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내 마음속 최고의 배트맨 영화는 단연 이 작품이다. 기괴하고 음산하며 음울하다. 아마 앞으로도 액션이나 스토리 면에서 이 작품을 뛰어넘을만한 배트맨은 나올지언정 이 작품의 분위기를 뛰어넘는 작품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배트맨 1편은 괴짜감독 팀 버튼과 코미디 배우 마이클 키튼 주연이라는, 도무지 배트맨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 속에 출발했지만 모두의 우려를 뛰어넘으며 성공을 거두었고, 헐리웃에선 당연히 속편을 내놓았다. 3년만에 돌아본 배트맨 리턴즈는 전형적인 속편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더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더 스케일도 커졌지만, 외형만 커졌지 내실은 더욱 부실해지게 마련인 다른 전형적인 속편들과 달리 캐릭터와 스토리 면에서도 전작을 능가하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특히 매력적인 캐릭터는 배트맨 리턴즈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은 여전히 심각하고 음울하며(아니, 전편보다 더욱 음울하다) 미셀 파이퍼는 도덕과 규칙을 뛰어넘어 선역과 악역, 동료와 적 사이를 거침없이 오가는 자유분방한 캐릭터이지만 그 이면엔 슬픔이 서린 캣우먼을 열연하며 문자 그대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금발에 창백한 피부와 어우러진 그녀의 코스튬은 뇌쇄적인 섹시함이란 게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캐릭터는 아무래도 대니 드 비토가 연기한 펭귄(펭귄맨이 아니라 그냥 펭귄이다)일 것이다. 기괴한 외모로 인해 버림받고 냄비같은 인간들에 의해 다시 배신당한 뒤 고담시에 복수를 꿈꾸는 이 캐릭터는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악역이라는 포지션에도 불구하고 연민을 자아내며 원작 코믹스보다도 오히려 더욱 펭귄다운(사실 원작에서의 펭귄은 그렇게 특이하게 생기진 않았다. 그냥 매부리코에 배불뚝이고 범죄성향 역시 직접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장물아비나 정보통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작품에 따라서는 범죄에서 손털고 합법적인 사장님으로 잘먹고 잘살다가 오히려 다른 악당들에게 털리고 배트맨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고... 괴인과 정신병자들이 넘쳐나는 고담시에서 아무 초능력 없이 잔머리와 돈으로 먹고사는 가장 인간적인 악당...)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배트맨과 모든 면에서 대조되는 캐릭터인 조커와 상극을 이루며 갈등했던 전편과 달리 본편의 두 악역  모두 배트맨의 닮은꼴들인데, 펭귄은 어두운 과거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이해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캣우먼은 두개의 삶을 오가며 혼란스러워한다는 점에서 배트맨과 연관되어 본편의 이야기는 그 여느때보다 우울하고 일종의 자기연민마저 느껴진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더욱 화려하면서도 음습해진 고담시의 배경 아래 액션씬 역시 전작에 비해 증가한 제작비에 힘입어 훨씬 박진감 있고도 짜임새 역시 놓치지 않았다. 배트맨의 글라이딩 장면부터 캣우먼이 배트 사인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까지 인상적인 시퀀스들도 매우 많다. 영상, 음악, 주제에 캐릭터까지 잘 어울어진 진짜 수작이라고 볼 수 있다.

 

p.s. 1.  헐리웃 역사상 유래없는, 기괴한 분위기의 블록버스터 괴작이란 찬사 속에 2편 역시 성공을 거두었지만 팀 버튼이 후속작을 고사하며 3편은 조엘 슈마허의 손에 넘어갔고, 이후 배트맨 시리즈는 영화화된 히어로물이 어디까지 유치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반면교사로 추락하며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리부팅될 때까지 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_=;;  사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도 재미가 없진 않다. 패러렐 월드를 배경으로 한 막장 팬픽을 보는 기분이랄까;; 항상 폐쇄적인 배트맨이 자선행사장에 코스튬을 입은 채 보란듯이 나타나 "배트카드"를 긁는 모습은 거의 초현실적인 재미마저 준다. "배트맨과 로빈"에서 코스튬에 유두가 표현되며 빚어진 게이 논란, "분명 배트맨 영화인데 주인공은 아놀드 슈워저네거였다"라는 조지 클루니의 불평 등 영화 밖 가십도 꽤 재미있었고 발 킬머, 짐 캐리, 니콜 키드먼, 토미 리 존스, 조지 클루니, 아놀드 슈워제네거, 우마 서먼에 이르기까지 연기력과 흥행력을 겸비한(뭐 연기력은 좀 의심스러운 배우도 일부 섞여있지만) 기라성같은 헐리웃의 톱스타들이 허술한 대본의 벽에 가로막혀 단체로 발연기를 보여주는 장면을 이 영화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볼 수 있겠나? ^^;;

 

p.s. 2. 아마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를 먼저 접한 뒤 이 영화를 본다면 배트맨이 의외로 살인에 대해 무덤덤하다는 데 놀랄지도 모르는데, 이는 영화가 70~80년대 배트맨을 모티브로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배트맨은 악당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을 위험에 던지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을만큼 절대적인 불살주의자지만, 70~80년대 코믹스의 배트맨은 난간에 매달린 채 목숨을 구걸하는 악당에게 "지옥에서 네 죄의 댓가를 치뤄라, 개자식아" 라고 쏘아붙이며 돌아서서 썩소를 지을만큼 꽤나 쿨한 캐릭터였다;; 지금 배트맨이 실수로라도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의 이미지라면, 당시 배트맨은 굳이 죽이려고 때린 건 아니지만 재수 없어서 죽는대도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느낌. 이 영화에서 배트맨이 시한폭탄을 찬 악당을 폭탄을 작동시킨 채 그냥 맨홀 아래로 던져버린다든지 배트모빌의 부스터를 작동시켜 뒤에 서있던 악당을 산채로 태워버리는 등의 장면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쿨한 배트맨이 놀란 감독 시리즈에서 고생을 사서 하는 나이브한 배트맨보다 더 마음에 든다. 뭐 내가 가장 멋지게 생각했던 배트맨은 분노를 봉인해제하고 70 가까이 된 노구를 이끈 채 세상과 맞서는 다크나이트 리턴즈, 다크나이트 스트라익스 어게인의 배트맨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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