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담 (怪談, 1964)

2011.07.21 08:50

oldies 조회 수:3372

 * 어젯밤 극장에서 돌아와 바로 썼던 글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오늘"은 7월 20일을 가리킵니다. 수정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막 끝난 뒤의 흥분을 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7월 1일부터 시작된 한국영상자료원의 "3K: 3인의 일본 거장전"이 오늘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런저런 시네마테크를 통해 경험한 단일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뜻깊었던, 그러니까 서울아트시네마의 2004년 버스터 키튼 회고전이나 2005년 로버트 알드리치 회고전, 혹은 작년의 마스무라 야스조 회고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있었던 작년의 쿠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회고전보다 더 가슴을 뒤흔들었던 기획이었습니다. 비록 전체 상영작 스물네 편 중에 열다섯 편밖에 챙기지 못했습니다만 그 작품들 하나하나가 모두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대한 감각(특히 새삼, 큰 스크린으로 본다는 감각, 영화란 스크린에서 상영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드는 것이라는 의식)을 새로이 일깨워주었습니다. 더구나 작년에 뵙고 이제 영영 못 뵐 줄 알았던 나카다이 타츠야 선생님을 두 번이나 뵙고 훌륭한 GV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 이 기획이 성사되도록 해주신 많은 관계자분께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다음 생에 주변 사람들이 "저 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하고 부러워할 만큼 복 받으실 겁니다.

 이번 기획전을 통해서 이제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과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라면 덮어놓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늘 마지막 작품으로 상영된 〈괴담〉은 꽤 오랫동안 보기를 꺼렸던 작품이었습니다. 무서울까 봐는 아니고, 오히려 재미없을까 봐 그랬지요. 일단 〈전설의 고향〉식 "옛날이야기"를 영화화했다니 그리 끌리지 않았고, 옴니버스 구조라는 점도 별로였습니다. 옴니버스 영화는 서로 관련없는 이야기가 자주 끊겼다가 다시 새로 시작되기를 반복하니 장편과 비교하면 정신적으로 더 쉽게 지치기 마련이고, 대개는 단편 별로 수준 차이가 있어서 어느 것은 마음에 드는데 어느 것은 별로라는 식으로 나눠서 생각하게 되는지라 종국에는 그저 그렇다는 식의 인상만이 남곤 하기 때문입니다. 〈괴담〉의 경우 거기에다 강렬한 시각적 스타일로 유명하다는 설명이 덧붙여지자 의심마저 생겼습니다. 호사스런 화면으로 눈을 홀리고 넘어가고, 돌이켜 보면 남는 것은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런 영화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심 말입니다.

 정말이지 코바야시 감독님의 혼령이 나타나 제 귀를 생으로 잡아 뜯으셔도 할 말이 없는 의심이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DVD로, 그리고 올해 극장에서 필름으로 코바야시 감독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1959-1961)을 보면서 영화 만든 사람들의 각오와 의지가 스크린에 땀 한 방울까지 온전히 실려 있는 듯한 그 기백에 넋이 나가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영화를 통해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비록 여섯 권짜리 대하 장편소설을 욱여넣으며 극도로 민감한 정치적 혼란의 중심에 뛰어들어 악전고투하는 영화이다 보니 결코 매끄럽다고 할 수는 없는 결함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불완전성은 오히려 〈인간의 조건〉에 인간의 혼이 실려 있음을 실감케 하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매 순간 스크린 위의 형상을 볼 때마다 그 뒤에 있었을 사람들의 각오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괴담〉은 이와는 정반대로,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 만든 듯한 영화였습니다. 〈인간의 조건〉을 볼 때는 '어떻게 저런 걸 해내고야 말았을까?' 하는 경외감이 든다면 〈괴담〉은 '어떻게 애초에 저런 걸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영화입니다. 게다가 그걸 너무나도 매끄럽게 해내 버리니 어이가 없습니다. 자본이나 시간, 노력, 기술, 의지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안 되는 요소가 있단 말입니다. 영화에 사용한 기법이 생소하거나 참신하지는 않습니다. 귀신이 나타나는 모습을 이중노출로 표현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수법은 뻔히 보이는데 그 결과물, 그 효과가 도에 지나치게 훌륭해서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됩니다. 가령 하늘에 눈(眼) 하나가 덩그러니 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손으로 그린 그림인 게 분명하건만 왜 저렇게 아름다운 정도를 넘어서서 요기를 뿜어내어 관객들 아무도 못 웃고 숨죽이며 지켜보게 하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습니다. 또한 단지 카메라를 좌우로 뒤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똑똑히 보이는데 왜 집이 무너지는 것 같고 바람이 휘몰아쳐 나무를 뿌리째 뽑을 듯 뒤흔들며 보는 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지요. 심지어 과거에 있었던 전투를 묘사한 그림을 부분부분 찍어 편집하고 그 위로 그 사건에 관한 노래를 들려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런 슬라이드쇼의 어디에서 제가 느낀 것 같은 스펙터클이 뿜어져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화란 1+1이 뭐가 될지 알 수 없으며, 거기에서 마법이 나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수히 많은 인상적인 장면을 되뇌는 것 외에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달리 더 할 말도 없고, 특히 색채와 조명의 사용에 대해서 이 소리 저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는 꼴이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꼭 하나 언급을 하자면 타케미츠 토루의 음악입니다. 아니, 음악이 아니라 음향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새〉(The Birds, 1963)에서 버나드 허먼이 음향효과를 맡았듯이, 혹은 〈한나〉(Hanna, 2011)에서 케미컬 브라더스가 음향감독과 긴밀히 협조하며 음악을 빚었듯이, 타케미츠 역시 〈괴담〉의 음향 연출에 깊이 개입했거나 그와 공조하여 음악을 만들었으리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괴담〉은 프리츠 랑의 〈M〉(1931)이나, 로베르 브레송, 혹은 장-피에르 멜빌의 영화처럼 유성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무성영화를 만들어 놓고 일부분에 소리를 씌웠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정도로 몇몇 청각 요소만을 선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별된 음향은 배우의 연기나 화면의 움직임,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며 순간순간 강세를 주는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또는 음향이 화면의 움직임을 촉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음악은 이 음향을 원천으로 삼아 빚어집니다. 마룻바닥의 삐걱대는 소리, 눈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이 영화에서는 모두 음향이요, 음악입니다. 결국 네 편의 괴이한 "이야기"에서 출발한 구상(具象)의 영화는 어느덧 영상과 음향의 교차가 빚어내는 리듬에 몸을 내맡기는 추상의 영화로 변모합니다. (저는 구상과 추상 양쪽에 발을 걸친 채로 균형을 잘 잡는 영화가 최상의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괴담〉은 보통의 영화에 비하면 추상 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소재 자체가 초월적인 경향이 있어서 결국 균형이 아주 잘 잡혔다고 봅니다. 너무 구상적이어서 시시해지지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당혹스러워지지도 않지요.)

 한 대목만 예를 들어보자면, 두 번째 이야기 "설녀"에서 유키가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신 시어머니 묘에 성묘하러 가다가 빨래터의 아낙네 셋과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네 사람 사이를 오가는 대화 자체는 대단찮은 정보를 제공할 뿐입니다. 편집을 통해 생략되었던 그간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한편, 유키가 참 좋은 며느리이자 아내이고 도무지 늙지를 않는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이 내용만을 두고 무릎을 탁 치며 '아하! 유키는 설녀겠구나!'하고 감탄할 관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건 정말 하염없이 고전적인 괴담이라서 그 정도 정보는 구태여 이 장면에 이르지 않더라도 유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미 다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름부터가 "유키(雪)"이니, 만약 설녀가 아니라면 그게 더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장면은 누구나 다 아는 옛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지루한 의무방어용 장면으로 남지 않습니다. 저편에서 돌고 있는 물레방아의 소리, 아낙네들이 빨랫방망이 소리, 그리고 네 사람의 입을 오가는 말소리가 교묘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차하면서 음악적인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자크 타티 영화가 아무 말 없이 문 닫는 소리만으로도 리듬을 만들고 영화를 진행하듯, 이 장면의 정수는 언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거기에 언덕 위의 유키가 언덕 아래의 아낙들과 빚어내는 시각적 구도, 언덕 너머에 펼쳐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인공적인 하늘, 이 모든 요소가 더해지면서 어떤 줄거리, 플롯, 언어로도 설명이 안 되는 매혹적이고 사이한 기운을 전합니다. 저는 영화란 결국 바로 이렇게 말로 전할 수 없는 순간을 위해 만들고 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괴담〉에는 그런 순간이 수없이 많습니다. 준수한 공포영화를 원하시는 분들이나 고전 일본영화의 위대함을 만끽하고 싶으신 분들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고유성에 취하고 싶은 분들 모두에게 추천할 만합니다.

 〈괴담〉은 161분 판본과 183분 판본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제작사/배급사에 의해 함부로 난도질 된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고, 실제로 이번에 상영된 161분 판본도 내적 완결성은 충분합니다. 사라진 22분은 네 개의 단편에서 일부 장면들을 들어낸 결과라고 합니다. 홈비디오 쪽을 보면, 아직 블루레이는 나오지 않았고, DVD는 미국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한 DVD는 161분 판본이고 영국 유레카에서 출시한 DVD는 183분 판본입니다. 두 판본은 상영시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색감의 차이도 대단히 큽니다. 크라이테리언 161분 판본 쪽이 색이 훨씬 짙고 표현주의적이며, 유레카 183분 판본 쪽은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직접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완전판인 유레카 쪽이 색감도 옳지 않겠나 추측하고 있었는데 직접 필름으로 보니 색감은 크라이테리언 쪽이 맞더군요. 어쩌면 161분 판본과 183분 판본의 필름이 색부터 완전히 달라서 둘 다 오리지널이라는 기이한 판결이 내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감상으로는 일단 크라이테리언 판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영화 자체가 대단히 색을 공격적으로 쓰고 있기도 하고, 특히 죽은/죽어가는 사람의 잿빛 얼굴이 유레카 DVD 캡처에는 거의 살질 않네요. 언젠가는 블루레이로 나올 수밖에 없을 영화인데, 모쪼록 어느 제작사이든 신중한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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