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작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40, 50년대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널리 기억되고 있는 영화 아닌가 싶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느와르 영화의 기본 요소가 잘 박혀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남자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펼쳐지는 이야기면서, 중간 중간에 남자 주인공의 냉소적인 독백이 해설로 들어가 있고, 그 내용은 대충 막사는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져서는 안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뒤에 범죄와 악행의 소용돌이로 치달아 가는 이야기 입니다.


(포스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주인공이 우편배달부도 아닌데, 도대체 왜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말이 제목인지,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될만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끝까지 다보고 나면, "그래서 그게 제목이구나" 싶게 이야기를 풀어헤쳐 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공의 우여곡절과 어떻게 한 여자에게 빠져들고, 어떻게 내가 이 이상한 신세가 되었는지 주절주절 읊어대는 독백과 함께하는 내용에 어울려드는 것입니다.

사실 정말로 정통적인 "느와르 영화"라고 하기에는 느와르 영화 특유의 도회적인 요소라든가, 기괴한 인상주의 적인 화면 같은 면은 많이 부족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꼬여드는 이야기라든가, "한 남자가 어떻게 파멸해가는가" 하는 내용을 차근차근히,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는 사연 속에서 보여주는 맛은 재미도 있거니와, 범죄와 "위험한 여자"를 소재로하는 느와르 영화다운 맛에 한 번 취해 보기에 좋은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위험한 여자)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느와르 영화 패러디물이나, 느와르 영화를 따라하는 복고풍 영화에서 잘 지목하곤하는 영화 입니다. 80년대 후반 TV물 "블루문 특급"(Moonlighting)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최고의 에피소드로 뭘 꼽겠습니까? 역시 "The Dream Sequence Always Rings Twice"가 많을 텐데, 이 에피소드는 제목부터가 바로 이 영화의 패러디 입니다. 일 꼬여가면서 망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그려내는데 명수인 코엔 형제가 뛰어든 영화인 "The Man Who Wasn't There"는 어떻습니까? 40, 50년대 느와르 영화 복고풍을 작정하고 만든 "The Man Who Wasn't There"는 영화는, 전체 줄거리의 얼개, 갈등의 형식, 기타 요소요소의 수많은 부분들이 바로 이 영화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납골당의 미스테리(Tales From the Crypt)" 1시즌의 느와르 영화 풍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느와르 영화라면 역시 창살 그림자가 드리우는 장면)

그리하여 이 영화는 그렇게 꼬여가는 줄거리를 계단 밟고 빌딩 올라서듯 한 단계 한 단계 따라갑니다. 주인공이 어느 마을에 나타나고,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 집 주인의 매력적인 아내와 바람이 나고, 바람이 나다보니, 그 집 주인을 없애버리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속고 속이고, 믿을 수 없고, 경찰이 수사를 하고, 따돌리려고 하고, 사랑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랑한다고 믿어 보기도 하고, 사지육신 멀쩡하고 나름대로 매력도 있는 사람이었던 남자 주인공이, 어찌저찌하는 사이에 어떻게 이런 나락까지 떨어졌나 싶은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범죄의 동기, 범죄의 수법, 수사, 은폐 등등의 음모와 술수들이 어떻게 피어나는지, 어떻게 제대로 안풀리고 조금씩 꼬여서 사람을 속터지게 하고 힘들게 하는지, 더 이야기를 알 수 없게 하고 조마조마하게 하는 지, 대충 잊고 조용히 묻어 두어 이제는 좀 사람 답게 살아도 될만하다 싶은데 그때마다 어떻게 그게 망하는 지, 그 줄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는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가운데, 자칫 치밀어 오를 수 있지만, "선을 넘는 행동"이 얼마나 사람의 신세를 망칠 수 있는지, 보통 사람들이 어떤 욕망 때문에 죄책감을 넘어서서 살인을 저지르는 지, 그 광기, 충동, 감정의 격랑들을 하나 둘 짚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명성이나 "정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비해서는 다소간 부족한 면도 있는 영화입니다. 제가 가장 불만이 있는 대목은 이 영화에서 중반 이후로는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적어지고 재미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야기거리가 없어지는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 초반에 온갖 문제의 발단이 되고, 남자 주인공을 잡고 뒤흔들고, 모든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듯할 것처럼 보였던 그 파괴적인 힘에 비하면 영 성에 안차는 정도에 머물고 맙니다.

처음에 여자 주인공은, 스스로 무슨 일을 어떻게 저지를지, 어떤 음모를 어디에 숨기고 있는지 도무지 궁금하기도 하고, 자꾸 알고 싶기도 한, 그 자꾸 보고싶게만드는 위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급속히 잃고 맙니다. 처음에 여자 주인공은 당당한 어깨와 눈부신 걸음걸이를 뽐내며 등장해서 화면을 휘어잡는 화력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주인공이 중반 이후에는 그냥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면서, "오빠, 이제 어떡해?" 밖에 할 줄 모르는 재미 없는 그냥 심심한 사람과 점점 비슷해져 버리면서 주저 앉아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더 공감가는 보편적인 인간상을 드러낼 수야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초장에 발동을 걸어서 아직 시원하게 제대로 펼쳐 보여주지도 못합니다. 신비롭고, 위험하고, 수수께끼에 휩싸인 그 강렬한 "악녀"의 모습을 가면 갈 수록 더 불태워버리지 못하고 적당히 불길을 다잡아 놓은 것은 저에게는 큰 손해로 보였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남자 주인공의 연기나 인물의 성격에 독특한 맛이 넘치도록 충분한 것도 아닙니다. 남자 주인공은 주인공이 "악당 같다"는 면에서 최소한의 개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본 바탕이야 보통 사람이고, 적당히 유혹에 잘 넘어가는 그저 그런 가난뱅이 역할 정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 극적인 활약을 벌일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만, 느와르 영화 다운 독백을 읊조리는 구조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 제 1의 맛이라고 할 수 있는, 풍자적인 대사도 부족하고, 인상적이고 재미난 말을 독백으로 곱씹는 대목도 무척 부족합니다. 아슬아슬한 대목, 결정적인 장면을 앞두고는, 영화가 그저 연결을 위한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 시간을 질질 끌어대는 통에 필요 없이 지겨워 지는 순간이 느껴질만도 합니다.

이렇게저렇게 뜸들이며 보낸 시간에 비해, 최종 반전이라면 반전인 "우편배달부가 벨을 두 번 울리는 일"이 벌어지는 대목은 너무 급작스럽게 펼쳐져서 그저 교훈을 위해 난데 없이 벌어진 하늘이 내린 갑작스런 이상한 우연처럼 보일 뿐입니다. 정교하게 맞아 들어서 "어떻게 저렇게 꼬일수가"하고 관객의 탄식을 이끌어내야 마땅할만한 줄거리 흐름이었는데, 그렇게 푸욱 익히고 끓이는 대신에 슬쩍 짧게 후다닥 데치고 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래서는 이 영화의 전체적인 틀이 좋은 마당, 좋은 배경으로 멍석을 잘 깔아 준 데 비하면, 충분히 뭘 보여줬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남녀 주인공)

연출을 좀 더 기교적으로 해서, 군데군데 전환점 마다 격한 화면을 만들어 냈다면 훨씬 더 감정이 커질 영화 아닌가 싶습니다. 혹은 레이몬드 챈들러 소설 처럼 이죽거리는 어두운 농담 대사들을 좀 더 풀어 놓으면 더 좋아질 영화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마지막 장면은 더 절망적이고 더 장중하고 파괴적으로 연출해도 충분했다 싶습니다. 지금 영화에서는 살인장면 직전의 메아리가 울리는 계곡의 신비한 분위기 정도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기교는 없습니다. 이런저런 장면들마다 전체관람가 등급, 가족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인지, 그냥 차분하고 교훈적인 느낌으로 심심하게 버티는 부분들이 많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 밖에...

음악이 명곡이라면 명곡인 편입니다. 악행의 유혹에 치닫는 광기에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연주, 녹음 기술이 충분하지 못해서, 이 영화에서는 제 힘을 다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 워낙 인기가 있고, 이 영화는 꽤 재밌으면서도, 이런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기에, 영화판도 더 많이 나오고, 응용한 다른 영화, 패러디도 많아지는 것 아닌가 합니다. 1981년판 잭 니콜슨 나오는 영화는 이 영화보다 더 유명할 겁니다.

제목의 "Postman"이 번역 되어서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로 되지 않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되어 버린 까닭은 1981년판 영화가 국내 개봉될 당시에, 우편배달부측에서 항의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후로는 원작 소설 제목도 여기에 맞춰서 나와 있습니다.

결말을 알리는 이야기 입니다만, 결론을 바로 말해서, 제목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뜻을 밝혀보자면, 이렇습니다.

우편배달부가 벨 울리는 소리를 못들어서 편지를 못받고, 소포를 못받으면 어떤가 우리는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편지는 반드시 받습니다. 우편배달부는 확실히 전해주기 위해서 벨을 두 번 울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엄밀히 정해놓은 법의 테두리, 속여 넘길 감시자를 한 번은 감추고 피해갈 수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업보는 남아 있고, 정의는 언젠가는 찾아오기 마련이니, 어떻게 사연이 꼬이고 인생이 뒤틀려서 결국 죄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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