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루 재스민

2013.09.29 14:56

menaceT 조회 수: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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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Jasmine (2013)

 

9월 27일, 메가박스 신촌.

 

  이 영화를 두고 우디 앨런 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고 말하는 걸 더러 본 적이 있는데, 인물들을 이리저리 대입시켜 볼 수도 있을 정도로(재스민-블랑쉬, 진저-스텔라, 오기&칠리-(엄청나게순화된)스탠리, 드와이트-밋치) 이야기가 흡사하다.

 

  다만 '욕망...'에서는 스탠리가 중심 축 중 하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이 영화에서 남성들은 철저히 주변부에 머문다. 또한 재스민과 블랑쉬는, 그리고 진저와 스텔라는, 각자 그 아픔의 근원이 조금씩 차이가 있기에 일대일로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블랑쉬와 스텔라의 이야기가 조금 더 정석적인 비극에 어울린다면, 재스민과 진저의 이야기는 '그래도 여전히' 우디 앨런스럽다.

 

(스포일러)

 

  영화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재스민의 의식을 통해 플래시백의 형태로 과거 뉴욕의 이야기를 불러온다. 두 시간, 두 공간이 얽히는 와중에, 플래시백이 끝난 뒤에 재스민이 그 과거 뉴욕 시점의 혼잣말을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읊음으로써 두 영역은 하나의 덩어리로 혼재하게 된다. 재스민은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거짓과 허영으로 자신을 감싸며 자신의 존재 자체로도 과거를 지속적으로 호명하는 인물이다. 화려했던 과거와 비루한 현재,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재스민의 신경증, 이것이 이 작품의 첫 번째 아이러니이자 핵심이고, 나아가 이 영화의 냉소 섞인 유머도 주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재스민이 남편의 외도를 확인하고 직접 남편을 신고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자신이 영위하던 모든 부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녀는 남편에게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리란 두려움으로 그 모든 부를 포기한다. 재스민에게 과거는 사실상 '남편의 부'가 아닌 '남편의 사랑' 때문에 의미가 있었음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재스민은 '사랑' 때문에 그리워 하는 과거를 '부'의 논리로 호명하는 셈이며,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그리워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과거에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 과거의 회상은 재스민에게 어떠한 해답도 되지 못하며 그녀를 단지 궁지로만 몰 뿐이다. 이처럼 그녀 자신이 과거를 호명하면서도 자신이 바라던 바와 조금 어긋난 지점의 과거를 호명해 왔다는 점에서 그녀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한 편, 영화 속에서 재스민이 나누는 대화, 특히 진저와 나누는 대화 역시 조금은 독특한 양상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그들 자신을 곧이 곧대로 가리키기보다는 각자의 남성, 혹은 서로의 남성을 이야기함으로써 서로에게 이르는 방식이다. 그들의 가장 큰 갈등의 원인이 된 사건도 '진저의 남편'의 돈을 '재스민의 남편'이 챙긴 사건이며, 그 이후로도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의 남자를 욕하는 방식으로 대화한다. 영화는 분명 대부분 두 여성이 화면을 장악한 채로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남성은 철저히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내뱉는 이야기들에서는 그녀들이 부재하고 그녀들의 남성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데, 즉 시각적 영역과 청각적 영역에서의 영화 속 우열 관계가 서로 어긋난다는 데 이 작품의 세 번째 아이러니가 있다(이러한 시각적 영역과 청각적 영역 간의 불일치로 인한 아이러니는 극중 재스민의 불행한 상황이 경쾌한 음악과 겹쳐 등장하는 등의 연출로 더욱 증폭되기도 한다.).

 

  이 아이러니들의 바탕으로써, 영화는 재스민과 진저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연거푸 상기시키며, 그들이 타인의 사랑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 왔음을 드러내 보인다. 타인의 사랑에 그저 의존해 왔기에 그들은 진정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방식에 서툴다. 이것이 재스민의 경우, '부'와 '사랑' 중 자신이 진정 무얼 갈망하는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고, 때문에 드와이트와의 새 사랑을 꿈꾸면서도 그의 앞에서 '부'의 논리로 스스로를 치장하다 끝내 다시 한 번 '사랑'에 실패하는 결말을 맞게 되는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진저 역시 반복해서 '나는 입양되었고 양부모에게 재스민보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데서 보이듯 스스로 사랑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품은 채, 결국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하고 순간순간 자신에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애정을 퍼부어 줄 사람 사이를 떠돌며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진저는 한 남자의 곁에 머물며 그에게 종속되는 방식으로 나름의 미봉책을 찾지만 그녀의 문제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쩌면 더욱 극단적인 삶을 오가며 진저의 문제를 더욱 확장된 형태로 겪어낸 재스민의 경우, 이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하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드와이트에게서도, 과거와의 마지막 끈을 의미하는 양아들(그는 이미 과거를 지워내고 훌륭히 새 삶을 끌어가는 중이다. 그런 그에게 스스로 망친 과거에 천착하는 재스민은 그저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에게도 버림받은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미래로도 혹은 과거로도 갈 수가 없다. 이젠 더 이상의 플래시백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젖어 혼잣말을 읊어도, 영화는 그 자리에 플래시백의 형태로 과거를 되살려와 그녀를 돕는 대신 그녀에게 겁먹어 자리를 피하는 이의 모습과 넋빠진 재스민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다.

 

  한 동안 유럽을 돌며 낭만적인 풍광들을 보여주던 우디 앨런은, 이제 미국으로 돌아와선 미국의 두 지점을 연결하며 사랑이 무언지도 모른 채 과거에 묻혀 헤매이는 비극적 인물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우디 앨런의 근작 중 하나인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 펜더는 자신의 과거도 아닌 그보다도 오래된, 파리라는 공간의 과거에 천착하던 인물이지만, 아주 유쾌한 경험을 지나더니 자연스럽게 과거에서 빠져나와 미래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시작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인물들에게 미래는 여전히 닫혀 있는 듯 보인다. 유럽을 돌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앨런의 눈에 비친 미국은 이처럼 나아갈 곳 없는 닫힌 미래의 땅이었나보다. '블루 재스민' 속 미국은 예전 '애니 홀'과 '맨해튼' 속 미국과는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진다. 냉소 섞인 유머에 키득대며 보기 좋은 건 이번에도 딱 우디 앨런스럽다 싶지만, 과거와 현재,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겹쳐둔 구조, 다시 그 안에 겹쳐둔 여러 겹의 아이러니, 그 겹들 사이사이마다 배인 애수(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이를 더 효과적으로 구현해 낸다.)는 이 영화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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