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퀴레 (Die Walküre)] 


3막의 악극 (Musikdrama)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 대본 


브륀힐데: 데보라 보이트 

지글린데: 에바 마리아 베스트브뢱 

프리카: 스테파니 블라이스 

지그문트: 요나스 카우프만 

보탄: 브린 터펠 

훈딩: 한스-페터 쾨니 


제작: 로베르 르파지 

제작 보조: 나일슨 비뇰라 

무대 디자인: 칼 필리옹 

의상 디자인: 프랑스와 상-오뱅 

조명 디자인: 에티엔 부셰 

비디오 이미지: 보리스 피르케 


지휘: 제임스 레바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합창단 


2011년 5월 14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뉴욕 


작년 10월에 [라인골트]의 공연이 있은 이후 현재까지 제임스 레바인의 신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일단 건강상의 이유로 그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직을 갑작스럽게 사임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남은 일정의 공연을 - 탱글우드 페스티벌까지 포함해서 – 몽땅 취소해 버렸습니다. 사실 보스턴의 클래식 음악 팬들로서는 그가 우선 순위를 정할 때 보스턴을 메트로폴리탄보다 한 수 아래에 둔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을 듯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야 뭐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뿐 아니라 사실은 메트로폴리탄에서도 아직 공식적으로 사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반지]의 연작 공연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즌 나머지 공연들은 파비오 루이지에게 넘겼습니다. 이러하니 곧 레바인이 메트로폴리탄에서도 물러나지 않을까 하는 소문이 무성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보스턴의 경우는 데이빗 진먼이나 마이클 틸슨 토머스, 메트로폴리탄은 파비오 루이지 등이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는 듯 한데 모르겠습니다, 일이 어떻게 앞으로 진행이 될지. 사실 루이지는 굉장히 훌륭한 지휘자인 건 사실인데 레바인 급이라고 하기는 좀 부족하고 그렇습니다. 주어진 공연 작품들을 충실하고 훌륭하게 연주해낼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메트로폴리탄에서 제임스 레바인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재능있는 가수들을 적재 적소에 배치해 가면서 꾸준히 수준 높은 공연을 유지할 수 있는 ‘총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판단 불가입니다. 보스턴 심퍼니의 경우는 뭐, 사실 좀 신선한 인물이 맡아서 변화를 줘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국의 훌륭한 오케스트라들 중에서도 보스턴은 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쳇바퀴 도는 듯한 레퍼토리가 더 두드러지는 편이죠. 


아무튼, 그래서 오늘 공연이 30분 이상 늦어졌을 때는 아무래도 레바인이 공연을 취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공연이 지연된 것은 르파지의 복잡한 무대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컴퓨터가 무대 위의 금속 널판지에 투사하는 영상을 조율하는 프로그램의 오작동 문제였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안 그래도 12시에 시작해서 5시 즈음에 끝나는 토요일 마티네 공연이 한참 더 늦어졌죠. 개인적으로는 이 시간은 가장 공연을 보기에 힘듭니다. 한주일 내내 시달리다가 토요일에는 낮잠도 좀 자고 그래야 하는데 이게 습관이 되서 2-3시쯤 되면 정신이 혼미해지죠. 


그나마 이날은 음악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지루한 줄도 모르고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발퀴레]는 바그너의 [반지] 중에서도 가장 꽉 짜여져 있고 극적으로도 긴장감 넘치는 부분일 텐데, 특히 음악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는 누차 이야기하지만, 메트로폴리탄과 제임스 레바인은 현존하는 최고의 바그너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라는 칭호를 들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템포 설정, 다이내믹의 변화, 성부간의 조화와 균형, 큰 그림을 살려가면서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정성, 선율과 다채로운 음색의 절묘한 조화 등등 이상적인 바그너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갖춰야 할 미덕을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서 1시간 30분에 달하는 2막은 정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번의 [라인골트] 때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정말 이 실황은 음반으로 나와도 전혀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영상물보다는 음반 이야기를 먼저 하는지는 나중에 르파지의 연출을 언급하면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레바인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처음에 거의 기어오다시피 하면서 오케스트라 피트로 등장하길래 이 5시간이 넘어가는 작품을 제대로 연주할 수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되었는데, 일단 포디움에 앉은 후부터는 신들린 듯한 비팅을 보여줬습니다. 오케스트라도 특별히 주의를 집중하는 듯 했고요. 다음 시즌의 나머지 두 작품도 반드시 지휘할 것이라는 결의가 느껴졌다는 것이죠. 그러나 커튼 콜에서도 무대 위에 올라와서 인사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허리가 정말 많이 안 좋기는 안 좋은가 봅니다. 체중도 엄청 빠진 듯 하고요.


 


가수들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당연히 지그문트 역으로 데뷔한 요나스 카우프만입니다. 아마도 메트 뿐 아니라 이 가수의 이 역할의 첫 무대인 것 같은데, 사실 이 부분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정말 최고의 지그문트였습니다. 외모, 연기, 노래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는 것이죠. 이 사람의 묵직하고 어두우면서 중심이 잘 잡혀 있는 저음 부분은 지그문트의 성격 묘사에 딱 들어맞고, 고음으로 힘차게 올라가는 부분들도 전혀 무리없이 소화해 냅니다. 아마도 제임스 킹 (그러나 이 사람은 영상물이 남아 있는 게 없지요)과 페터 호프만 (성악적인 부분에서 불만을 갖는 팬들도 꽤 있습니다) 등을 능가하는 지그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사실 전 이 가수가 등장할 때부터 ‘쟤는 언제쯤 지그문트를 부를 거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제 다음으로는 파르지팔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트리스탄에 도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흠흠. 


다음으로는 브린 터펠의 보탄입니다. 메트 구석구석을 꽉꽉 채우는 엄청난 성량에, 묵직하고 안정된 프레이징, 소토 보체의 피아노에서부터 포르테시모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다이내믹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능력까지 이만한 보탄을 최근에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람이 메트로폴리탄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대결하기보다 마치 준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장수처럼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타고 올라가 무대를 누비는 장면들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연기도 한참 물이 오른 듯 하고요. 


에바 마리아 베스트브뢱의 지글린데는 다소 어둡고 두터운 성악 특성에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잘 잡혀 있는 메조 소프라노에 가까운 소리였습니다만, 요나스 카우프만의 지크문트와 아주 잘 어울리는 배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연기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고요. 한스-페터 쾨니히나 다른 여러 발퀴레들도 부곶한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스테파니 블라이스는 연기면에서는 좀 부담스럽기는 했는데, 목소리만으로는 손색이 없는 프리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륀힐데 역의 데보라 보이트는, 음, 딱 기대한 만큼 하더라고요. 고음으로도 무리 없이 올라가고, 아무튼 모든 음들을 제대로 불러주기는 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러운 브륀힐데라고 할 수 없죠. 날카롭고 다소 메마른 듯한 목소리가 이제는 노쇠의 현상까지 더해진 듯 해서 앞으로의 일정이 좀 걱정스럽기는 했습니다. 하긴 워낙 잘 관리를 하는 가수이니 [신들의 황혼] 까지 무리없이 부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보다 훌륭한 브륀힐데들은 음반이나 영상물들에 차고 넘쳤죠. 물론 보이트가 메트의 간판 스타 중의 하나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니 이런 엄청난 프로덕션의 주연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습니다만, 지난번 오토 솅크 프로덕션의 마지막 공연에서 압도적인 브륀힐데를 보여주고 들려줬던 이레네 테오린이 이 역을 맡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아니면 요즘 니나 슈템메도 브륀힐데를 부르던데…하긴 이 소프라노는 대서양을 건너서는 잘 안 오지요. 


르파지의 프로덕션은 [라인골트]에서 예상했던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더군요. 몇몇 아이디어들이 훌륭한 것은 사실이고, 전반적으로 무대를 보고 있는 동안 지루하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만, 뭐랄까, 이렇게 겁나게 비싼 무대 장치만으로 ‘드라마’로서의 바그너 작품의 핵심을 다 보여주기는 확실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죠. 아마도 초심자였다면 1막에서 투사된 영상에 지크문트의 과거사를 그가 노래부르는 동안 그림자 영상으로 충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나, 2막의 보탄의 긴 독백 장면에서 마찬가지로 나레이션의 내용을 아기자기하게 투사해서 보여주는 ‘눈동자’ 등이 많은 도움을 줄 수는 있었겠죠. (그러고 보면 이 2막의 ‘눈동자’ 장면은 지금까지 르파지의 프로덕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기는 했습니다) 3막에의 ‘발퀴레의 정상’ 장면에서 눈덮인 산이 비춰지는 것도 나름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었고, 마지막의 로게의 불 장면 역시 장관이기는 했습니다만, 음, 역시 뭔가 부족합니다. ‘발퀴레의 기행’ 장면에서 저는 ‘꽥, 저게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오히려 관객들은 박수를 쳐 주더군요. 좀 생각해 볼 지점이었습니다. (나중에 영상물이 나오면 반드시 확인해 보세요…) 


가수들의 연기는 대부분 원작의 지시에 아주 충실한 편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 자연주의적인 투사 화면들이나 친절하면서도 자세한 나레이션의 영상화 등은 오토 솅크의 전 프로덕션과의 연결점이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그너의 초심자이자 연극 경험이 일천한 르파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프로덕션을 비롯해서 요즘의 논란이 되고 있는 메트의 ‘유로트래시’ (…) 연출들을 위해서 연출가들을 데려올 거면, 피터 겔브로서는 좀 더 신중하게 선택했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가령 취리히 오페라 하우스에서 극도로 추상적인 무대만으로 훌륭하게 [파르지팔]을 연출해 낸 한스 홀만이나, 괴기한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는 마르틴 쿠제이, 하다못해 카스퍼 벡 홀텐이라도 데려왔더라면 어땠을까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뭐. (한스 홀만-베르나르트 하이팅크 팀의 [파르지팔] 영상물 감상문도 조만간 올라갑니다) 


의상은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아서 래컴의 삽화에서 그대로 뽑아낸 듯한 발퀴레들의 의상이야 그렇다고 치고 (그래도 그 번쩍번쩍한 알루미늄 재질은 좀 적응하기 힘듭니다만), 보탄이나 프리카, 지크문트 등의 시대 불명, 국적 불명의 의상들은 좀 손봐줘야 할 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오페라 무대에서 긴 머리는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 시즌의 [지크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에서도 여전히 레바인이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어째 그로서는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백조의 노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예상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로서는 합당한 퇴장일 수도 있는 것이겠죠. 게리 레만이 지크프리트 역을 맡게 되는 모양인데, 이점은 상당히 기대가 큽니다. 


르파지의 연출은 여전히 개선할 점이 많습니다만, 시즌을 거듭하면서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솅크의 경우처럼 가수들의 자율적인 연기에 크게 좌우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 나중에 나올 영상물로 더 많은 주목과 평가를 받게 되겠죠. 


내년 시즌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나탈리 드세가 주연으로 등장하게 되는 [라 트라비아타]가 관심이 많이 갑니다. 프로덕션 자체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그대로 수입해 오는 듯 하긴 합니다만. 이제 르네 플레밍은 완전히 핸델 쪽으로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하고요. 윌리엄 크리스티가 주축이 되어서 라모, 비발디, 핸델 등의 음악으로 만드는 [마법에 걸린 섬] 프로덕션 역시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전에 저는 만우절 기념 포스팅으로 르네 야콥스의 ‘오페라를 만들자!’라는 존재하지 않는 영상물에 대해서 감상문을 쓴 적이 있는데, 마치 이 프로덕션을 예언하는 듯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레바인이 하차하고 그 후임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메트로서도 일종의 터닝 포인트가 될 그런 시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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