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행유예 (1973)

2011.07.06 18:17

곽재식 조회 수:2960

1973년작 한국영화 "집행유예"는 시작하면 아무 소리도 특별한 장식도 없이 그저 어느 어두운 방을 보여 줍니다. 가만 보면 경찰이 취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취조 당하는 지 궁금해 집니다. 화면이 돌아가면 두 손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주인공 박노식이 있습니다. 사연을 보니 박노식은 재일교포고 무슨 중죄를 지어 잡힌 듯 합니다. 경찰이 이야기 하는 중에 "조센징"이라는 표현을 쓰자 박노식은 열받아서 엎어 버리려고 합니다. 이후 영화의 본론은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박노식이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즉 이 영화 내용은 일본인에게 한맺히고 심사 뒤틀린 재일교포 박노식이 배신 당하고 복수하느라 살인하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포스터)

일단 이 영화가 꽤 괜찮은 대목은, 줄거리가 선명하고 조촐하여 진행에 큰 무리가 없이 부드럽게 흘러 간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야기가 간단명료 합니다. 조금 자세히 말해 보면 이렇습니다. 박노식은 촉망 받는 재일교포 권투 선수로 어느 부유한 일본인의 딸 우연정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 입니다. 그런데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시합에서 심판이 이상해서 패배해 버립니다. 박노식은 실망해서 행패도 부리고 그러는데, 그러던 차에 약혼식날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도 들킵니다. 애인의 집안은 재일교포를 혐오하는 사람들이라 파혼 당하고 박노식은 일이 꼬여서 좌절스러운데 재일교포를 비웃는 그때 그 심판이 보이자 살해해 버립니다.

이게 영화의 초반부이고 영화의 중반, 후반은 감옥의 박노식이 옛 애인 우연정에게 조롱을 당하자 복수를 하겠다고 하고, 탈옥 하고, 위협을 하고, 침입하고, 납치하고, 난동 부리고, 자동차 추격전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우연정은 죽고 박노식은 두 눈을 다친 채로 다시 경찰에 잡혔다는 것입니다. 중간 중간에 박노식이 자기 어머니를 두고 불효자식 죄송합니다, 엉엉엉 뭐 이러는 신파조 장면도 좀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면, 보통의 "수사반장" 한 편은 무난히 될 법한 기승전결이 똑바른 이야기 입니다. 마구 터져 나오는 감정 표현과 기괴한 연출을 섞어 넣으면 "수사반장" 이야기로도 괜찮은 것을 만들어 낼 만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사연으로 이렇게 되었을까? - 장면 사진은 흑백 자료 밖에 없습니다만, 흑백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사람을 끄는 열정적인 연출과 감정 표현이 잘 되어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대신에 이 영화는 다른 면에서 재미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로 몇몇 자극적이고 기괴한 소재를 어울리게 잘 심어 놓아서 흥미를 끄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보면 70년대 일본의 소위 "완전성인용" 영화의 괴이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표현과 무척 비슷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주 그 방향으로 완전히 치우쳐져 있는 것만은 아니고 이것저것 시선 끌만한 내용들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적합한 부분에 합해 놓은 수준 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모노를 입은 여자 주인공의 손을 천정에 묶어 놓고 괴롭히는 것은 완연한 일본풍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주인공이 인질극을 벌일 때 코트 자락 안에 다이나마이트를 줄줄이 달아 놓고 드러내 보여주면서 협박을 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을 맡은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 "석양의 갱들"에서 따온 장면 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부" 1편 영화의 아주 유명한 이야기 거리를 그대로 따온 장면도 하나 있고(저 유명한 "말" 장면이 태연자약하게 "사슴"으로 살짝 변형되어 나옵니다.) 구식 닌자 영화에서 따온 장면도 보이고(잠입하다가 물 속에 잠수해서 숨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애초에 처음 시작할 때 감옥에 잡힌 살인범이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고전 느와르 영화에서 자주 쓰던 구조이고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그렇게 흥미를 끄는 이야기 거리를 심어 놓아서 단순한 이야기를 지켜 보게 만듭니다. 그 중에 기둥이 되는 것들은 박노식이 탈출을 하기 위해 병에 걸린 척 하려고 자해를 하면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는 장면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이야기라든가, 몰래 우연정을 납치하기 위한 방법으로 감옥 동료들을 모아 땅굴을 파서 우연정 집 화장실에 구멍을 뚫고 아무도 몰래 숨어드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특수효과나 세트가 충분히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무리 없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성의 있게 꽤 잘 되어 있는 편이었습니다.


(몰래 침입)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를 꾸미면 너무 단조롭고 긴장감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 뼈대는 대강 서 있고 가끔 눈을 붙잡아 둘만한 것이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만 해서는 영화 전체가 이어져 흐르는 주인공이 정말 살아서 행동하는 듯한 모양으로 보이지 않고 지겨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재치있는 대사들로 말을 장식하고 전율이 넘치는 극적인 상황 연출을 할 수 있도록 행동을 꾸며 넣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재치있게 한다고 고민한 것이 생각이 부족해서 어처구니 없게 과하게 나가서 어긋나고 그 바람에 헛웃음이 나오는 대목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박노식은 우연정의 집 화장실로 땅굴을 파고 침입했습니다. 박노식은 욕조 구석 커튼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 될 뻔한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는 형사들에게,

"저 화장실 좀 다녀올께요"

라고 합니다. 장모님은 일 보러 들어가고 박노식은 숨을 죽이고 숨어 그걸 봅니다. 들킬까 말까 조마조마 합니다. 그런데 장모님이 화장실 급해서 갔다 오는 걸 몰래 쳐다 본다는 내용과 겹쳐 있으니 좀 웃기기도 합니다. 장모님은 눈치 못채고 돌아갑니다. 한숨 돌렸습니다. 이렇게 한 고비 넘겼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더 긴장감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위기를 더 배치해야 될 겁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 영화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장모님이 돌아오자 우연정이,

"엄마, 나도..."

라고 수줍게 말하고 이번에는 우연정이 화장실에 가는 것입니다.

박노식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애증이 교차하는 배반한 애인을 드디어 눈앞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애인이 화장실 온 순간이라는 겁니다. 뭔가 기괴하고 역설적인 이야기 거리로 심각하게 연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노식이 우연정을 기절시켜 붙잡아 갈 때, 우연정이 순간적으로 "끙"하는 신음 소리를 냅니다! 바깥에서 듣던 형사들이 놀랍니다.

그러자 장모님이,

"우리 애는 화장실에서 일볼 때 저런 소리를 낸답니다."

라고 얼굴을 붉히며 말해서 다들 멋적게 웃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박노식은 우연정을 보고 싶었다고 울부짖으며 납치에 성공해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좀 엉뚱하게 멋있고 극적인 대사를 하다가 한 땀씩 어긋나서 해괴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대목들이 이 영화에는 꽤 많습니다. 가장 악명 높을 만한 것을 꼽자면, 우연정을 납치해서 박노식이 산 속 이곳저곳을 끌고다니다가 우연정이 스톡홀름 증후군 스럽게 다시 박노식에게 마음이 조금 돌아오는 듯 할 때 나누는 대사 입니다. 박노식은 귀엽고 우아한 부자집 따님 우연정을 얼마나 자신이 고귀하게 여겼는지, 자신이 정말로 얼마나 우연정을 사랑했는지 모른다고 강변 합니다. 우연정은 미쳐 돌아가는 와중이니 조금 마음이 흔들리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우연정은 거절한답시고 하는 말이,

"그래도 엽전은 싫어요."

입니다. 조선사람을 일컫는 속어로 쓰던 그 "엽전"이 이 분위기에 갑자기 튀어 나옵니다. 그 말을 듣자 분개한 박노식이 다짜고짜 우연정을 덥치면서 하는 대사는 더욱 가관 입니다. 박노식이 하는 말인즉,

"뭣이? 엽전! 좋다. 엽전의 쇳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보여주마!"

이런 건 "오스틴 파워즈" 같은 코미디 영화에서 악당이 웃긴 대사로 해야 마땅한 이야기 입니다. 극적인 말이고 재치 있다면 재치있는 대사기는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에는 한 맺힌 사나이의 광기어린 복수담이고 수십년 동안 쌓여 온 재일교포 차별에 대해 진중한 이야기를 한다고 틀을 짜 놓은 영화인데 이런 대사가 튀어 나와 버리니 도무지 괴상한 것입니다.


(홧김에 살인)

사실 그렇다고 이런 이상한 대사들을 다 뽑아 버리면 그대로 또 건조한 이야기로만 남아서 지루하기는 지루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감동적인 신파조 이야기야 말로 진정한 군더더기 같습니다. 그러니까, 권선징악 내용을 살핀다고 황정순이 나와서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망나니 아들을 아끼는 마음 같은 이야기가 군더더기 같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는 모습, 애절한 대사 길게 주절 거리기 같은 일들을 하는 데, 크게 망하는 대목은 없어도 너무 답답하고 상투적인 내용들이 느릿느릿한 모양에 갇혀 있어서 오히려 이야기에 힘을 빼는 면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면 무조건 관객들이 편들어 줄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해서, 주인공이 너무 성급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에 지나지 않게 이야기를 짜놓았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이런 내용이 역으로 선량한 효자가 어머니랑 우는 이야기와는 안맞으니 더욱 어거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별로 그렇게 많이 억울하지는 않아 보이니, 길게 울면서 주절거려도 별로 한 맺힌 이야기 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에서 정말로 한 톨도 도움 되지 않는 부분은 결말의 급전환입니다. 괜히 감동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그 쌀쌀맞게 주인공을 배신하고 마지막까지도 엽전 운운하면서 주인공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여자 주인공이 맨 마지막에 죽을 때가 되니까, 갑자기 주인공 보고 "사랑했어요." 라고 말하는 부분이 휙 튀어 나와 버립니다. 이것은 그냥 무조건 남녀 주인공은 연애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확 영화 속에 구겨 넣어 버려서 나온 장면인데, 이 황당한 대사를 두고 길게 두 사람이 울면서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고 사랑해요, 뭐라고? 나를 사랑하나요? 뭐 이런 말을 반복하는 것이 오래도 나와서 더욱 더 엉성하게 느껴졌습니다.


(열 받아서 살인미수)

황당한 형태로 튀어 나와 버리는 "멋진 대사"들이나, 마지막 결전 장면 즈음에 터져 나오는 막나가는 결말로 도움닫기 하기 등등은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는 실패한 점입니다. 그러나 그런 면도 포함해서 지켜보기에는 재미를 주는 요소들이 많은 영화 였습니다. 박노식은 도망자, 한맺힌 복수자 연기를 튼실하게 해 내고 있고, 우연정은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어도 냉정하게 배신 하는 부분등에서 날카로운 모습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특히 이야기가 막나갈 무렵에 같이 인질로 잡힌 우연정 새 애인이 박노식에게,

"솔직히 이 여자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라고 말하자 우연정은 확 열받아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박노식 총을 빼앗아 우연정 제손으로 자신의 새 애인을 쏘아 죽여 버리는 게 나옵니다. 이 부분 내용은 막나가지만 우연정은 아주 근사 해 보입니다. (포스터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결코 이 영화의 이 부분을 보기 전에는 이런 내용이 튀어 나와 버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전환인데, 그리고 나서 우연정이 박노식까지 쏘아 버리려고 하자 박노식이 웃으면서,

"산수를 못하나?"

라고 하면서 너무 열받아서 장전된 총알 여섯발을 모두 새 애인에게 다 쏘아 버렸으니 소용 없다고 하는 부분도 꽤 괴상하게 흥미를 자아냅니다.

록큰롤과 신나는 드럼 소리를 잘 활용한 음악이 짧게 짧게 깔리는 것이 듣기 좋은 편입니다. 일본의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의 배경음악과 닮은 일종의 주제곡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것도 너무 비슷하고 좀 자주 쓰인다 싶어서 그렇지 괜찮게 들렸습니다.


그 밖에...

박노식이 직접 감독을 맡은 영화들은 음악이 대체로 당시 보통 한국 영화들 보다 한결 좋은 듯 합니다.

이 영화의 부제 내지는 "일명"이라고 포스터에 나오는 다른 제목이 "엽전" 이기도 합니다.

도는 이야기 중에, 탈옥 등이 나오는 이 영화의 내용은 종종 경찰과 시비를 붙기도 했던 박노식이 철창 구경을 해 보다가 소재를 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게 보기에는 일본의 중저예산 "감옥", "여자 감방" 영화들을 중심으로 몇몇 영화들을 조합한 것이 바탕으로 분명히 깔려 있는 느낌이 났습니다.

1968년에 유명한 "김희로 사건"이 일어났는데, 90년대에 제작된 영화 "김의 전쟁"에 앞서서 1973년작인 이 영화가 김희로 사건에서 소재를 가져와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로 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90년대에 나온 "김의 전쟁"과 언뜻언뜻 자연스럽게 비교되는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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