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

2013.10.28 12:12

menaceT 조회 수:1930

 

Like Someone in Love (2012)

 

10월 27일, CGV 압구정. 

 

  줄곧 진짜와 가짜, 현실과 픽션 사이 경계를 탐구하던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영국인 남성과 프랑스인 여성을 맞붙여 놓고 그 자리에서 다시금 심도 깊게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다루더니, 그 다음 작품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는 일본으로 향했다. 어쩌면 낯선 세계를 탐구하는 데서 오는 그 묘한 이질감 자체가 키아로스타미의 탐구에 활력을 더하는 듯하다(비슷한 예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홍상수 역시 '다른나라에서'에서 유사한 구조 실험에 외국인 주인공을 끼워 넣음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더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상대적으로 그 야심을 덜 내비치는 편이다. 이번에 키아로스타미는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것을 차용해 진정한 소통이 어려워진 현상 그 자체를 그려내려 한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 주를 이루는 유리의 이미지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영화 첫 장면은 바에서의 장면이다. 이때 첫 숏은 바의 내부를 향한 시선 숏인데, 다음 숏에서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 아키코의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카메라는 180도씩 돌아가며 아키코의 시점 숏과 아키코를 바라보는 숏을 번갈아 등장시킨다. 마치 아키코와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카메라 렌즈를 경계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다. 이 렌즈라는 유리를 통해 아키코는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수도 있고(아키코를 바라보는 숏), 유리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아키코의 시점 숏), 그 둘은 하나의 세상으로 묶이지 못한다. 이러한 유리 이미지는, 히로시와 아키코가 일 문제로 다툰 뒤(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바 밖의 히로시와 바 안의 아키코를 유리를 경계로 그 안과 밖으로 함께 보여주는 데서 다시 한 번 이루어진다. 

 

  결국 아키코는 일을 하기 위해 택시에 오르고 여기서도 유리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쓰인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아키코를 택시 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살피지만 그 둘의 세계 역시 분리되어 있는지 택시 기사는 차마 아키코에게 속내를 묻지 못한다. 아키코는 유리를 통해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은 아키코의 모습을 반사시키는 동시에 창밖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그 두 세상을 결코 이어주지는 못한다. 나아가 도쿄 역 앞을 뱅뱅 돌면서 그녀는 창밖으로 할머니의 모습을 내다 보면서도 자신의 직업 때문에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차마 할머니에게 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파우치에서 손거울을 꺼내, 할머니에게 다가설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유가 된 자신의 직업에 맞게 외모를 꾸민다. 

 

  이처럼 영화는 지속적으로 유리를 경계로 사람 사이를 가둠으로써 현대인들이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설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려 한다. 그들은 유리를 통해 외부를 바라보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그 유리를 통해 다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부끄러움이라도 느낀 양, 계속 그 유리 안의 영역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이는 와타나베의 모습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와타나베는 콜걸인 아키코를 부르고선, 택시 기사로 하여금 그녀를 깨워 올려보내라 하고는, 먼저 집으로 부랴부랴 올라가서 유리창 너머로 그녀를 빼꼼 내다본다. 마치 자기 집 바깥의 영역에서는 그녀를 대면할 수 없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이때 그의 전화가 계속 울리지만 그는 그에 대답하기조차 귀찮다. 지속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전화의 경우도 이미 아키코의 경우에서 등장한 바 있는 요소이다. 직접적인 대화가 아닌 전화기를 통한 간접적인 대화, 이조차도 이미 꺼려하기 시작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키코가 집 안에 들어서고, 와타나베가 간신히 전화를 끊고 나서야 비로소 둘의 대화가 시작된다. 가장 내밀하고 안전한 공간, 그 어떤 위험 요소도 모두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공간, 그러한 공간에서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두 사람이 만난다면 어쩌면 어떠한 불순물도 없는 상태에서 온전한 소통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와타나베는 그렇게 믿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도 둘의 대화 양상은 어딘가 이상하다. 아키코는 두 사람 본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와타나베의 집 안에 걸린 여인 그림, 와타나베의 딸 혹은 아내로 추정되는 여인들의 사진이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확인받으려 한다. 또한 와타나베조차도 미리 알아낸 아키코의 고향 특산물 새우로 만든 스프와 와인이라는 조금은 구차한 도구들을 미리 진열해 놓고서야 아키코와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그들은 굳이 유리 안의 내밀한 영역에서 서로를 마주하면서 또 다시 새로운 가면, 새로운 유리를 덧대지 않고서는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아키코가 먼저 침실로 들어가서 자려고 하자 뒤늦게 와타나베가 거실에서 침실로 향할 때 전신 거울이 등장하는 숏에서 한 번, 그리고 와타나베가 침실로 들어서서 나가서 음식과 와인을 먹자고 아키코에게 말할 때 와타나베 옆에 있는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아키코를 비쳐 보이게 함으로써 둘을 한 프레임 안에 간접적으로 담아내는 숏에서 또 한 번 강조되고 있다. 결국 아키코가 잠들어 버림으로써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서는 데 실패한다.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차 안에 있다. 집에 이어 이번에는 차, 또 다시 유리 내부의 공간에 공존함으로써 와타나베는 다시 한 번 소통을 도모해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숏 구성을 보면, 차 앞 유리 바깥에서 유리 너머로 두 인물을 바라본다든가, 각각 인물들을 분리된 숏에서 잡는다든가(또 다시 카메라가 그들을 가로막는다.), 와타나베로 하여금 미러를 통해 아키코를 바라보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또 다시 그들 사이의 새로운 유리, 새로운 경계로 인해 그들이 소통에 실패하는 양상을 그려낸다. 

 

  와타나베는 아키코가 시험을 보고 돌아오면, 그 뒤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노리아키의 등장으로 인해 그들은 앞 좌석과 뒷 좌석, 정말 미러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거리로 밀려나는 동시에 각자 할아버지와 손녀라는 새로운 가면을 뒤집어 쓰기에 이른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오히려 아키코의 콜걸 광고 사진, 와타나베의 옛 제자 등 오히려 그들 자신에 더 가까울 수 있는 정보들에 도리어 겁을 먹으며 그것들을 멀리 하려 하기까지 한다. '진짜' 소통을 위해 '진짜' 자신보다 '가짜' 자신에 더욱 가까워야 하는 이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를 거치기만 한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인가?

 

  (스포일러)

 

  그러나 일은 결국 틀어지고 만다. 와타나베와 아키코는 다시 부랴부랴 와타나베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이때 그들은 각각 1층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이 할머니 역시 창 너머로만 와타나베를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상처를 치료해주고 걱정해주며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노인과 젊은 여성, 나이 차이는 나지만 그들은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서로에게 점점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의 순간도 결국 노리아키가 다시 나타남으로 인해 깨지고 만다. 문을 박살낼 듯 두드리던 그는 이내 다시 달려 내려가 와타나베의 차 유리를 부수더니 돌을 던져 와타나베의 집 유리를 부수는데, 창을 통해 지켜보던 와타나베가 바로 그 돌에 맞아 쓰러지면서 영화는 끝나고 만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유리를 경계로 둔 채, 그 안에만 머물며 그 바깥과 온전한 소통을 하려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가장 내밀한 집과 차라는 영역으로 상대를 초대할 수만 있다면, 굳이 자신이 그밖으로 나서지 못하더라도 소통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 인물이었다. 바깥과의 소통을 가로막던 바로 그 유리가 오히려 그 내부인들 간의 소통에 있어서는 외부의 방해 요소들을 차단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소통을 두려워 할 때 그는 그런 식으로라도 소통을 하고자 하는 순수한 인물이었다. 이를 보여주듯, 아키코를 처음 집 안으로 부를 때 그는 건물 문과 집 문을 조금씩 열어두고 차 안에서 아키코를 기다릴 때도 그는 차 유리를 다 닫지 않은 채 그녀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와 아키코는 그 안에서 다시금 유리를 세우면서까지 서로와의 소통을 두려워 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오히려 그 빈틈으로 외부의 위협인 노리아키가 등장한 셈이다. 노리아키는 아키코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폭력적인 성향의 인물로, 소통을 갈구하던 이들이 종종 깊은 수준의 소통이라 착각하며 타인을 자신의 소유물로 잠식하려 드는 꼴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즉, 간신히 문을 열고 유리 안의 공간으로 타인을 들인 이가 정도를 지키지 못하고 고꾸라져 버린다면 그는 바로 노리아키 같은 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노리아키는 차 유리를 내리라 하고 불을 빌리며 등장하더니, 이내 차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다. 와타나베는 바로 이러한 변수 때문에 유리 내부의 공간으로 외부의 인물을 불러 들인 뒤에야 소통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인물인데 노리아키가 그 불안을 제대로 헤집어 놓은 셈이다. 마침내 와타나베가 소통을 시도했던 차와 집, 유리로 둘러싸인 두 공간의 유리를 노리아키가 차례차례 박살내기 시작하자, 이는 곧 와타나베라는 존재 자체의 붕괴와 동일시된다. 소통의 희망을 바라본 바로 그 지점에서 소통하고자 하는 희망 뿐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소통을 포기하면서까지 쌓아두었던 최소한의 방어선까지 무너지고 결국 존재 자체가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 

 

  말, 소문, 집착, 오해, 다툼, 상처 등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은 종종 한 개인의 인성 자체를 잠식시키기도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유리를 세워 우리를 감싸고 그 밖을 바라보지만 결코 가까이 다가서지는 않는 수준에 머물곤 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서로를 경계하던 이들 중 누군가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문을 열고 유리 안으로 상대를 불러내 차근차근 소통을 시도하다 결국엔 내적인 원인(결국 또 다시 내부의 유리를 세우고 만다.)과 외적인 원인(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로 개인의 존재가 잠식되어 가는 문제)을 맞닥뜨리고 우려했던 실패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림으로써, 현대인들이 소통에 대해 느끼는 바로 그 공포의 핵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기존 작품들에 비해 어쩌면 구조적 실험이나 그 야심은 덜할지 모르지만, 이 영화에서 다루는 문제는 그가 여태껏 보여 온 실험들에 비해 훨씬 일상에 가까운 문제이기에 영화가 주는 울림만큼은 결코 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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