 나는 흔쾌히 그의 다음을 기다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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