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BBC Sherlock, 7-6

2011.03.04 12:30

lonegunman 조회 수:4765







7-6. 변주곡 variation

아저씨, 여기도 하느님이 만드신 거예요?
당연히 하느님께서 만드셨지
하느님이 일리노이를 만들고, 미주리 강도 만든 분이죠? 그럼 여기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게 분명해요. 잘못 만들었잖아요.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 루시와 스탠거슨의 대화 (주홍색 연구)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고 단단히 꼬고 있던 팔짱을 처음 푼 것은 언제입니까? 지나가던 동네 꼬마에게 셜록 홈즈를 리메이크 시켜도 당연한 수순으로 등장할 221B 문패의 클로즈업 씬에서도, 현대판에선 등장할 일 없을 거라 여겼던 친애하는 말채찍이 등장하던 의외의 순간에도 저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저를 무장 해제시킨 장면은 바로 'RACHE' 씬이었습니다. 네, 독일어 '복수'를 떠올렸다가 1초만에 '레이첼'로 정정하는 셜록 마음의 소리 씬 말입니다. 별 거 아닌 장면이지만 라헤가 레이첼로 변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내서 웃었습니다. 원작에서 레스트레이드가 범인은 '레이첼'을 쓰려던 것 같다고 추리했을 때 홈즈가 그건 '라헤'라며 그를 얼마나 비웃고 면박을 줬는지 너무 잘 아니까요. 심지어 앤더슨이 그건 독일어로 복수라고 (맞게) 해석하고 한껏 뽐을 내는데 셜록이 한심스럽다는 듯 가볍게 무시하는 대목에선 무의식 중에 화면과 대화할 뻔했습니다. 어이, 그건 셜록 자네가 예전에 아니, 전생에 아니, 그러니까… 아무튼 그건 네가 한 말이라고!

앞선 캐논canon 장에서 우리는 이 시리즈가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원전에 기대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무척 신선해보이는 발상들, 아주 세련된 농담들, 지극히 현대적인 설정들로 생각했던 장면 장면들이 알고 보면 그 옛날 원전 속에 담겨있던 것을 단지 끄집어내기만 한 것이라는 사실은 사뭇 놀랍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진짜 빛나는 부분들은 원전에서 한 발씩 벗어날 때 발생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들이 원전을 외면할 때 이 시리즈가 더 좋은 작품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에피소드들은 '바스커빌가의 개'나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 '죽어가는 탐정', '악마의 발', '푸른 석류석' 등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와 조금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작품들이 사랑받는 건, 그것이 다른 에피소드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물론 어떤 면에선 그러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외적이기 때문입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작품이었다면 현재와 같은 전설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다만 그것들을 예외적으로 품고 있는 거대한 전체가 있기 때문에 전설적인 전체도, 그 안의 예외적인 부분들도 서로를 더욱 빛내는 것이지요. 하려던 말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전에서 '한 발' 벗어나 있다는 건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유명한 '별 일 없으면 즉시 와주게, 별 일 있어도 와주게' 메세지는 원전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메세지가 등장하는 타이밍을 보십시오. 원전에서 왓슨이 위의 전보를 받는 것은 둘의 관계가 한참 진행된 시리즈 후반부의 어느날이었습니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반자인 홈즈로부터 이 전보를 받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왓슨이 얼마나 땅을 파고 들어가는지 한 번 들어나 봅시다.


그에게는 판에 박힌 몇 가지 버릇이 있었는데 나 또한 그에게 버릇처럼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하숙집의 명물인 바이올린이나 새그 잎담배, 해묵은 검정 파이프, 색인집같은 존재였다. 아니면 그보다 더 볼품없는 물건 비슷한 존재였다.
그는 내 면전에서 떠들어대며 생각하길 좋아했다.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라고 볼 수가 없다. 침대를 향해 주절거렸어도 되는 말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버릇이 됨으로써 내가 반응을 보이고 말참견을 하는 것이 어느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일면 느려터진 내 정신의 작동 방식 때문에 그를 짜증나게 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그 덕분에 그의 섬광같은 직관과 인상이 더욱 생생하고 더욱 빠르게 번뜩였다. 우리의 동맹 관계에서 내가 맡은 변변찮은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기어다니는 남자)


일단 눈물 좀 닦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2인조의 실체가 이러하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이러한 왓슨의 통찰이 일견 날카롭게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조금 쓸쓸해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BBC판에서는 위의 전보를 시즌 초반에 배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존이 자발적으로 셜록의 자기장 안에 뛰어드는 결정적인 전환점의 표지판으로 세워놓습니다. 마치 필요에 의해 뒤적이는 색인집처럼 무신경하게 그저 손 닿을 데 두고 필요하면 찾는 물건으로써의 왓슨이 아니라, 아직 공식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거절하거나 무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서 오로지 자유 의지로 셜록을 택하는 현대의 존. 그 모습을 그리는 데에 이 메세지를 이용했다는 건 무척 의미심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해골 모형을 '친구'라고 부르며 나중에 허드슨 부인이 그걸 치워버리자 존으로 '친구'를 대치하고, 둘 다 없을 때를 대비하여 벽면에 해골 사진을 붙여놓기까지 한 셜록의 모습을 통해 원전의 성격을 암시하긴 합니다. 그래도 위에서 밝힌 변주는 어떤 면에서, 그들에게 혹은 셜록 홈즈라는 시리즈 자체에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기회'라는 관점에서 더욱 잘 읽히는 변주는 또 있습니다.

셜록과 존은 범인에게 미끼를 던지고 노덤벌랜드가에 잠복합니다. 미끼를 문 범인의 택시가 등장하고 둘은 그를 추격하죠. 이러한 추격씬은 원전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추격의 소소한 면면을 들여다 보면 무릎을 딱 치게 됩니다, 두 번째 기회!


홈즈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영업용 이륜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 멈춰있던 마차로, 남자 손님이 타고 있었다.
'저기 우리 목표가 있어, 왓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친구 얼굴을 정확히 확인해야 해!'
그 순간이었다. 마차의 옆쪽 창을 통해 검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사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마차의 지붕을 확 열고는 마부에게 다그치듯 소리쳤다. 마차는 미친 듯이 리전트가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홈즈는 부리나케 다른 마차를 찾았으나 빈 마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마차 사이를 뚫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때는 늦었고 마차는 더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운이 없기도 했지만 정말 바보같은 짓을 했군! 자네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번 일을 기록해서 내 성공을 조금은 깎아 내려야 할 거야.'
홈즈가 마차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며 숨이 찬 채 내뱉듯 말했다. 그의 얼굴은 분해서 파랗게 변해 있었다.
'마차의 번호를 기억해 뒀으면 좋았을걸!' 내가 말했다.
'왓슨, 내가 아무리 멍청한 짓을 했다지만, 정말로 마차의 번호까지 놓쳤겠어? 번호는 2704번이었어. 그래봐야 당장은 아무 쓸모도 없겠지만.'
'누구도 자네보다 빈틈없이 대처하지는 못했을 거야.'
'마차를 본 순간 곧바로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갔어야 했어. 그 후 다른 마차를 잡아타고 느긋하게 미행을 했어야지. 아니, 더 확실하게는 노덤벌랜드 호텔에 먼저 가서 기다리는 방법이 있었겠군.'
(바스커빌가의 개)


눈치채셨습니까? 티비판의 셜록은 원전의 홈즈가 후회하며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판단한 바로 그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노덤벌랜드가의 식당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택시를 본 순간 곧바로 돌아서서 그의 머릿속에 입력된 런던A-Z 지도책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죠. 심지어 원전에서 홈즈가 유일하게 잘한 일인 '마차 번호 외우기'를 존이 그대로 시전하지만, 전혀 도움 안 되는 헛짓이란 의미를 꾹꾹 눌러 담아 'good for you!'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기까지 합니다. (어이, 그건 자네가 예전에…) 원전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는 (그레잇 게임-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것을 보는 게 홈지언들에게 즐거운 일이라면, 원전의 실수를 만회하는 것을 보는 건 그야말로 흥분되는 경험입니다. 물론 티비 속 '셜록'과 책 속의 '셜록 홈즈' 그 둘은 동일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에서 같은 삶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만을 지켜봐야 한다면 그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BBC 시리즈 '셜록'이 그 '셜록 홈즈' 이야기이기를 바라지만, 마치 철저히 원근법을 지켜 그린 그림 속에서 소실점을 비껴 그린 의자 하나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한 발 어긋난 작은 예외들이 모든 게 결정되어 있는 경직된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합니다.

만일 이 시리즈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셜록 홈즈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면 이러한 변주들이 이만큼 큰 흥분을 가져다주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보했기를 기대하고, 우리가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현대로 옮겨진 이야기 속 과거 그대로의 단점 투성이인 우리의 주인공들이 세월의 때를 타지 않고 그때 그대로임을 확인하며 안도하죠. 그러나 한 편으로는, 우리의 바람대로 과거보다 아주 조금만큼이나마 성장한 그들의 모습에 열광합니다. 그것이 단지 착각이었어도 좋습니다. 그저 우리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가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뿐입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 작가들이 원전을 변주하는 방식은 반대로 무척 유쾌한 것입니다. '그리스인 통역사'에서 마이크로프트의 의뢰인 멜라스가 홈즈와 왓슨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했는지를 보면 그야말로 유쾌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황당하게도 창문은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종이가 발라져 있었어요. 래티머씨가 말했습니다. '시야를 가려서 죄송합니다. 실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알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테니까요.' / 내가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불법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게 좀 무례한 행동인 것은 분명하죠. 하지만 두둑이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거나 내게 해가 되는 행동을 했다가는 쓴맛을 보게 될 겁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나를 납치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잠자코 앉아 있었죠.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내가 저항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분명하니 장차 어떻게 될지 두고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원전 속 악당의 납치 수법을 왓슨을 위협하는 데에 얼마나 충실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써먹는지, 드라마 속 장면을 떠올려보면 감탄스러울 지경입니다. CCTV의 고개를 모두 돌려 사각지대에 왓슨을 위치시키고, 무신경한 요원을 배치해 물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납득시키고, 말 잘 들을 시엔 두둑한 보상을 약속하고… 다들 아시다시피 BBC의 현대판 셜록은 원전을 전혀 읽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원전과 가장 다른 캐릭터인 마이크로프트 등장씬들의 재미는 다른 어떤 장면들보다도 원전에 가장 크게 기대고 있습니다. 하기야, 다르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니까 달라지기 전의 원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이러니한 게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위의 이야기를 알고 보았을 때, 마이크로프트의 첫 등장씬은 이중 삼중의 트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엔 납치하는 방식 때문에 '그리스인 통역사'와 대응되는 악당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우산을 짚고 있는 실루엣을 얼핏 보고는 막연히 셜록인 줄 알았다가, 얼굴을 비춰준 다음에는 으레 모리아티인 줄 알았다가, 에피소드가 다 끝나갈 즈음에서야 비로소 그의 정체는 (추측할 수 있는 모든 범위 안에서 가장 그럴 법하지 않아 보이는) 마이크로프트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겁니다. 이 여러겹의 트릭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던 저는 마이크로프트가 정체를 밝히는 순간이 시즌을 통틀어 가장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정체가 밝혀진 후 다시 그의 첫등장씬을 복습했을 때, 그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해야 정확하겠군요.

이건 어떻습니까? 원전에는 여러가지 오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실수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빨강머리 연맹'에서 마차타고 헤매는 씬을 봅시다. 낮에는 왓슨이 '올더스게이트에서 잠시 걷자 아침에 들었던 독특한 이야기의 현장인 색스코버그 광장이 나왔다.'고 묘사한 같은 거리를 밤에는 '가스등을 밝힌 끝없는 미로같은 거리를 덜컹거리며 달려서 마침내 패링턴 스트리트로 접어들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시 걸어도 되는 거리가 끝없는 미로로 둔갑하는 이 서술상의 오류를 드라마판 작가들은 에피소드 말미에 '형편없는 택시기사야, 고작 이만큼 오는데도 얼마나 빙빙 돌던지.'라는 셜록의 대사로 넌지시 암시합니다. 영상에는 담겨져 있지 않지만, 존의 블로그에 가면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예도 있습니다. 존의 블로그에 '메리 터너'라는 아이디로 올려진 댓글들은 모두 허드슨 부인이 쓴 것인데요, 이는 원전에서 하숙집 시중을 드는 사람을 주인공들이 '허드슨'과 '터너' 둘로 혼동해서 부르는 점에 기인한 것입니다. 블로그를 살펴보면 허드슨 부인이 터너양의 아이디로 접속했다고 해명하는 댓글이 있습니다. 원전의 오류들을 에두르지 않고 뚫고나가는 작가들의 솜씨를 보십시오, 이 얼마나 애정어린 빨간펜 첨삭입니까.

수사에 미치는 존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 또한 괄목할만한 일입니다. 존이 없었으면 셜록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네 개의 서명'에서 왓슨이 적었듯 셜록은 짧은 길을 멀리 돌아가기도 합니다 ('제 아무리 머리가 좋은 이론가라 할지라도 때로는 과오를 범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이론적으로만 따지기 때문에 종종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상식적인 설명으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문제도 일부러 어렵게 해석하려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존이 끼어들어 수사를 간단하게 만들어주는 대목들은 거의 통쾌하기까지 하지요. 지워진 기호를 기억해내게 하기 위해 존의 머리통을 붙잡고 너 같은 보통 사람 두뇌로는 62%도 다 기억 못한다고 떠드는 셜록에게 핸드폰으로 찍어놓은 사진을 꺼내보이는 장면이나 (짱인데? 하는 셜록의 표정이라던가), 역 앞에서 용의자의 행적을 추론해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며 우왕좌왕하는 셜록에게 본인의 주체할 수 없는 호감형 성격만으로 손쉽게 입수한 다이어리를 참고하여 '저기'라고 목적지를 지적해내는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물론 존의 처지가 나아진 부분만 있는 건 아닙니다. 원전 '네 개의 서명' 속 같은 장면에서 셜록을 목적지로 인도하는 존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토비'였죠. 개요. dog. 넘어갑시다.

홈즈는 늘 왓슨에게 자신의 논리적 추론들을 이야기로 전락시키지 말라고 하지만, 왓슨이 홈즈의 반발에도 불구, 그것을 모험, 근사한 쇼로 체험하고 묘사하는 것은 사실은 굉장히 정확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진정한 '추리'는 셜록 홈즈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어떤 일이며 그는 결코 공정한 게임을 하지 않죠. 앨러리 퀸 이후 세대의 눈에는 더욱 그러해보일 것입니다. 실은, 셜록 홈즈 자신의 입을 통해서도 그 공정성의 문제가 여러번 언급됩니다.


일련의 추리를 짜맞추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나하나의 추리는 앞의 추리에 의존하는데, 각각의 추리 자체는 아주 간단해. 그런 식으로 하나씩 추리를 한 후, 핵심 추리는 감추고 추리의 출발점과 종점만 제시하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지. 좀 저급한 수작이긴 하지만 말이야.
(춤추는 사람들)


우리가 원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홈즈의 추론이 그 자신이 주장하는 '연역 deduction'이 아니라 '귀추 abduction'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귀추법은 이미 벌어진 사실, 주어진 결과를 통해 그것을 유발한 원인을 규명할 때 주로 쓰이는 논리입니다. 사건 현장에 남은 발자국이나 지문을 통해 그것을 거기에 남긴 외부 행위자의 특성을 추론하고, 소매 끝의 얼룩이나 신발에 묻은 진흙을 통해 그것을 거기에 남긴 행위자의 선행 행동을 추론하고, 고열과 오한과 기침 등의 징후를 통해 환자가 유행하는 독감에 걸렸음을 진단하는 등의 추론은 모두 귀추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일부러 이러한 예시를 들었습니다. 뛰어난 의사였던 왓슨이 귀추의 천재 홈즈에게 매료되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하나의 결과를 낳는 원인은 무수히 많을 수 있으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귀추도 논리 자체만으로는 진리를 보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뛰어난 관찰력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분석력,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종합하여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하나의 원인을 도출해내는 추리력을 가진 자가, 실제 세계에서 한정된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경제적인 설명을 산출해내는 작업을 한다면, 그는 진리에 무한히 근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도 때로는, 우리 눈엔 다른 무수한 가능성이 있는데도 자신의 결론이 '명백'하고 '연역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가 감안해야 하는 것은 그의 오만함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정보의 빈약함인지도 모릅니다. 즉, 우리는 홈즈가 자신의 입으로 발설한 '추론의 일부' 중에서 왓슨이 책에 기술한 '더 작은 일부'만을 보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그는 모든 가능한 설명들을 산출하고 그 중 대부분이 왜 불가능한지를 가늠한 뒤 단 하나의 유일한 가능성을 채택하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거의 순간적으로 해낼 수 있었으므로, 그에게 있어 귀추는 연역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귀추법을 연역법의 경지로 끌어올린 그 놀라운 두뇌가 작동하는 과정의 일부의 일부만을 보았을 뿐이며, 그 결과가 우리 눈엔 결코 명백하거나 연역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 홈즈의 추리가 그러했으리라고 가정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와 홈즈 중 어느 쪽이 속단을 하고 있다면 그게 우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그의 추론이 항상 맞았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맞도록 만들어진 세계의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변호는 불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실제 범죄 해결에서 적극적으로 귀추법에만 의존하는 예는 '경주마 은점박이' 정도를 제하면 거의 찾기 힘듭니다. 실제 홈즈가 사람을 한 번 쓱 보고 귀추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것은 대체적으로 왓슨이나 의뢰인을 놀래키는 유희이고, 그걸 범죄 해결과 연결시키진 않죠. 범죄 해결의 방법론은 본인의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통한 귀납적 추리나, 최신 과학 이론을 확증된 '참'이라고 가정하는 과학자적 태도를 통한 연역 추리, 그리고 마이크로프트가 지적한대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발품팔이, 거기에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귀추적 직관이 얽히고 설킨 방대한 네트워크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귀추의 천재인만큼 사건 초기에 귀추법을 통해 하나의 '명백한' 결론을 내리는 일은 많지만, 그것을 위의 귀납, 연역, 조사 과정을 통한 확증없이 발설하거나 속단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지난하고 긴 이야기를 제가 왜 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티비판에서 이러한 홈즈의 규칙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처음 눈치챈 것은 핑크레이디의 수트케이스 논증에서였습니다. 그것은 원전에서도 몇 번 등장하는 논증인데, 가장 근접한 예를 봅시다.


무슨 비결이 있는 건 아니에요. 재킷 왼팔에 예닐곱 군데나 진흙이 튄 자국이 나 있잖아요. 그런데 자국이 아주 생생해요. 그런 식으로 진흙이 튀는 마차는 도그카트밖에 없지요. 마부의 왼쪽에 앉아서 오셨군요.
(얼룩띠)


원전에서 이 추론은 의뢰인을 당황시키고 끝나는 유희에 다름아닙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드라마에서 오른쪽 다리에 튄 진흙자국과 피해자의 옷차림으로 귀추한 핑크색 소형 수트케이스의 존재는 사건 해결의 A-Z가 됩니다. 홈즈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경험과 지식은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간편하게 대치되고, 시리즈는 거의 셜록의 무시무시한 직관력, 천재적인 귀추 능력 하나에 범죄 해결의 사활을 겁니다. 난무하는 거짓 속에서 사소한, 너무 사소해서 범죄자들이 위장하거나 은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사실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진실로 향하는 최단 경로를 산출해내는 능력. 그것이 홈즈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스마트폰 검색능력으로 덜어놓고, 사건 해결시 입증되지 않은 귀추적 결론을 명백하다고 섣부르게 주장하도록 만들면서까지 작가들이 주목하는 '현대판' 주무기라는 점은, 홍수라 불리우는 정보의 바다에서 번번이 길을 잃고야 마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효하고 필요한 초능력이 무엇인가를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엄밀해도 진리를 보증받지 못하는 귀추법적 추리는, 셜록이 아무리 공들여 부정해도 현실에선 여전히 추측의 영역이며, 그것은 언제나 무궁무진한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게임 내내 결정적인 힌트(운동화, 야누스 카, 초신성 폭발)를 던져주다가, 진짜 목적을 위해 단 하나의 거짓 정보 (몰리의 게이 남자친구로 위장)를 던지는 모리아티의 수법을 떠올려보십시오. 모리아티의 거짓 정보를 보란듯이 귀추해내고 그 결과를 확신했던 셜록의 재능이, 그 자신과 존을 어떻게 파멸로 이끌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모호한 정보들 속에서 진실을 꿰뚫는 셜록의 천재적인 능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연역과 같이 명백한 논리가 아니며, 셜록 자신의 내부에선 그것이 얼마나 연역적인 과정과 유사한지 몰라도, 외부 관찰자의 눈에 그 모든 것은 여전히 모험, 신기한 쇼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현실의 결과와 대조하기 전까지는 결코 참임을 확증할 수 없는,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마술처럼 실제와 꼭 맞아떨어지는, 그러나 여전히 실패의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있는, 아슬아슬한 묘기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왓슨의 서술 방식은 얼마나 진실한 것입니까.)

드라마는 추리 과정의 엄밀함, 원전에 담긴 과학자적 태도를 살짝 덜어내고 천재의 묘기를 보여주는 데에 매진합니다. 원전 자체도 상당 부분 불공정한 천재의 묘기라고 평가받는 마당에 BBC판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갔으니, 앞에서 말했듯 앨러리 퀸 이후의 우리가 보기엔 거의 무력감을 느낄만큼 지나치게 불공정한 게임으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거나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나 역시 앞에서 말했듯이, 천재의 아슬아슬한 묘기를 지켜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 무척이나 즐거운 경험입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원전에 관심 없거나, 추리 소설 자체에 관심 없었던 많은 시청자들에게서도 이토록 폭넓은 열광을 이끌어내는 게 가능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레이게이트의 지주들'을 인용하자면, 그의 광기에는 이치가 있고, 그의 이치에는 광기가 있으니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400
581 [영화] 노웨어보이, Nowhere Boy vs. 레논 네이키드, Lennon Naked [20] 가시돋힌혀 2010.07.03 5079
580 [영화] 레드 RED [6] [1] 곽재식 2010.11.07 5023
579 [영화] [프로메테우스] 진화론으로 푸는 우주적 미스터리들... (스포일러 有 // 이미지 수정 완료) [4] [1] 또롱또롱 2013.01.03 5022
578 [영화] 이끼(2010) - 스포일러 [2] [1] 개소리월월 2010.08.05 4995
577 [책] 고령화 가족 1분에 14타 2010.03.31 4990
576 [영화] 서스페리아 Suspiria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8] [18] Q 2013.04.15 4988
575 [영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대지진] [1] taijae 2010.10.27 4984
574 [영화] 안티바이럴 ANTI-VIRAL (브랜던 크로넨버그 감독: 내용 생리적으로 불쾌할 수 있습니다) [2] Q 2014.04.28 4981
573 [영화] 세컨즈 어파트 Seconds Apart <부천영화제> [25] Q 2011.07.19 4973
572 [영화]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 [3] [26] 곽재식 2011.03.19 4973
571 [영화] 하녀 (2010) 개소리월월 2010.06.10 4964
570 [드라마] 조선 X파일, 기찰비록 [2] [1] 유로스 2010.09.19 4963
569 [영화] 하얀 리본 (스포일러 포함) [3] [2] 어둠의속 2010.07.12 4960
568 [영화] 어스픽스/사령 (死靈) The Asphyx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1] [16] Q 2011.10.15 4959
567 [영화] 7번방의 선물, 아름다운 아버지와 착한 어린 딸의 아름다운 이야기 [2] [14] booak 2013.01.25 4942
566 [영화] 홀리 모터스 [2] [10] menaceT 2012.12.04 4939
565 [소설] 악의 교전 (키시 유우스케 작가) [3] [3] Q 2012.09.28 4936
564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2] Q 2015.05.21 4927
563 [영화] 사랑은 너무 복잡해 (It's Complicated, 2009) : 실은 간단하지 [1] [3] 조성용 2010.03.12 4918
562 [드라마] BBC Sherlock 2, 7-5, 7-6. [21] lonegunman 2012.02.08 491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