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퍼시픽 림 (한국어 번역본)

2013.09.22 21:53

Q 조회 수:4002

퍼시픽 림 (공식 소설) Pacific Rim: The Official Novelization

 

저자: 알렉스 어빈 [어바인] Alex Irvine

번역번역:  박산호

출판사: 황금가지 (원 출판사 Titan Publishing)

출판연도: 2013년 6월27일

 

 

 

한때는 저도 SF 기타 장르영화들의 노벨라이제이션을 열심히 읽었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도 기억에 남는 예로는 데니스 에치슨의 [비데오드롬] 소설화, 앨런 딘 포스터의 [스타워즈] 그리고 [에일리언] 소설화 버젼과 퀄리티로 따지자면 하수에 속했던 데이빗 셀처의 [오멘] 시리즈 등이 있군요. 특히 [스타워즈] 의 경우는 수도 없는 한국어번역판들이 시장에 넘쳐나던 가운데 (70년대 말 얘깁니다 여러분들... 휴대폰은 커녕 개인용컴퓨터도 없던 시절) 월간팝송사에서 내놓은 번역본이 유일하게 일본어에서의 중역이 아닌, 영어원본을 고심해서 번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군계일학의 양상을 띄고 있었던, 그런 기억이 나네요. 이런 귀중한 자료들 어딘가에 보관이라도 되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30년동안의 구미 SF 문학의 한국어 번역의 양상을 연구하고 싶다고 누가 나선다 하더라도 이러한 기본 자료들을 볼 수라도 있어야 뭔가 파악이 가능할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넘어가서, [퍼시픽 림] 의 노벨라이제이션은 알렉스 어바인 (Irvine 이니까 “어빈” 이라고 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모르죠 본인이 어빈이라고 읽는다는 정보가 있어서 이렇게 표기하셨을지도? 확인해주셔서 어빈이 맞으면 그렇게 고치겠습니다) 작가가 맡았습니다. 어바인 작가는 초기에는 2차대전 당시의 디트로이트에 건설된 대나찌 병기로 개발한 골렘 (예, 유태인 전설에 나오는 그 골렘) 을 만드는 진흙공장을 배경으로 한 [The Narrows] 등의 오리지널 소설들을 썼었는데 이제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노벨라이제이션 등으로 훨씬 더 유명한 것 같더군요. 노벨라이제이션을 많이 해보신 한 미국인 SF 작가분과 얘기해 본 적이 있는데, 특히 이 작업이 돈이 더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단지, 오리지널 소설은 한 번 써도 안팔리면 망하는 것인데 비해 이 서브장르의 경우는 망하건 말건 어차피 나와야 되는 상품이므로 안정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노벨라이제이션 작가로 이름이 날리면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할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어차피 어바인 작가는 메인대학의 영문학과 교수시기도 해서, 돈때문에 어쩔수없이 노벨라이제이션 마켓에 뛰어드신 것 같지는 않아보입니다.

 

[퍼시픽 림] 의 소설판은 준수하게 잘 써져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소설에서 원래 판본인 영화와 완전히 독립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시간의 낭비가 되겠죠. 에치슨의 [비데오드롬] 같은 예에서는 원작자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워낙 스타일과 사상이 다른 분이라 본편과 취향과 질감이 아주 다른 한편이 나왔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에 속하고, 어바인 작가는 영화 [퍼시픽 림] 을 본 분들에게 그 잔영을 지속시키면서 영상이 전달해 줄 수 없는 그 가상세계의 뭉근하고 진득한 매력을 전달해줌과 동시에,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께는 영화보다 지레 너무 앞서나가서 쓸데없이 과격하게 복잡한 세계관을 그려내거나 하지 않고 입맛을 한껏 돋구어주는, 노벨라이제이션의 정도 (正道) 를 밟아갑니다.

 

물론 노벨라이제이션이라는 포맷의 한계라는 점은 분명히 있죠. 그걸 넘어서려는 과격한 시도는 실패거나 성공이거나 간에 [퍼시픽 림] 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그걸로 책을 잡고 싶으신 분들도 계실 지도 모릅니다. 한 예를 들자면 캐릭터들의 묘사는 절대로 어느 선을 넘어서 풍성해지는 일은 없고 각본상의 프레임웍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모리 마코와 주인공 롤리의 (후자의 경우 지극히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일인칭 “생각풍선” 기법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도 영화에 나오지 않은 어떠한 새로운 차원의 전개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마코의 집안이 칼 만드는 장인이었다는 정도? (별로 매력적이거나 흥미있는 설정도 아닙니다) 최소한 마코의 생김새 묘사 정도라도 자세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제 기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크림슨 타이푼을 모는 중국인 세쌍둥이 등 잠재적으로 흥미있는 캐릭터들은 영화안에서도 무시되듯이 여기서도 무시됩니다.

 

이 한편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실감나게 묘사된 캐릭터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너드 과학자 뉴튼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손에서는 뉴튼과 허먼은 코메디 릴리프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소설에서의 이들은 “괴짜 과학자” 적인 과장섞인 설정이 훨씬 약화되고, 카이주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름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죠. 홍콩만에서의 집시 데인져와 카이주와의 대혈투도 전지적 3인칭 작가의 시점보다는 뉴튼의 시점에서 쓰여진 묘사가 훨씬 박력있고 리얼합니다. 어바인 작가가 뉴튼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쪽의 스토리라인이 더 SF 적인 재미가 있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반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각본상의 설정을 좀 비틀어라서도, 마코, 롤리, 펜터코스트, 척과 허크 등 예거 팀의 갈등을 그린 부분보다도 드리프트에 관한 부분을 더 강조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드리프트 자체에 대한 묘사는 나쁘지 않아요. 이런 긴박한 심리 묘사는 원래 영미권 소설들이 잘 하는 거죠. 역사도 길고.  왜 막대기를 휘두르는 무술 시합으로 치고받고 하는 게 드리프트용 파트너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가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도 영화 각본보다 소설이 더 납득이  가게 설명이 되어있는 등, 이 쪽을 더 발전시켜 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퍼시픽 림] SF 설정은 무리가 많아요. 영화를 볼때야 뭐 거대로봇이 공룡형괴수와 치고 받는 영화잖아 그러고 보면 되지만, 소설을 읽을때는 좀 다르죠. 소설이라는 매체에 대한 기대의 형식이 달라서 그런 점도 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공룡이 카이주 1세대 실험 모델이었고 공룡들이 멸종한 다음에 1억년을 기다려서 다시 현대에 침략을 개시한다는 건 좀... 과유불급이고요. 그리고 이건 영미권이나 (최근의 지독한 예로는 [프로메테우스]) 동양권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비판입니다만 시간의 스케일에 대해 무관심한 SF 가 정말 많아요. 여러분, 말이 1억년이지... 우주의 전 수명이 130억년 정도라고 지금 추산되고 있는데... 크로마뇽인이 생겨난지 1만년되었다고 치고 1억년이면 크로마뇽인이 생겨나서 지금 우리에 이르까지의 세월이 만번 (!) 되풀이되는 장구한 세월입니다요.   솔직히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지구 같은 행성을 침략하느라 1억년을 기다리는 문명은 좀 띨띨한 거 아닙니까?!  다른 차원에 구멍을 여는 기술도 있으면서... 그렇게 기다릴 시간에 그냥  우주의 티끌을 모으든지 해서 지구보다 더 나은 별 하나 만들면 되겠네요. 지금 지구인의 기술로도 1억년이라는 시간여유가 있으면 충분히 인공행성 하나 짓고도 남을 겁니다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통합적으로 보자면 다이나믹하고 명료한 필치로 쓰여지고 구조적으로도 탄탄하게 짜여진 한편으로, 지루하지도 않고 박진감넘치는 묘사도 많습니다. 요즘 유행을 무리하게 따라가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아, 저널리스트 리포트, 각종 정부기관들 간의 메모와 보고서, 가상 인터뷰 등으로 구성된 사이드바 텍스트가 여기저기 삼입되어 있는데 이건 좀 유행을 타는군요. 개중에는 재미있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본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중복되는 텍스트가 너무 많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한국어 번역은 대체적으로 잘 되어 있습니다. 전 사실 번역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그렇게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엉터리가 아니라면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만, 읽다가 “원문에도 이런 의미로 쓰였나?” 라고 의구심이 들거나, 문장 자체가 의미불명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그런 부위는 얼마 없었습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달달한 노래” 라는 번역이 sweet song 이라는 문구의 번역인지 (p. 130), 만일 그렇다면 “달달하다” 라는 표현은 아마 부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뭐 그런 개소가 좀 있었고, 반면 뉴튼에게서 드리프트 실험을 모니터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군인이 “지금 농담하시지 말입니다...” (p. 341) 라고 뒤로 빼는 그런 부분은 너무 한국식 어법에 경도했다는 비난도 나올 수 있겠지만 저는 (번역자의 권리에 포함된) 위트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싶네요.

 

정통 SF적인 품격을 기대하시면 실망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퍼시픽 림] 영화판에서 얻을 수 없었던 확장된 세계관을 상상하신 분들의 기대에도 좀 못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노벨라이제이션이라는 포맷안에서 놓고 보자면 제대로 할 일을 해낸 한편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족에 [퍼시픽 림] 의 내용에 대한 약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족  1: 어바인의 소설에서는 한니발 차우는 새끼괴수에게 잡혀먹힌 채로 끝납니다.   전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요. ^ ^

 

사족 2: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기 때문에 아마도 영어판에서라면 눈에 잘 들어올 인조크라던가 오마주를 좀 놓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처음 드리프트를 개발했을 때의 역사를 다룬 사이드바 텍스트에서 순직한 파일럿이름이 “세르지오 도노프리오 (ㅋㅋ ^ ^)” 라던지 그런... 알면 웃기고 몰라도 아무 문제도 없는 그런 디테일들 말씀이죠.

 

사족 3: 저도 미국식으로 기원을 따지자면 동부 출신이지만 작가의 샌프란시스코 디스는 맘에 안 들더군요. 이상한 놈들은 다 샌프란시스코에 몰려 산다는 투의.  미시건이나 메인에도 이상한 사람들 찾아보면 많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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