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녀 (1975)

2011.06.13 22:54

곽재식 조회 수:3042

1975년작 한국영화 "광녀"는 공포영화처럼 시작하고 전체 내용을 봐도 악몽 같은 광기를 다룬 공포영화가 되어야 마땅한 모양입니다. 자극적인 구성과 혐오감을 담는 방식도 출중한 편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선한 모습과 권선징악 요소를 살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헤멘 덕분에 어처구니 없게 우스꽝스러워진 모습이 군데군데 들어간 영화이기도 합니다. 내용인즉, 배신 당한 주인공이 옛 동료였던 범죄자들에게 무서운 복수를 한다는 것인데, 영화의 도입부만 봐서는 결코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없다는 특이한 점이 있기도 합니다.


(신문광고에 게재된 영화 포스터)

이 영화가 시작되면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쓰기 위해 돈을 강탈 했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힌 다섯명의 주인공들을 보여 주면서 시작 합니다. "독립군의 군자금"이라는 영원한 한국영화 만주물 서부극의 소재를 듣기만 해도 바로 느껴지듯이, 이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은 꼭 만주물 서부극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소재들도 만주물 서부극이 영향을 받아 종종 활용해 왔던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의 소재들을 가져와 쓴 부분들이 보입니다. 죽기 전에 돈이 숨겨진 장소를 주인공에게만 알려 주는 조연, 오르골 소리가 들려오는 시계, 주인공이 쇠사슬에 묶인 모양, 의리도 명예도 없이 돈만 밝히며 이전투구하는 범죄자들, 옷이 찢긴 채 뛰는 처절한 탈주, 악당을 묶어 놓고 이상한 장치에 권총을 연결해서 협박하는 모양, 이런 것들은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 소위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인상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에서 멕시코 혁명이나 남북전쟁과 잘 엮이던 것부터가 독립군을 소재로 하는 한국 영화의 만주물 서부극과 통하는 대목인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이런 소재들을 가져와서 활용하면서도, 그냥 따라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의 연출은 감옥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이용하는 소극장 연극처럼 되어 있습니다. 감옥 벽과 벽 사이에 카메라가 위치에서 칸 양쪽의 인물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감을 느끼기에는 소박하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하지만 인상이 강하고 충분하며, 인물 개개인의 고민과 욕심, 심경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부드럽게 갈등을 전하고 있어서, 아주 훌륭 했습니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일본군 고문기술자 역을 연기한 장동휘의 모습은 우리가 "만주물 서부극의 일본군 고문기술자"하면 떠올릴 수 있는 형태의 극치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일본군 고문기술자, 장동휘: 자료사진은 흑백사진 밖에 없습니다만, 컬러 영화입니다.)

이 감옥에 갇힌 무리들이 탈출하는 모양을 보여줄 때, 갑자기 일제시대가 아니라 그냥 1970년대 현대인 것 같이 묘사되는 황당한 거리풍경과 옷차림을 보여 줍니다. 사실 뭐 고증이랄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뭐 만주물 서부극이 시대를 슬쩍 무시하는 것 역시도 뭐, 까짓거 이 바닥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니, 대강 넘어가면서 보면, 또 이 감옥에 갇힌 무리들이 탈주하는 장면이 꽤 괜찮습니다. 깊은 밤, 아슬아슬한 탈출의 순간 희번덕 거리는 박노식의 눈빛도 멋지게 화면에 잡히고, 힘겹게 도망치다가 헛간으로 숨어들었는데 자기들 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일 때 헛간 한 켠의 돼지들을 같이 담아 보여주는 모습도 관객에게 와닿을 만합니다.

이렇게 보면 완연한 만주물 서부극 같습니다. 문제는 제목이 "광녀"인데다가, 영화가 시작하면서 맛이 간 필체로 "狂女"라고 글씨 쓰면서 제목 보여 줄 때 어떤 여자의 미치광이 같은 웃음소리를 무섭게 한참 들려줬다는 겁니다. 이렇게 만주물 서부극으로 영화가 진행되면 결코 "광녀"와는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이 될 듯 합니다. 이미 영화는 한참 오래도록 진행 되었습니다. 탈출 작전에 참여한 여자 대원이 문제의 "광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그냥 돈을 탐내는 모습만 드러날 뿐 그렇게 미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벌써 영화가 한참 진행 되었는데 왜 이런 것입니까?

의아심이 깊어 갈 때 즈음, 이제 영화는 확 바뀌어 버립니다. 시대 배경이 1970년대의 현대로 바뀌고 영화의 연출과 내용도 휙 뒤집힙니다. 이제부터 영화는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의 군자금을 분배해서 가졌던 당시 탈주 일당들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디어, 현대의 박노식이 광기어린 복수의 난리를 치는 이야기로 넘어 가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영화의 본론 처럼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진지하고 재미있고 중후하게 진행 되었던 내용은 사실은 "도입부"라는 것입니다.

도입부의 비중이 너무 이상하게 큽니다. 예를 들어서 비중 있는 거물급 배우처럼 소개된 장동휘는 사실 이 영화에서는 그냥 단역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틸만 하다고 생각 합니다. 비중이 좀 치우치긴 했어도 어쨌거나 썩 잘만든 대목이고, 독립군 군자금을 두고 다투느라 치졸하게 싸우는 모양을 처절한 탈주자의 모습에 겹쳐 보여주는 것이 이탈리아산 서부극 소재들과 묘하게 어울려 무척 신나기 때문입니다.


(말만 독립군이고 사실은 군자금 노리고 동료간에 이전투구)

그렇다면 본론은 어떠냐 하면, 우선 본론도 대략의 모양과 줄거리, 위력적인 몇몇 화면등이 썩 멋진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본론 부분은 활극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만주물 서부극이 아니라, 무서운 범죄와 더 지독한 복수를 소재로 하고 있는 공포영화에 마땅히 어울립니다.

악당들의 범죄 때문에 그 정신적 충격으로 미쳐 버린 주인공의 동료 딸이 문제의 "광녀"로 등장합니다. 이 여자 주인공이 여기저기를 따라다니면서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 마다 멋모르고 미친 웃음소리를 깔깔 거리며 웃는 것도 그 음산하고 정신병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에 그만이라고 생각 합니다. 범죄 수법과 복수하는 방법들은 제 정신이 아니고, 그 묘사는 위태롭고 기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만 보면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중저예산 "완전성인용" 영화들의 기괴한 면을 본격적인 공포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여자 주인공의 미친 연기로 악마적인 심상과 초월적인 환상성을 드리우는 수법은 비슷한 수법을 쓴 유럽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 불길한 시골 동네의 어린이들 풍경을 스산히 보여주면서 공포물의 긴장감을 높여 가는 수법은 전통적이면서도 매우 모범적이라고 할만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중반 이후는 오싹한 공포물이냐 하면, 아쉽게도 몇몇 흠이 크지막하게 움푹움푹 새겨져 있어서 그렇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가장 큰 까닭은 이 영화 이야기가, 주인공이 신나게 싸우는 활극이 아니라 정신병자들이 악몽을 벌이는 공포영화에 마땅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주인공이 의롭고 멋지게 활약하는 활극으로 휘청휘청 빠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에서는 악당이 미친 짓을 하고, 주인공은 더 미친 짓을 해서 복수를 하는 데, 그러다가 주인공이 갑자기 악당 옆에서 일장연설을 하면서 악당을 꾸짖고 권선징악의 교훈을 줄줄줄 장시간 읊으며 연설을 한다는 것입니다.

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영화에 나오는 연설 장면처럼 막 연설을 합니다. 배경 음악은 신파조의 해괴하게 애절한 오르간 음악으로 문득 바뀝니다. 연설의 내용은 엉성한 문어체 대사와 의롭게 보여야 한다는 의욕만 앞서는 비문이 가득한 괴상한 헛대사로 가득합니다. 이런 부분들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이 미친 분위기의 영화에 공포물의 을씨년스러움을 모조리 날려 보내 버립니다. 몇몇 대목들은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에서 일부러 웃기려고 짜넣은 옛날 한국영화의 황당하게 우스꽝스러운 대사 흉내내는 대목들보다 훨씬 더 웃길 지경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영화에서 그런 부분이 이렇게나 섞여 있다면 이런 점은 치명적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 영화의 제작진이 도덕과 선악에 대해 좀 잘못 생각하고 영화를 찍다가 좀 엇나가 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분명히 미친 짓을 하고 있는데, 그게 미친 짓이라는 걸 제작진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주인공을 왠지 선하고 의리있게 연출하다보니 휙휙 꼬여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이렇습니다. 원래 독립군의 군자금을 훔친 것이었지만, 탈옥한 동료들은 독립이고 뭐고 제 몫만 챙겨 달라고 하게 됩니다. 주인공 박노식은 욕을 좀 한 뒤에 돈을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미 제 몫을 챙긴 동료들이 박노식을 속이고 죽은 동료의 몫을 빼앗고 그 유가족을 해쳤다는 것입니다.

박노식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사위"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동료의 가족을 찾아 가 봅니다. 그 동료가 죽기전에 자기를 "사위"라고 불렀으니, 그 동료의 딸은 자기의 "아내"에 해당할 겁니다. 박노식은 자신에게 "아내" 뻘이 되는 여자 주인공을 처음 만나는데, 이 여자 주인공은 동네의 유명한 미친 여자로, 웃으며 춤추고 날뛰고 있습니다. 배반한 동료들의 공격 때문에 정신적 충격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내"와의 첫 만남인 것입니다. 광기가 물씬 넘쳐 납니다. 이 부분까지는 공포물의 도입 답습니다.

게다가 악당들이 범행을 저지른 방법과 박노식이 그대로 복수하는 방법도 끔찍 합니다. 악당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깊은 산에 통나무로 우리를 만들고 거기에 늙은 어머니를 가두고 방치하여 굶겨 죽입니다. 또 한 사람은 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 목에 밧줄을 걸고 물로 끌고 들어가서는 장대로 짓눌러 죽이기도 합니다. 여자 주인공을 공격해 덥치기도 합니다. 박노식은 마지막 복수를 위해 배신한 동료 중에 여자는 그 때 그 자리로 끌고 가서 부랑자들을 데려와 고스란히 반복해 "돌려주는 짓"까지 합니다.

이렇게 격한 소재를 보여주는 화면의 모습도 과감합니다. 불길한 바탕을 살려주는 조명하며, 온통 진흙을 뒤집어 쓰고 엎어지는 격한 동작들이 가득하고, 인물의 표정을 강조 할 때에 사정 없이 가까이 보여주어 얼굴을 화면에 가득 담아내도록 육박해 들어오는 순간하며, 문제 없이 어울립니다. 이렇게만 잘 맺어 두었다면, "친절한 금자씨" 부류의 인상적인 피 튀기는 이야기가 70년대 중반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할만한 영화이기도 했다고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동료의 딸, 문제의 "광녀"를 만난 박노식)

망가지는 부분은 일단 이런 이야기를 담으면서 잘못 엉켜 버린 "교훈적 연설"들입니다. 주인공 박노식은 모든 사건의 전모를 알아내기 위해 두목 배신자의 졸개를 붙잡습니다. 박노식은 목 앞에는 쇠스랑을 받쳐두고 목에는 줄을 연결하여 권총 방아쇠와 연결해 두었습니다. 몸을 앞으로 살짝 움직이면 쇠스랑에 찔리고, 몸을 뒤로 살짝 움직이며 권총 방아쇠가 당겨지는 구조 입니다. 옴쭉 달싹 못하는 졸개를 협박해서 박노식은 사건의 전모를 듣고 분개 합니다. 심지어 배신자들은 일본 조총련과 짜고 공산당과도 연결 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이만하면, 미쳐 돌아가는 최신 유행 공포물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잘 가다 말고, 갑자기 박노식은 "가발을 벗어" 던집니다. 언제 어디서건 가발을 벗어 던지는 장면은 실없이 웃음이 나올 수 있으므로 벌써 불안해 집니다. 박노식은 가발을 벗으며, 자신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머리를 다쳐서 이렇게 되었는데 배신자들은 야비하다고 꾸짖습니다. "애꾸눈 박" http://gerecter.egloos.com/3892037 이나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http://gerecter.egloos.com/3821071 같은 영화에도 분노한 박노식이 처참하게 부상당한 장면을 드러내면서 기괴한 힘을 뿜어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에 비해서, 이 영화에서 가발을 벗는 장면은 어째 영구 같은 모습이 좀 드러나 보여서 이상하게 웃기기도 합니다. 뒤이어, 쐐기를 박는 박노식의 일장연설이 이어집니다.

"너희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동료를 배신하고 죄없는 노인과 여인을 짓밟고 지구상에서는 없어져야할 존재인 빨갱이들까지 돕고 있느냐. 자수를 하자. 참된 사람이 되자.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며 새로운 삶을 살자" 운운하는 장대하고 거창한 단어들의 비빔밥을 흩뿌리는 데, 이 말을 듣자, 악당 졸개는 갑자기 거짓말처럼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으며 개과천선하는 감동적 동작까지 갑자기 펼쳐 보여 줍니다. 어찌나 "거짓말 같은 지" 모릅니다.

뒤이어 박노식은 복수를 벌이다가 악당을 붙잡아 산 속에 가두어 두고 굶겨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굶긴다고 하자, 그 진지하고 처절한 대사를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악당이 "뭣이, 나는 한 끼만 안 먹어도 못견디는데!" 라고 놀라 두려워 하는 대사가 튀어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웃음을 참기란 참 어렵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얼마 후 악당이 굶다가 괴로워하고 있으니 박노식이 찾아와 왠 지팡이를 보여주며, 그게 악당이 죽인 늙은 동료 어머니 유가족의 유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로 악당을 두들겨 패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운율마저 폭발력 있는 70년대 후시 녹음 연기의 정수를 담아, 다음의 내용을 담아 울부짖습니다. "어머님은 자식을 때릴 수 있다! 그것은 매가 아니라 사랑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 자식된 처지로 동료의 어머님을 죽일 수가 있느냐? 맞아라! 이 지팡이는 매가 아니다! 이 지팡이는 바로 대한의 모든 어머님의 사랑이다!"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배신자들이 여자 주인공을 덥치는 대목과, 박노식이 복수 한다며 부랑자들을 모아 여자 배신자에게 똑같이 되갚아 주는 장면 입니다. 여자 주인공이 당하고 있을 때, 배신자들은 그들 사이에 부부도 있는데 옹기종기 모여 구경을 합니다. 여자 주인공은 미쳐 버리는데, 이 내용으로 보면 이건 텍사스에서 전기톱이 날아와야 마땅한 미친 무시무시함이 넘쳐야 하는 장면 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그저 악당을 한심스럽게 보이게 한다고 어째 이상하게 웃긴 장면과 엮어 놓았습니다. 이러니, 무서운 장면이 무섭지 않고 잘못 썩은 장면처럼만 보입니다.

박노식이 복수를 할 때는 더 이상 합니다. 여자 배신자에게 그 때 그 장소에서 그대로 갚아 주기 때문에, 여자 배신자도 결국 미쳐 버립니다. 이렇게 막나가는 장면도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장면을 보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미쳐 버리던 그 때 그 순간의 기억과 겹쳐지면서, 그 보는 충격으로 제 정신으로 돌아 오게 됩니다.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연출은 사이키델릭 분위기가 흐르는 것이 그래도 영화 속 세상의 결말 매듭으로는 있을 법한 일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문제는 그 다음 부터 입니다. 지금 여자 배신자가 완전히 미쳐서 웃으며 맨발로 뛰어다니다가 진흙탕에 들어가 진흙을 바르며 "분 바르고 시집 가야지" 같은 대사를 하고 빙빙 돌고 있습니다. 무서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걸 보여주면서, 여자 주인공이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점에만 집중하여, 즐겁고 명랑한 배경 음악과 함께 보여 주는 겁니다. 박노식도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좌우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멀리 느린 동작으로 달려와 포옹을 하는 한국영화 필름 속에 팔만사천번 정도 등장하는 상투적인 장면을 보이면서, 박노식이 독백 나래이션으로, "이제 자수를 하자. 여자 주인공과 부부가 되어 야지!" 하고 휙 끝나는 겁니다.


(복수자 박노식)

도입부의 만주물 서부극 부분에 너무 많이 할애 된 것은 그래도 재밌으니까 넘어 갈 만 했다고 생각 합니다. 박노식의 옷차림은 청바지와 청자켓이 허무하게 알록달록한 셔츠와 기이한 선글라스로 장식 되어 등장하는 모습 덕에 그냥 봐도 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만, 그것도 묻어 둘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공포물로 잘 윤곽을 마련해 두고 미쳐 돌아가는 악몽 같은 분위기로 연출하는 솜씨도 군데군데 남겨 두었으면서도, 교훈적인 활극에 오염된 것은 힘 빠지는 부분 이었습니다. 거기에 섞인 맹랑한 장황한 대사들이 치명타를 가하면, 오히려 그 덕분에 역으로 이 영화가 잘 짜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자극적인 내용을 줄줄이 보여 주는 게 목표처럼 보일 지경이니 말입니다. 그런 교훈 연설에 도무지 어울릴 내용이 아니니, 하나의 매끄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적당한 핑계거리를 대고 눈길 끄는 장면 집합시킨 티가 나는 듯 할 때가 있습니다.

챙겨 짚어볼만한 부분이 무척 많은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훨씬 먼저 나온 임권택 감독작 "황야의 독수리" http://gerecter.egloos.com/3887086 에서 광기어린 인물상을 진지하게 담아낸 것과 견주어 본다거나 한다면 더욱더 아쉬운 대목으로 남습니다.


그 밖에...

중간에 박노식이 악당에게 "나는 사람은 죽이지 않아. 그러나 너는 죽인다"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김화백을 떠올리지 않기 어렵습니다.

박노식은 한 가지 담배만 피우는 것이 특징으로 나오는 데, 절묘한 멋을 부리며 담배 브랜드를 끈적거리게 발음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삐끗하는 느낌이 웃음을 자아 냅니다.

박근형이 가장 어린 애송이 동료로 나오는데,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탈출하는 장면에서 차에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찍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쇠스랑과 방아쇠가 줄로 연결된 함정에 걸린 악당 졸개로 박동룡 http://gerecter.egloos.com/3825648 이 나옵니다. 박동룡이 맡은 역할 치고는 꽤 비중이 있는 조연입니다.

여자 주인공의 시각으로 보면 사람들이 무섭게 보일 때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할로윈 파티에 쓰일 법한 원숭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으로 보여준 장면이 있습니다.

미친 여자 주인공이 마구 날뛰다가 갑자기 팍 순간이동을 해서 없어지는 놀라운 장면이 영화에 두어번 나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게 뭔지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제 생각에는 각본상 "홀연히 여자 주인공이 신비롭게 어딘가로 사라졌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표현하려고 하다가 기술이 부족해서 그렇게 밖에 못나타낸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공포 영화에서 무시무시한 역할을 맡은 인물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초반에 영화 속 귀신이 하는 상투적인 행동들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송곳니 보여주기, 손톱 보여주며 고양이나 여우 같은 소리 내기 등등) 그 일환으로 그런 장면들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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