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13.04.17 10:10

violinne 조회 수:3121

 

      

 

 

 

솔직히 고백해보자. 우리가 청소년이었을 때, 우리는 능히 사람을 죽일수도 있었다. 

타인을 죽이거나 자신을 죽인다. 죽이거나 죽어야만 끝나는 세계에 사는 소년들. 

마음을 걸어닫고 가면을 쓰니 연극의 막이 오른다. 무대에 서자 자신이 매우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 번 올려진 막은 스스로 내릴 수가 없으니.

'릴리 슈슈'라는 자궁 속 에테르의 바다 속에 살다가 뭍으로 올라온 주둥이가 날카로운 물고기들.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것'은 양수를 헤엄치다 

뭍으로 밀려온 이들의 이야기이다.

 

 

열 네살 소년 유이치는 불량한 학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말하자면 꼬붕 노릇을 하는 건데, 그들의 심부름을 도맡고, 돈도 바치고,

자전거를 빼앗기고, 이유없이 맞기도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들이 엉덩이를 까라면 까고,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자위를 하라면 한다. 

끝없는 굴욕과 모멸감 속에서도 유이치가 간신히 버틸 수 있는 것은 '릴리 슈슈' 덕분이다. '릴리 슈슈'라는 가수를 찬양하고, 

자신이 손수 운영하는 팬 커뮤니티에서 다른 추종자들과 매일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노래를 찬미하고 경배하는 것이

그가 세상을 견디는 방법이다. 유이치는 속삭인다. "나에게는 릴리 슈슈만이 진짜다".

유이치에게 릴리 슈슈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이가 가장 친했던 친구, 호시노다. 그러나 지금, 호시노는 유이치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우두머리이고,

유이치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상관이다. 그러니까, 유이치는 가장 친했던 친구로부터 혹독한 이지매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잿빛. 유이치에게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빛나는 장밋빛 시절이 있었다. 장밋빛과 잿빛. 빛의 스펙트럼은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나뉘어진다. 

호시노와 유이치, 그리고 친구들이 함께 떠난 이리오모테섬으로의 여행에서 세상은 더없이 아름다운 장밋빛이었다.

아이들은 짓궂지만 선했고, 창공은 푸르고, 찬란한 햇살이 옥빛 바다위에 부서져 별빛처럼 흩뿌려졌다.

아이들은 떠들썩하게 웃다가 밤이 내리면 모닥불을 피우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어느덧 여름방학도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다.

 

비극은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새학기가 시작하는 개학식날, 호시노의 눈빛이 변해있었다. 그는 교실에서 급우를 괴롭히고 있던 불량한 소년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는 커터칼로 그의 머리털을 잘랐다. 지켜보던 모두가 놀랐다. 공부를 잘해서 입학식 때 전교생을 대신하여 선서하고,

매사에 반듯하게 처신하던 호시노였다. 호시노는 그러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방과후에 그 소년을 진흙탕에 밀어놓고 발가벗은 채 뒹굴게 했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이리저리 뒹구는 소년을 바라보며 정말로 신난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유이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바라다 본 하늘은 음울한 잿빛이었다.

 

                                                    

 

 

 에테르. 에테르가 필요하다. 릴리 슈슈는 에테르의 창조자이자 우주와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자라고 유이치는 믿고 있다. 유이치는 에테르를 갈구하고 

그 속에 잠겨있기를 원한다. 에테르의 바다 속을 유영할때면, 그는 아가미를 가진 물고기가 된다. 그녀의 음반을 듣고, 그녀를 생각 할 때만이 그가 편안하게

호흡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호시노도 에테르를 갈구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그도 릴리 슈슈를 추종한다. 그러나 여름방학에 유이치와 친구들과 함께 떠난 이리오모테 섬에서

그의 세계는 변해버린다. 아이들이 모래사장에 앉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두런거리고 있을 때, 그는 모래 위를 걷다가 뭍으로 튀어 올라온 물고기의

날카롭고 뾰족한 주둥이에 상처를 입는다. 어쩌면 그 물고기가 바로 그의 분신이자 운명인지도 모른다. 호시노는 에테르의 바다 속에 살다가

뭍으로 올라온 주둥이가 날카로운 물고기였을 것이다. 마치 그가 불량 소년의 머리털을 베었던 커터칼처럼 서슬퍼런 그것으로 유이치의 영혼을 상처입히고,

짝사랑하던 쿠노를 범해서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삭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물고기의 습격을 받은 다음날, 호시노는 섬의 바다에서 아이들과 헤엄을 치다가 혼자 외떨어져 익사할 뻔한다. 죽음이 바로 호시노의 코 앞 까지 다가와 있었다!

물을 먹고 뭍으로 떠밀려온 그를 섬에서 알게되어 오며가며 인사하던 남성 관광객이 발견한다. 그 남자는 호시노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척하면서

입술에 키스한다. 그것은 그대로 죽음의 키스가 된다.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호시노는 그 때 죽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유이치의

기억속에서 다정하고 좋은 친구로 남았을텐데. 그러나 정작 죽은것은 그 남자다. 죽음의 기운이 호시노로부터 그의 입술로 옮겨붙기라도 한것일까. 

그는 구조를 요청해서 호시노를 살려놓고, 섬을 돌아다니다가 차에 치어 죽는다. 남자를 친 차에 동승한 섬의 여인은 말한다.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그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 이라고. 그녀의 말마따나 누구에게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 죽고 사는 것은 우리의 주관을 벗어나 

있는데. 누군가가 죽어도, 그의 세계가 파괴되어도, 자연은 평온하다. 자연은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속의 티끌 같은 존재들로,

홀연히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모든것이 달라진다. 무자비한 폭행과 가슴을 죄어오는 수치심과 참기 힘든 굴욕속에서도 햇빛은 따사롭고 투명하게 세상을 비추고,

미풍은 불고, 어디에선가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청소년기를, 사춘기 소년 내면의 변화무쌍함을 어떻게 논리적으로만 풀어낼까. 감독은 이미지와 사운드로 대신 말하고 있다. 

부드럽게 춤을추는 빛의 편린과 대기의 질감까지 담아내는 카메라는 극도로 감성적인 정서로 내내 아이들의 비극을 관조한다.

삽입곡인 드비쉬의 아라베스크의 선율은 스크린이라는 우주를 떠다니는 에테르에 다름 아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변주되며 꿈결처럼 흐르며

유이치와 아이들의 볼을 어루만지고 관객을 위로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해묵은 기억을 떠올린다. 아픔속에서도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존재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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