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앤젤 페이스 Angel Face

2011.04.09 20:28

곽재식 조회 수:9225

팜므 파탈. 단어만 보면 꼭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 데, 주로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남자를 파멸시키는 유혹적인 여자 주인공을 말하는 이 "팜므 파탈" 이야기로 옛날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 중에 단연 꼽아볼만한 것이 바로 "앤젤 페이스" 아닌가 합니다. 문제의 "팜므 파탈" 역할은 진 시몬스가 맡았는 데 부잣집 외동딸로 나옵니다. 남자 주인공은 앰뷸런스 운전 하다가 우연히 이 아가씨를 마주치고 엮이게 되는 우리의 싸나이, 로버트 미첨입니다. 내용인즉, 이 멀쩡하고 매력적인 아가씨가 음모를 꾸미고, 또 로버트 미첨을 좋아하게 되면서, 집착, 광기가 불타오르다가 갈수록 막나가는 함정을 꾸민다는 겁니다.


(포스터)

1952년작 이 영화가 재미난 부분은 역시, 다름 아닌 이 여자 주인공, "팜므 파탈" 입니다. 예쁘고 권위 있고 부유한데, 성격 이상하고 거짓말, 속임수, 위선에 능한 악역.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되면 질투와 집착으로 파고 드는 그 전형적인 인물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인물을 활용하되, 일본 순정 만화의 몇몇 줄거리를 타고, "신데렐라" 여자 주인공과 경쟁하는 구도의 이야기들이 TV에서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왔지 싶습니다. 얼마전에 TV를 보니, 신은경이 어느 연속극 속에서 또 이 익숙한 역할을 벌이던데, 바로 다름아닌 이 옛날 영화 속 진 시몬스의 인물과 그대로 통하고 있던 것입니다.


(앤젤 페이스)

따라서 영화는 시작부터 바로 이 여자 주인공의 인물로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노부부가 살고 있는 저택에 앰뷸런스 기사인 로버트 미첨이 신고를 받고 출동합니다. 평화로운 갑부 노부부의 저택인데, 이 차분한 분위기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아가씨가 있습니다. 뭔가 벌써 긴장감이 생기는데, 이 노부부 중에 가스 중독으로 죽을 뻔 했던 사람이 발견 됩니다. 자살입니까? 타살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별 설명도 없고, 별 다른 구구하고 지루할 틈도 없습니다만, 바로 관객들은 분위기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안 어울리는 인물은 한 명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매력적인 그 아가씨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이 영화는 그 호기심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차분하게 이 여자 주인공 인물에 집중하도록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자 주인공이 범인 맞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만약 범인이라면 이 부유하게 잘 사는 아가씨가 도대체 무슨 사연, 무슨 억한 심정이 있길래 살인을 다 저지르려고 하겠습니까? 사연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아가씨는 눈물이 많고, 마음이 연약해 보입니다. 이런 것 살인범 답지 않습니다. 연기 입니까? - 뭐 당연히 영화니까 연기는 연기겠습니다만 - 영화 속 세상에서도 연기이겠습니까? 속임수는 아닙니까? 우리의 우직하고 사나이 답던 남자 주인공 로버트 미첨이 혹시 속임수에 걸려들지는 않겠습니까?


(음모를 꾸미는 분위기)

이제는 끝도 없이 일일연속극 속에서 보던 이야기이지만, 그 고풍스런 모습이 차근차근 펼쳐져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영화의 처음을 사로 잡고, 이야기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이야기를 드러내 보면 이렇습니다. 이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은 경쟁심, 소유욕,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나를 최고로 좋아해야 한다는 정신병적인 질투심 때문에 막 나가는 사람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영화에서는 흥미를 돋구기 위해 살짝 양념이 곁들여 져 있습니다. 모사와 협잡과는 아주아주 거리가 먼 우직하고 무뚝뚝한 덩치 큰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서 무표정하면서도 냉소적인 표정으로 이 아가씨를 보는 것입니다. 그냥 거기에서 바로 대결구도가 펼쳐 집니다. 로버트 미첨을 옆에 세워 두는 것만으로 관객은 어떤 싸움을 보는 느낌이 됩니다. 여자 주인공은 동정심, 위선, 거짓말 등등으로 사람을 홀리고 일을 꾸며서 악행을 저지르려 합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은 굳건하고 흔들림 없고, 항상 안정감 있고, 도시의 냉랭한 사연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력이 난 탓에 왠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자 주인공이 모사를 꾸미는 수작을 부릴 때 마다, "우리의 로버트 미첨은 그 정도에 넘어가지 않아"하는 응원하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역할을 하기에 로버트 미첨은 훌륭한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자리 잡아서 영화를 끌어나가는 배우는 여자 주인공을 맡은 진 시몬스 입니다. 당연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갖은 음모를 양심의 가책도 없이 거리낌 없이 꾸미는 무서운 여자의 실체를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재미의 중심입니다. 그런 인물을 힘있게 보여주어서, 혐오스러운 행동과 아름다운 외모를 동시에 보여주어서 관객을 계속 꿈과 같이 묶어두는 그 진 시몬스의 위력은 이 영화의 노른자위 입니다. 가다가 가다가 가끔은 정신병적으로 보이는 그 괴상한 분위기, 무슨 일을 또 어떻게 저지를지 모른다 싶은 느낌, 영화를 계속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노른자위라고 해서, 계란에 노른자위만 있어서 계속 먹는다면 얼마나 텁텁하겠습니까. 흰 자위 로버트 미첨도 못지 않습니다. 거친 사나이. 항상 떨지 않고 굳건한 믿음직하고 든든한 사나이. 워낙에 그 위력이 강해서, 이 영화 속에서는 따지고보면 바람 피우다가 털리고, 역으로 오쟁이진 남편 주제에, 무슨 자기가 표표히 제 갈 길을 미련 없이 떠나가는 영원히 꿈을 좇는 방랑자, 차가운 도시 남자인 척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꽤 그럴싸하게 보여 줍니다.


(흰자와 노른자)

물론 그런 "멋있는 척"하는 역할이 아직까지 진부해지지 않은 옛날 영화이기에 신선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면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미첨, 이 배우의 멋에 더 큰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로버트 미첨이 어떤 배우입니까?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물에 젖은 마를린 몬로의 몸을 담요로 닦아주는 장면을 장시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표정을 보란 듯이 보여준 배우 아닙니까? 이럴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 시몬스와 로버트 미첨)

진 시몬스의 정체와 알 수 없는 행동들이 하나 둘 드러나고, 진 시몬스와 로버트 미첨이 연기 대결을 펼치는 것으로 끌어가던 이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좀 재미가 덜 해 집니다. 이 영화가 법정물로 잠시 변신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후반에 법정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이 무렵 느와르 영화들의 흔한 형식이기도 합니다만, 이 영화에서는 두 배우들의 대결에서 초점이 흐려지고, 수사진, 변호사, 판사 드등의 다른 요소들이 확 드러나기 때문에 재미가 영 없어 집니다. 더군다나, 특별히 사건이 더 벌어진다거나, 더 드러날 사항이 없어서, 별 전환점이 없는데도 "과연 유죄판결 받을까 무죄판결 받을까"를 아슬아슬하게 한다고 시간을 질질끌어서, 더 재미가 없어 집니다. - 이런 것도 그러고보면 좀 일일연속극스러운 맛이 있습니다.

후반부가 더욱더 아쉬운 것은 이 대목에서 여자 주인공이 "착한 척"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뭐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항상 "착한 척"을 했습니다만, 이 법정극에서는 제작진이 "착한 척"을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이 막나가는 여자 주인공에게도 "마지막 순정"은 있었다... 라든가, "마지막 사랑만은 아름다운 진심이었다" 따위의 분위기를 드리우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 어울리는 줄거리라고는 "마지막 사랑만은 아름다운 진심이었다"라는 것 조차, 여자 주인공의 바닥을 모르는 속임수요 협잡이었다...에 더더욱 어울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그렇게가지 않고, 여러모로 정말로 여자 주인공에게 착한 점도 있는 것처럼 연출되어 있습니다.


(법정물 부분에서 단아한 분위기로 단장한 진 시몬스 - 이런 모습이 더 어울리는 배우이기는 합니다.)

이것은 그래도 앞날도 창창하고 전날도 창창했던 훌륭한 배우인 진 시몬스를 앞뒤 안가린 무자비한 개악당으로만 그려낼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꾸민 제작진의 "막찍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지원금 타먹기 위해서 난데 없이 영화 끝나기 3분전에 갑자기 "이 모든 악행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었다"라면서 반공물로 돌변하여 반공영화 지원금 타먹으려 했던, 60, 70년대 한국영화와 흡사합니다. 상당히 어색하고, 이 영화가 갖고 있던 가치, 줄거리와 각본에 스며 있는 진짜 짜릿한 맛을 다 던져 없애 보이는 싱겁고 재미 없는 수 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시무시하고 수수께끼 같았던 악당이 "사랑을 위해서 희생하는 비극적인 여주인공"틀에 끼워 맞추는 그야말로 틀에 박힌 모습으로 주저 앉다니. 아쉽습니다.


(느와르, 팜므 파탈, 할리우드 클래식)

그렇습니다만, 그 전까지 두 배우의 재미난 모습들은 확실히 훌륭한 구경거리 입니다. 게다가 재미없게 가라앉고 만다 싶은 이야기의 결말을 화끈하게 불태워 버리는 막판 한 방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래도 끝까지 시선을 휘어잡는 이야기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막판 장면이 갖고 있는 파괴적인 힘의 순간적인 폭발력과, 이 장면에서 시각, 청각, 두 주인공들의 표정 연기. 줄거리가 복선으로 활용되고 섞이고 연결되는 맛은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영화사에서 자주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이야기거리가, 과연 될만하니 말입니다.


그 밖에...

오토 프레밍거가 감독을 맡은 영화 입니다.

IMDB Trivia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로버트 미첨이 진 시몬스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 이 장면 자체도 인상적인 장면 입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반복해서 찍는 동안 오토 프레밍거 감독이 자꾸 잘못 연기했다면서 다시 하라고 했답니다. 로버트 미첨은 반복하던 끝에 질려서, 또 잘못했다고 다시 하라고 하자 홱 뒤돌아서서 감독 뺨을 확 후려 갈긴 다음에, "이렇게 때리면 제대로 때리는 거요?"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거야 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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