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

2013.09.24 14:46

menaceT 조회 수: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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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은 조용한 와중에 날카로운 시선과 놀라운 에너지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깐느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도연이나 송강호가 전달하는 연기의 에너지도 물론 대단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가 선사하는 놀라움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창동 감독이 이야기를 휘두르는 둔중하면서도 예리한 공력에 있다. 아직도 남성성이 만연해 있는 세상 아래 남성에의 종속성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간신히 버텨오던 위태로운 여성이 남성의 부재로 인해 좌절하고 그 좌절의 끝에서 비로소 홀로 서는 방법을 배워 가는 실존의 문제를 종교와의 접점 하에 다루는 그 놀라운 통찰력(영화 후반 ‘밀양은 어떤 곳이냐’는 두 번째 질문에 ‘밀양도 다른 곳과 똑같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다.’고 답하는 종찬의 말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이야기를 밀양이라는 공간 안에서 효과적으로 끌어내면서 동시에 이 공간 내에서 일궈낸 이야기를 보편적인 수준으로 확장하려 한다.), 화려한 수사 없이 ‘밀양’이라는 한국적 공간의 공간성 안에 이야기를 녹여내는 솜씨나, 끝내 희망의 한 줄기를 보는 엔딩 부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따스한 시선 등은 왜 이창동이 현 시대의 거장인지를 말해준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과 함께 밀양에 내려온 주인공 신애,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밀양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밀양에 정착해 가는 과정에는 무언가 특이한 지점이 있다.

  그녀는 밀양의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굳이 남들이 구체적으로 묻기도 전에 자신의 남편의 고향이 밀양이었음을 언급하며, 밀양에 내려와 살고자 했던 남편의 꿈을, 그리고 아들인 준을 위해 밀양에 온 것임을 밝히곤 한다. 그녀에게 밀양은 곧 그녀 주변의 ‘남성’들과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이는 자신을 찾아온 남동생에게 신애가 ‘밀양에서의 새 출발’ 운운하는 대화 장면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녀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부러 코 고는 소리를 내는 아들 준을 혼내고 방에 들여 보낸다. 이때 남동생이 그녀의 남편의 외도 사실을 들먹이자 신애는 그것이 오해라며 자신의 남편은 아들과 그녀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애써 남편을 두둔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동생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어머니는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을 방문한 ‘남동생’, ‘남편’을 모방하는 ‘아들’, ‘남편’을 비난하는 ‘남동생’과 그 앞에서 남편을 애써 두둔하는 자기 자신, ‘아버지’의 언급과 어머니의 부재, 밀양에 내려온 신애에게 있어서는 서울의 흔적조차도 남성들과의 끈으로만 남아 있다.

  신애가 밀양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은 어떠한가? 그녀는 밀양에 처음 들어오는 길에 지나가던 남성 운전수의 도움을 받아 남자인 종찬과 연락을 하고, 그 뒤 종찬의 차를 타고 밀양에 들어선다. 또한 그녀가 (적어도 영화의 영역 안에서) 밀양의 여성과 조우하기 전 밀양에서 처음 목도하는 장면은 종찬을 비롯한 남성들이 다방 레지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마치 신고식을 거치듯 밀양의 ‘남성’들을 거침으로써 밀양에 들어선다.

  신애가 밀양에서 취하는 삶의 방식도 남성성 아래 종속되어 있다. 그녀는 껍데기에 집착하는 종찬을 ‘속물’이라 비웃으면서도 그의 생활 방식을 취해 종찬 그 이상의 위선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녀는 종찬이 가짜 상장을 걸어둔 데 불만을 표하고서도 굳이 그것을 떼지 않으며(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남동생에게까지 그 상장이 실제로 자신이 받은 상장인 양 말한다.), 돈이 있는 체 하려고 남성인 웅변 학원 원장에게 좋은 땅을 아냐고 묻는가 하면 종찬이 소개해 주는 남성 인맥(부동산 중개업자, 모 회장님)에게서 땅을 소개받는 등 남성들과의 연 하에서 밀양을 대표하는 한 남성의 삶의 방식을 모방해 간다. 

  이처럼 신애는 밀양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남성’들과의 관계 하에서 규정짓는데, 그러면서도 남성들의 공간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두려워한다. 그녀가 밀양에 처음 들어서서 종찬과 다른 남성들이 다방 레지를 희롱하는 것을 볼 때, 그녀는 그 희롱이 벌어지는 남성들의 공간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그 공간 바깥에서 떡을 건네고 자리를 피한다.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그녀가 옷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가 여자 주인에게 떡을 건네고 가게 인테리어에 대해 조언까지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가 남성의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더 명확해진다. 그녀가 종찬의 소개를 받고 모 회장님을 찾아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도, 연주를 망친 그녀는 종찬의 나이를 두고 회장과 종찬이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 동안 감히 그 남성들을 돌아보지 못한다. 

  대신 그녀는 그런 남성들과의 관계, 혹은 남성들의 언어를 빌어 여성들 앞에서 스스로를 치장함으로써 밀양의 여성 그룹 안에 포섭되기를 희망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밀양의 여성들에게 자신을 처음 소개하는 데 있어서도 자신의 남편과 아들의 관계를 빌어 자신을 소개하는가 하면, 웅변대회 뒷풀이 장면에서 볼 수 있듯 밀양의 남성들과의 관계나 비록 남편은 없지만 그녀 자신이 능력 있는 가장임을 드러내고자 돈으로 자신을 뽐내는 남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어필하려 한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것이 자신이 밀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듯하다. 신애는 바로 아침에 미용실에서 여성 그룹 내에서 자신이 놀림거리가 된 것을 확인했으면서도(영화는 두 개의 거울을 통해 신애와 동네 여성 그룹을 부러 분리시키고 있다.) 그 날 저녁에는 그녀들과 신나게 술을 마시고 아들과의 통화 뒤에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녀들의 무리 안에 주저 없이 뛰어들면서까지 그녀들의 무리에 끼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른 여성들이 모두 택시를 타고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그 그룹에 완전히 포섭되지 못하는 상태이며, 이는 곧 아들의 유괴와 죽음이라는 엄청난 좌절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들 준의 유괴와 죽음을 영화가 그려내는 방식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우선 영화 내에서 준이 죽음을 가장하는 장면, 준이 유괴를 가장하는 장면이 미리 등장한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 영화의 첫 쇼트는 햇살이 비치는 맑은 하늘의 모습인데, 다음 쇼트에서 이를 준이 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곧 엄마인 신애가 등장하는데, 신애를 보자 준은 갑자기 자는 척을 한다. 신애가 차 밖으로 준을 끌어내자 이번에는 준이 볕이 내리쬐는 자리에 드러누워 죽은 체 한다. 한 편, 영화 초반부에는 준이 집 안에 숨어 (마치 유괴라도 당한 것처럼) 신애를 곯리는 장면 또한 등장하는데, 이 장면의 배경 역시 낮인지라 집안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영화 내에서 신애는 ‘밀양’이라는 지명의 뜻이 ‘비밀의 햇볕’이라 언급하고, 영화 중반부에는 약사가 신애에게 햇볕 한 조각에도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 햇볕 혹은 빛은 주로 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준이 죽음을 가장하는 장면, 준이 유괴를 가장하는 장면 모두를 그 신은 빛으로 존재하며 지켜본 셈이라고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실제 준의 유괴, 죽음을 신애가 목도하는 장면은 위의 두 가장 장면과 유사하게 연출되어 있으며, 그 두 장면에서도 신은 빛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다. 마치 신 자신이 이를 계획했다는 듯이 말이다(준이 유괴를 가장하는 장면이 하필이면 약사 앞에서 신애가 자신이 신을 믿지 않음을, 그리고 자신은 불행하지 않음을 자신 있게 말한 바로 그 다음에 이어졌음을 떠올려 보자.).

  신애가 준의 유괴를 알게 되는 장면에서, 신애는 이전에 준이 유괴를 가장하는 장면에서 그런 것처럼 집 안 곳곳을 준의 이름을 부르며 살펴본다. 가장 장면에서는 배경이 낮이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비록 배경은 밤이지만 신애가 직접 이 방 저 방의 형광등을 켜 가며 아들을 찾는다. 후에 신애의 자살 시도 장면에서도 더 명확히 드러나지만, 이 형광등 불빛 역시 신의 은유이다. 그리고 이때 걸려온 유괴범의 전화, 하지만 영화는 유괴범의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비록 후에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 목소리를 굳이 숨김으로써 영화는 그 전화기 너머의 위치에 범인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빛으로 임하며 보고 계획했을지 모르는 신의 존재까지도 은유적으로나마 위치시킬 수 있게 된다(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도, 이 영화에 실질적으로 그 자식의 존재가 드러나는 아버지가 오직 범인인 웅변 학원 원장 뿐이라는 점에서, 그 범인과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는 겹친다.). 신애가 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는 장면의 경우 역시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영화 맨 첫 장면, 준이 죽음을 가장하는 장면과 닮아 있다. 파란 하늘 쇼트 뒤에 이번에는 신애가 차 안에서 그 하늘을 바라보는 쇼트가 이어진다. 경찰들의 인도에 따라 차 밖으로 나선 신애는 첫 장면에서처럼 볕 아래 누워 있는 준의 시신을 목격하게 된다. 준의 실제 유괴, 죽음이 영화 내에서 드러나는 방식이 준의 유괴, 죽음 가장 장면과 닮아있다는 것은, 즉, 거짓으로 가장되었던 유괴와 죽음이 실제 유괴와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신이 그간 신애가 거짓으로 그리고 남성들과의 관계로 껍데기를 부풀리며 밀양의 사람들 사이로 포섭되려 했던 삶의 방식을 비웃으며 이를 모두 계획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실제로 준의 유괴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장면들 대부분이 남성들과의 관계 하에서 껍데기를 부풀려 가며 밀양 안에 정착하려 했던 신애의 시도를 비웃는 듯한 장면들이다. 그녀는 유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종찬을 찾아가지만, 마치 자신이 포섭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그 여성 무리처럼 노래방 기계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종찬의 모습을 보고는 그대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된다. 돈을 인출해 약속된 장소에 가져다 놓는 과정에 있어서는 신애 자신을 바라보는 택시 기사들(이들은 모두 남성이다.)의 시선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경찰들조차도 수사를 하는 듯 하면서 종찬과 부동산 중개업자를 앞에 앉혀두고 중국집 주문 이야기나 떠드는 작태를 보여주어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다. 이처럼 밀양 내의 남성들은 결정적 순간에 그녀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오히려 범인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신애가 자신의 피아노 학원 앞에 웅변 학원 원장의 딸이 서성이는 것을 보고 하게 된 신고로, 순수하게 여성들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녀는 가짜 돈을 손수 준비해 돈의 양을 부풀리려다 이를 포기한 뒤에, 마치 신 앞에 고백하듯 자신이 돈이 많은 척 하기 위해 땅 계약 운운한 것이라며 유괴범 앞에 구구절절이 읊어대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괴범은 자신이 준을 유괴했다며 마치 돈을 받으면 돌려줄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절대 준의 목소리를 신애에게 들려주지 않는데, 이 역시도 가짜 상장, 가짜 땅 계약 등 신애가 밀양 내에서 취했던 삶의 방식과 같아 더더욱 신애의 그간의 생활을 비웃는 듯 보인다. 

  위와 같은 요소들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준의 죽음은 신애에게 있어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아들의 죽음이라는 그 자체로 충격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간 자신이 보여온 행위들이 그런 사건의 원흉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다가오는 그런 사건이다. 이로 인해 신애는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이제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신이 찾아온다. 

  사실 신이 처음으로 신애에게 다가가는 것은 준이 아직 죽기 전, 신애가 준과 함께 떡을 돌린 뒤 약사와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이다. 신의 사랑을 말하며 신의 말씀을 담은 책을 건네는 약사에게 신애는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고는, 아들이 안 보인다며 아들을 찾으러 가야겠다고 약국을 나선다. 이 장면 바로 뒤에 준이 유괴를 가장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뒤엔 불행하지 않다는 신애의 말을 손수 깨부수려는 듯, 그 뒤에 아들의 죽음이 서서히 찾아온다. 신이 두 번째로 다가가는 장면은 준의 죽음 이후 신애의 집에 약사가 찾아가는 장면이지만 이때 약사는 신애와 만나지 못한다. 세 번째는 신애가 생리통 때문에 약국을 찾는 장면인데, 생리통은 아들을 잃은 신애의 고통과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다. 신이 첫 번째로 접근한 장면에서 신애가 아들 핑계로 그 장소를 박차고 나간 뒤 준의 유괴 가장이 이어지고, 마치 이를 신이 다 보고 있었다는 듯 이를 빼다 박은 준의 실제 유괴와 죽음이 이어진 뒤에, 신과 신애가 만나는 장면에는 줄곧 ‘준의 부재’를 건드리는 사건들이 존재한다. 생리통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때 약사는 신애에게 생리통보다 더할 마음의 고통은 신을 통해서만 치유할 수 있다며, 햇볕 한 조각에도 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신애가 그 말을 비웃자, 약사는 '그래도 모든 일은 다 신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그 말마따나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면 준의 죽음 역시 그러할 것이고, 영화가 신의 계획과 의도성을 드러내기 위해 준의 유괴와 죽음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그려냈음이 한층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신의 네 번째 접근은, 신애가 준의 사망 신고를 하러 나서는 날 일어난다. 신애는 준의 사망 신고 과정에서 자신이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함을 알게 된다. 준의 사망 이후 스스로의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있는 탓이리라. 그러한 사실에 극도의 혼란을 겪는 그녀 앞에 약사가 언급한 바 있는 부흥회의 플랑이 보인다. 그리고 신애는 그 부흥회 장소에 들어선다. 준의 부재를 틈탄 네 번의 접근 끝에 비로소 신애가 신의 품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화는 부흥회 장면에서 신자들의 면면을 보여주고는, 예배당 안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쇼트를 제시하며 그 쇼트 하에서 신애의 오열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먼저 들려준 뒤 한 박자 늦게 신애의 모습(그녀는 오열하다 목사의 손길이 와 닿자 잠잠해진다.)을 화면으로 보여준다. 이는 신애가 그 신자들의 무리 안에 섞여 들어감을 보여주는 장치이다(이후 용서 사건 이후 신애가 김추자의 노래를 야외 부흥회에서 트는 장면에선, 똑같이 신자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쇼트들이 이어지다 이를 신애가 외부에서 관조하는 쇼트가 이어져, 이 장면과의 차별을 보여준다.). 그 이후의 기도 모임 장면에서 이는 더 명확해진다. 놀랍게도 신앙의 힘을 빌어 그녀는 그 전까지 요원해 보이던 밀양의 주민 사회 내의 편입을 이뤄낸 것이다. 그녀는 이제 내부자의 입장에 서서 신앙이 분명해 보이지 않는 종찬을 나무라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나 신애의 그러한 지역 사회 편입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그녀가 아직 준의 환영을 온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녀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신은 주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남성형으로 불리는 신이다. 또한 신애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밀양의 주민들은 신의 대리자인 목사, 늘 그녀 옆을 지키는 종찬, 약사의 남편으로 그 존재가 규정되는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이며, 신애와 그 여성들 간의 소통 방식은 신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한정되어 있다. 즉, 그녀가 밀양의 주민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여전히 (더 상위 계층에 존재하는) 남성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여성 그룹 내에 정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따라서 그녀는 여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우뚝 서서 타인들과 소통하는 대신 남성성에 종속된 여성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불안감은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과의 면회 장면에서 결국 터져 버리고 만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기도 전에 신이 그를 먼저 용서했다는 사실은 신애에게 있어 밀양의 남성들이 아들이 유괴된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 이상의 배신감을 가져다 주는 사건이다. 자신의 아들의 유괴와 죽음마저 계획하면서까지 자신을 품으려 했던 신은 왜 다시 그녀를 배신하는가? 신애의 세계는 그 앞에서 다시 한 번 무너지고 만다. 그 뒤 신애는 교회당에서 난동을 부리고, 부흥회에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고(이는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신애 자신의 삶을 조소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장로를 성적으로 유혹하고, 기도 모임 장소에 돌을 던지는 등 신에게 대항하는 행동들을 하지만, 그녀는 마치 튼튼한 유리에 단지 금만 내고 떨어져버린 돌덩이처럼 연약하다. 그러한 행위들로 그녀가 남성성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획득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딸마냥 여전히 신에게 묶인 채로 그에게 반항할 따름이다. 결국 그녀는 거듭되는 패배를 견디지 못하고 집 안에 불을 잔뜩 켜둔 채 신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지만, 역시나 그 시도도 ‘살려주세요’라는 무력한 한 마디로 끝맺음될 뿐이다.

  이때까지 그녀의 옆을 지키는 것이 바로 작품 안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종찬이다. 그는 영화 초반만 해도 신애에게 있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자. 신애가 ‘붙었다 붙었다’고 장난치며 준을 꼭 끌어안는데 준이 그런 신애를 밀어낸다. 준이 신애를 완전히 밀어낸 그 순간에 차 소리가 들리고, 다음 쇼트에서 종찬이 처음 등장한다. 즉, 종찬은 신애와 준의 틈 사이로 등장한, 어딘가 방해가 되는 듯한 인물이다. 다른 남성들과 레지를 희롱하는 장면에서는 그 역시 레지의 팬티를 봤네 안 봤네 운운하는 변태이며, 어디를 가든 늘 힘 좀 있다 하는 남성들과의 통화를 끊임없이 해 대는 속물이기도 하다. 종찬이 신애의 피아노 학원에 가짜 상장을 걸어주는 장면에서도, 종찬은 드릴의 소음, 떠들썩한 통화 소음으로 대변되는, 신애에게 영 거슬리는 존재이다. 신애는 자신을 '신애 씨'라 부르는 종찬을 두고 ‘언제 봤다고 신애 씨야’라고 동생에게 속삭이는가 하면 대놓고 종찬을 ‘속물’이라 말하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신애의 남동생 역시 종찬은 신애의 타입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런데 종찬이 신애의 남동생에게 한 소리 듣는 그 장면에서, 영화는 의미심장한 연출을 보인다. 신애의 밀양 이전의 과거(아마도 그 과거는 신애의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남성성에 종속된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를 대변하는 남성인 남동생과 마주하고 있던 종찬이 시선을 돌린 그 자리에는, 신애의 밀양에서의 (그 장면의 시점 상에서의) 미래를 대변하는 남성인 신의 존재가 전도단의 모습을 하고 자리해 있다. 과거의 남성, 미래의 남성, 그 양쪽 모두가 신애를 남성성으로 구속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이에 위치한 또 다른 남성, 종찬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영화는 그 장면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인다.

  유괴가 막 일어난 시점에서까지도 종찬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지만(신애는 유괴를 알고 종찬을 찾아가나 종찬은 노래를 부르고 있고 신애는 발걸음을 돌린다.), 준의 죽음 이후 종찬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신애가 잡혀 온 범인의 모습을 보는 장면에서, 신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반면 종찬이 그녀를 대신해 범인에게 호통을 친다(공교롭게도 그 장면에서 신애와 종찬은 같은 색의 웃옷을 입고 있다.). 준을 화장하는 장면에서도 그는 신애에게 윽박지르는 신애의 시어머니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나선다. 오히려 신애의 가족들에게 욕을 먹은 그가 쪼그려 앉아 담배를 무는데, 그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자 어느새 신애도 종찬처럼 쪼그려 앉아 있다. 그런 그녀에게 종찬이 다가선다. 어쩌면 이때부터 영화는 종찬이 신애에게 진정으로 다가설 수 있는 존재라는 암시를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애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뒤로는, 종찬 역시 레지를 희롱하는 대신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향하고(영화 초반에 카센터 내부에 둘러앉은 남성들 사이에 끼어 종찬 역시 레지를 희롱할 때 신애와 그의 세계는 카센터 내부와 외부의 세계로 갈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종찬은 그 카센터 내부에 남성들 무리가 둘러앉은 데 끼지 않고 성경책을 든 채 카센터 밖으로 나와 신애가 있는, 여성들이 둘러앉아 있는 공간 안으로 자진해 들어선다.), 돈 있고 권력 있는 남성들과 통화하는 대신 신애나 자신의 어머니 등 주로 여성들과 통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주차를 잘못했다고 예전에는 알랑방귀를 뀌었을 사람에게 한 소리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는 신애가 면회 이후 기절하자 그녀의 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간호해 주는데, 이때 그는 잠든 신애에게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서다 물러선다. 이처럼 그는 (신을 비롯한) 다른 남성들처럼 그녀가 남성성에 종속되도록 하는 존재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녀의 곁에 머물며 지켜보고 오히려 스스로를 남성들의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신애에게 더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다(신애가 범인에게 다시 전화가 오는 환상에 시달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신애는 준의 유괴 당시와 같은 대사를 전화통에 대고 읊어대더니 종찬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한다. 이전에 준이 유괴당했을 때에는 종찬에게 차마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자세이다. 그만큼 종찬이란 인물이 신애에게 가지는 의미가 달라지고 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심지어 신애가 자신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순간에조차 자신의 진심이 신애에게 가 닿지 못한다는 데 분노하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그는 극중에서 총 두 번 ‘밀양은 어떤 곳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한다. 이 두 번의 문답에서 드러나듯 그는 사실상 ‘밀양’이라는 공간 그 자체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영화 초반 신애와의 첫 문답 이후 그는 신애가 '밀양의 뜻을 아느냐'고 묻자, '어디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거'라 대답한다. 한 편, 영화 후반 신애의 남동생과의 두 번째 문답 이후에는 신애의 남동생이 차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 '교회 다니냐'고 묻자, '처음에는 신애 씨 때문에 다녔는데 지금은 습관이 돼서 그냥 다닌다'고 말한다. 전자의 경우, 종찬은 신애가 앞으로 향하게 될 그 궤적에 '그냥 사는' 존재이고, 후자의 경우, 종찬은 신애가 거쳐온 그 궤적에 '습관처럼 머무는' 존재이다. 그는 현재의 신애 곁에 머물며 동시에 신애의 미래와 과거의 궤적에 '그냥 서 있는', 그리고 그 자리에서 현재를 비추는 또 하나의 '비밀의 햇볕', '밀양'이다. 신이 천상으로부터 밀양을 내리쬐는 ‘비밀의 햇볕’으로 존재하며 계속 신애를 남성성의 굴레 안에 가두려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신의 사랑의 방식이라면, 종찬은 ‘밀양’이라는 공간 위에 발 붙이고 서서 또 하나의 ‘비밀의 햇볕’으로 신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비추며 그녀를 그녀의 존재 자체로 긍정하려 하고, 그것이 바로 종찬의 사랑의 방식이다.

  한 편 영화의 마지막 부분,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미용실로 향할 때, 그녀의 머리를 잘라주러 공교롭게도 범인의 딸이 재등장한다. 그 소녀가 첫 등장한 장면을 상기해 보자. 웅변 학원 원장이 그녀를 억지로 차에 태우자, 신애가 그녀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이때 카메라는 신애와 준을 한 프레임에, 소녀와 운전석에 앉은 원장의 뒤통수를 한 프레임에 담는 식으로 양쪽을 오가며 대화 장면을 진행한다. 두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 두 명의 남성은 곧 한 쪽은 죽어서 또 한 쪽은 옥에 갇혀서 사라지고 두 명의 여성만이 남을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 자연스레 신애와 그 소녀 사이의 묘한 연결 고리가 생기게 된다. 그 뒤 준이 유괴된 뒤, 신애가 피아노 학원 안을 들여다 보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를 발견할 때 그 연결 고리는 더욱 강해진다. 

  준의 죽음을 확인하고 신애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후, 두 여자는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신애가 다른 아이를 준으로 착각하는 환상을 겪은 뒤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과정에서, 그녀는 우연히 또래 남자 아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소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각자 연결되어 있던 남성을 잃은, 그리고 또 다른 남성들에게 종속된 두 여성(신애는 신에게 종속되어 다시금 유린당한 예정인 상태이고, 소녀는 또래 남자들에게 종속된 채 무기력하게 맞고만 있다.)은 눈이 마주치지만 신애는 소녀를 외면하고 차를 몰다 사고를 낼 뻔 해 부부(남성과 여성)에게 ‘사람 죽이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라며 욕을 먹는다. 신애의 아들은 소녀의 아버지로 인해 죽었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비록 근본적 원인은 다른 데 있다지만) 신애의 신고로 인해 옥에 갇혀 사실상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부부가 신애에게 욕을 하는 장면은 신애와 소녀 모두에게 남성성이 부재해 있는 상황을 상기시킨다. 신애는 부부 중 남자를 칠 뻔했고, 이에 대해 그 아내가 더욱 발끈하는 것을 보라.). 그리고 그 여파로 신애의 인생 못지 않게 소녀의 인생 역시 망가졌다. 마침 신애는 아들의 환영을 본 직후에 그 소녀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의 빈 자리를 다시 한 번 느낄 때 그 빈 자리에 불쑥 나타난 범인의 '딸', 어쩌면 이는 영화가 남성성의 부재 위로 새로이 여성들 간의 유사 가족이 형성되어 서로를 위로할 수도 있음을 말하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신애는 차마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 못한 채 차를 돌리고, 영화의 이러한 신호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스러진다. 아마 신애가 그녀의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분명히 맘 먹은 것은 그 소녀를 목도하고 무언가 바꾸어 보려 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이 시도는 더욱 참담한 결과로 이어진다.  

  미용실에서 다시 재회한 두 여자는 각자 한 번씩 밑바닥을 친 뒤이다. 신애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갓 정신병원에서 나온 상태이고, 소녀는 학교를 때려치우고 소년원에 들어갔다가 미용 기술을 배우고 나와 취직한 상태이다. 카메라는 하나의 거울 안에 신애, (그녀의 왼편으로) 종찬, (그녀의 오른편으로) 소녀를 한꺼번에 담아낸다. 영화 초반부 미용실 장면에서 신애와 여성 그룹을 두 개의 거울로 분리시켜 두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 세 인물을 하나의 고리 안에 묶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 쪽은 신애를 남성성 안에 굴복시키려는 대신 그저 지켜보는 남자,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남성성에의 종속 하에서 끝없이 추락해 온 지난 날의 신애와 너무 닮아 있는, '아들'의 빈 자리로 들어선 '딸'로도 볼 수 있는 소녀이다(하필 신애가 이 소녀를 거울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애는 이발이 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 째로, 이는 아직도 신애가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범인의 딸을 품어, '어머니'와 '딸'로서 남성성이 부재한 자리에 여성성으로만 존재하는 새로운 유대 관계를 형성할 만큼 내적으로 단단히 여물지는 못한 상태임을 상징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가 우선 자신의 과거를 닮은 그 소녀를 적어도 해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단지 그 자리를 뜸으로써 우선 자기 스스로 서기 위해 자신의 과거와 연을 끊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위이기도 하다. 미용실을 나온 그녀는 자신을 다시 한 번 굴레에 가두려는 신에게 이제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하늘을 강하게 노려본다(그리고 종찬이 이 시선을 공유한다.). 그 뒤 신애는 옷 가게 주인과 재회하는데 그녀는 신애의 조언대로 인테리어를 바꾸었더니 손님이 늘었다며 신애를 반긴다. 이는 어쩌면 과장된 껍데기나 종교의 힘을 빌지 않고도 그녀의 존재 그 자체로 다른 이들과의 소통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미약한 희망처럼 제시된다. 

  이제 집에 도착한 신애는 거울을 들고 스스로 머리를 마저 자르려 한다. 이때 뒤따라 온 종찬이 대신 거울을 들어준다. 거울에는 준의 사진이 스티커로 붙어 있다. 그리고 신애의 잘린 머리가 바람에 날려간 자리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아마도 신의 존재. 신애가 자신의 과거를 대변하는 소녀가 잘라주던 머리를 (종찬의 도움을 받아) 제 손으로 마저 자르는 행위에는 비로소 신애가 스스로의 존재 자체로 설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또한 범인의 딸이 이미 자른 그녀의 반쪽 머리는 그녀가 자신의 나머지 반쪽 머리를 스스로 자르고 스스로의 존재를 굳건히 세우고 난 뒤라면, 어쩌면 소녀와의 '어머니'와 '딸'로서의 여성성 하에서의 독립적인 연대가, 새로운 유사 가족의 형성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신호로 그 자리에 존재해 있다. 이를 그녀의 과거를 대변하는 남성인 아들 준이 바라보고 있고, 그녀의 현재를 대변하는 남성이지만 그녀를 종속시키지 않고 그녀의 존재 자체로 긍정하는 ‘비밀의 햇볕’ 같은 인물 종찬이 그녀의 홀로서기를 도우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며,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선 지점에서는 다시 또 다른 ‘비밀의 햇볕’인 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이렇게 세 명의 남성이 차마 그녀를 건드리거나 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지켜보는 와중에, 그녀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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