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주괴인 왕마귀 (1967)

2011.09.03 00:45

곽재식 조회 수:4336

서울에 수십 미터 짜리 거인 괴물이 나타나서 명동을 부수고 다니는데, 그 코털에 한 어린이가 매달려 있으면서 높은 곳에서 서울의 경치를 내려다보는 영화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어떤 모양이겠습니까? 실제로 이런 한국영화 나와 있는 것이 있어서 비슷한 부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회자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1960년대의 흑백영화 "우주괴인 왕마귀" 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외계인 침략자가 지구의 군사력을 측정해 보기 위해 거대한 우주괴물을 보내자, 서울의 여러 사람들이 혼란도 겪고 맞서 싸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문 포스터, 왼쪽이 명목상의 주인공 남궁원, 오른쪽이 남궁원을 능가하는 비중의 "양아치 어린이"역 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컬러 영화가 많이 나오던 시기에 나온 영화입니다만, 흑백영화라는 점은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특히 이 영화가 상상으로만 해 볼 수 있는 것을 눈으로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한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서 좀 더 안타깝습니다. 그나마 이 영화의 내용이 전형적인 1950년대 미국 중저예산 SF 영화가 대량생산 되던 때의 영화들과 비슷한 면이 많아서, 흑백 화면이 예스러운 맛을 살려주는 맛은 있었습니다. 1950년대의 미국 중저예산 SF 영화들은 주로 흑백으로 나온 것들이 많았으니, 외계인, 우주선, 용맹한 군인, 군인의 애인 등등을 다루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이 닮아 보이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를 견주어 볼 수 있는 다른 기준은 역시,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나왔던 여러가지 어린이용 SF 활극들입니다. 특히 TV에서 유행하던 것들과 닮은 부분들은 눈에 잘 띄는 편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사람이 분장을 하고 작은 모형으로 꾸민 시가지에 들어 서서 거대한 괴물인 척 하며 부수고 짓밟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동작을 쉽게 하기 위해, 거대한 괴물의 모양이 사람을 닮게 만든 거인형태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인 괴물도 마찬가지 입니다.

줄거리 구조 역시 비슷한 부류로 묶어 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외계인 괴물과 싸우는 전문적인 용사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것과 별 상관 없는 일반인의 이야기가 같이 진행 됩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괴물을 자빠뜨릴 때 두 이야기가 엮이며 결판을 내는 구성 입니다. 예를 들자면, 불량청소년에게 시달리는 학생이 불량청소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외계인에게 힘을 빌리는 이야기가 한 켠에서 나오고, 이 외계인을 쫓으며 싸우려 하는 지구방위대 용사의 이야기가 한 켠에서 나오다가, 마지막에 "외계인 괴물아, 그래도 불량청소년을 죽이는 것은 너무하잖아!" 라며 울부짖는 학생에게 외계인 괴물의 약점을 전해 듣고 지구방위대 용사가 이긴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정형화된 한 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케이블TV 등에서 종종 방송 되는 "파워레인저" 시리즈의 각 에피소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가 나온 시기(1967)는 "울트라맨(1966)"이나 "마그마 대사(1966)"와 같은 일본 TV물이 나온 때에서 멀지 않습니다. 그러니, 표현 방법, 촬영 수법, 내용 구성에서 영향 받은 면은 적잖이 있어 보입니다. 일본 기술진들이 대거 참여했던 "대괴수 용가리"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아예 일본 기술진이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짐작합니다. (이 영화의 경우 "대괴수 용가리"와 달리 일본 기술진 참여가 없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그런 관점으로 끌고 가서 보자면, 일본에서 유행하던 TV극에서 30분 방영용 1회 에피소드로 부려 놓을 내용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이야기 거리를 좀 더 담아서 극장 상영용 영화로 늘여 놓은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모양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울트라맨"의 한 장면 - TV판 컬러 제작으로 "우주괴인 왕마귀"보다 한결 나은 모습이라 영향관계가 있으리라 예상해 봅니다.)

(마그마 대사의 한 장면)

먼저 늘린다고 끼워 넣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 말고 더 핵심처럼 보이는 부분 부터 보면, 의외로 대충 때울 수 있을만큼 괜찮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단연 가장 중요한 출연자라고 할만한 우주에서온 거인 괴물의 모습은 뚜렷이 잘 보이게 나옵니다. 흑백 영화라서 적당히 가려지는 면이 있어서 더 그럴듯해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의 거리를 걷고 괴물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 주변과 명동거리를 부수는 장면은 뭘 하는 건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찍혀 있습니다. 아쉽게도 딱 30분 짜리 TV극에 나올만한 정도의 분량만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말기는 합니다.

괴물의 모습을 보자면, 좀 심심한 것이 그냥 가죽이 이상한 사람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지구 바깥 우주선에 있는 외계인들이 정신 조종 장치를 괴물에게 붙여두고, 이 조종장치를 이용해서 괴물을 날뛰도록 되어 있어서, 그 조종 장치가 "약점"이 된다든가, 커다란 괴물의 덩치를 이용해서 괴물의 몸속에 사람이 들어 가서 공격을 한다든가 하는 특징적인 면이 이야기 속의 사연에 얽혀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대단히 독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이미 2, 3백년전쯤에 나오는 "서유기"로 거슬러 갈 수 있는 이야기거리고, 다른 SF 활극, 괴물 영화에도 자주 나오던 것들 입니다. 하지만, 특수촬영 기술을 중심에 두는 영화들은 그저 "괴물이 걸어다니는 장면을 찍는다"는데만 급급해서 도대체 그렇게 걸어다니게 하면서 뭘 어떻게 할 지 어떤 걸 보여줄 지 내용을 짜는 건 엿바꿔 먹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다소간 빈한한 이 영화가 이런 정도를 건사한다는 점은 치하해 줄만 하다고 봅니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60년대 한국 괴물 영화의 대명사, "대괴수 용가리"만 해도, "용가리"는 그냥 큰 공룡 같은 괴물이라는 것만 있지, 그 습성이나 그래서 그렇게 커서 뭘 어떤 특징이 있다는 건지 흥미롭게 보여주는 데 신경을 덜 썼다고 생각 합니다. 오죽하면 "대괴수 용가리"에는 영화사의 기이한 경이로 누차 언급될만한, 로큰롤 편곡으로 연주하는 아리랑에 맞춰 꼬마 어린이가 아무 이유 없이 용가리를 보며 춤을 추면, 용가리도 따라서 춤을 추며 상영시간을 한참 보내는 앞도 뒤도 없고 막나가다 못해 나자빠질 장면이나 나와 버리니 말입니다.


(다른 신문 게재 포스터)

한편 거인 괴물이 나오는 장면들이 비교적 보기에 괜찮은 데 비하면, 이 거인 괴물을 조종하는 외계인들의 모습은 매우 누추 합니다. 은박지와 은칠한 잡다한 집기로 우주선의 모습과 외계인을 꾸몄는데, 외계인이라는 게 청소용 양동이를 뒤집어 쓴 고무 앞치마 입은 멸치 장수 처럼 보여서, 그걸 외계인이라고 상상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Amazone Women on the Moon" 같은 영화에 나오는 일부러 누추하게 옛날 SF 영화를 따라해서 웃기려고 만들어 넣은 장면들 보다 오히려 더 누추 합니다. 이 바닥에서 허구헌날 언급되는 영화인 "Plan 9 from Outer Space"등과 충분히 맞먹고 남을만 합니다. 특히 이 영화는 이 외계인들이 당대의 인기 배우인 "남궁원", 명배우 "박암"등과 진지하게 나와서 대립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 누추함이 눈에 뜨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종반으로 가면 스스로 이 모든 것이 극장에서 즐겁게 즐기는 "쇼"일 뿐이라는 점을 스스로 짚고 넘어 가고 있는 영화 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상황을 스스로 농담거리로 삼는 듯한 뭉개지는 헛웃음거리를 많이 갖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래 놓고 보면, 조악하기만한 솜씨 없는 외계인과 우주선 묘사도, "그래, 우주선 장면은 대체 어떻게 찍었나 보자" 싶어서 구경하고 넘어갈만한 흥취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 영화 내용을 발라내자면 아주 간략한 대립 구도와, 흥미거리가 되는 인물 한 두 명을 소개해 주고 바로 확 "마지막 무기"를 터뜨려서 끝내는 뼈만 있는 구도 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야, 짧게 나오는 외계인들의 누추함이야 그것만으로는 전체 영화를 크게 망치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외계인의 사실감이 부족했다면 차라리 화려하고 요란하게 시선 끌도록 이상하고 재밌게 보이는 모양으로 밀어 붙였다면 더 좋겠다 싶긴 합니다.


(서울 습격)

정말 이 영화를 이상하게 주저 앉히는 것들은 이런 단촐한 핵심 보다는 그걸 부풀려 늘리려고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술수 들입니다. 가장 큰 것은 이 영화에 대거 들어 있는 가히 지구 바깥 외계에서나 통할 듯한 이상한 코미디 장면들입니다.

이 영화에는 젊은 시절 송해 -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말입니다. - 와 그 친구 김희갑이 나오는 코미디 장면이 있습니다. 내용은 갑자기 서울을 습격한 거인 괴물에 놀라서 너무 겁먹은 두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경박하게 무서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양을 보면, 영화 이야기에 어울리게 각본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재미난 장면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런 상황을 던져 주고, 두 사람이서 별 말 되는 소리 없이 계속 이런저런 웃긴 표정을 지으면서 주섬주섬 시간만 때워 담는 것입니다. 한 대목을 살펴 보자면, 두 사람은 무서워서 떨고 있는데,

"너 그런데 그 손은 왜 떨고 있냐?"
"누가 누가 손을 떤다고 그래? 내가 무서워 하는 줄 알아?"
"그럼, 아니냐? 이것 봐라 다리도 떠네?"
"떨긴, 떠는 건 너 아니냐? 이 놈아. 날 잡은 네 손이 떨리고 있잖아."
"누가 떨긴 떤다고 그래?"
"네가 지금 저 괴물이 나타난 게 무서워서 떠는 거 잖아?"

이런 대화를 만담투로 무던히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냥 한 번 하면 다 알아 듣지 않습니까? 왜 한참 이러고 있는 겁니까? 티격태격 하면서 웃기려면, "티격" 하고 나서 "태격" 해야 티격태격이지, 이 영화에서는 그냥 계속 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티격 입니다. 처음부터 왜 웃긴지도 알 수 없는 부분인데, 수 분 동안 별 변화도 없이 그저 자꾸 반복만 합니다. 듣다 보면, "이제 좀 그만 좀 하지" "이미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뭘 아직도 이걸 웃기답시고 반복하고 있나?" 하는 마음이 관객들의 마음 속에 피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여러번 겹쳐 하는 동안에도 계속 저러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 두 사람은, "괴물이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를 두고 내기를 하면서, 가진 돈과 "마누라"를 걸기도 하고, 내기의 결판이 나자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아내를 찾아가서 끌어 안으니, 아내가 욕을 하고, 그러는데 갑자기 그러고 있는 집 자체가 거인 괴물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등 괴이한 "웃기는 장면"이 난데 없이 줄줄 떨어 집니다.

이런 내용은 최소한의 인성으로 좀 가다듬기만 했어도 그래도 어울릴 수는 있었을 겁니다. 거인 괴물이 나타났고, 미리부터 혜안을 갖고 있던 용사의 말을 따르지 않아 사람들은 피를 보고, 거인 괴물 때문에 벌어진 재난에 도시 이곳저곳에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련에 시달리고, 그러면서 도시가 박살 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러다가 절정 장면에서 모두가 하나로 모이며 결전을 벌이는 전체적인 틀이 그런대로 남아 있는 영화 였습니다. 60년대에 찍은 영화이기 때문에 한복을 입고 우주에서 내려온 거인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거나, 괴물을 피하기 위해 좁디 좁은 방공 시설에 옛날식 방공 훈련 분위기로 시민들이 숨어 있는 정경 등은 이런 부분을 잘 잡아낸 것이기도 했습니다. 서울 함락의 공포 앞에서 서로 탈출하려고 트럭 뒷칸에 올라타고자 치사하게 발버둥치며 싸우는 시민들의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결혼식날, 신랑이 결혼식에 늦은 것도 아니고, 신랑 옛 애인이 애를 업고 나타난 것도 아니고, 아파서 결혼을 미루는 것도 아니고, 허탈스럽게도 "우주 괴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결혼식을 못하게 된 여자 주인공의 사연이 나오는 데, 이것이 천연덕스럽게, "낭군을 잃은 신파극 여주인공"투로 연출되어 있는 것 하며, 묘하게 어긋나는 구식 연출이 오히려 재미를 더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틀은 썩 튼튼한 대신에 거기를 채워 넣어서 상영 시간을 늘리고 있는 것이란, 고작 허랑방탕한 막만든 농담 때우기 장면들이란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난데 없이 다른 이야기를 툭 끊고 나오는 이야기 중에, 신문지 찾아 다니는 남자가 보여주는 코미디가 있습니다. 이것은 "더러운 짓을 하면 하여간 웃기다"라는 어긋난 신념에 의해 뭘 어쩌자는 건지 추리력을 동원해야만 하는 농담을 꽤 패배감 느껴지게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렇게 소재를 처음에 잘 고른 것과 무성의하게 막 밀어 붙여 키워낸 것이, 서로 엉켜 떡진 모양을 아주 상징스럽게 보여주는 인물이 한명 있습니다. 바로 "양아치" 어린이 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뜻의 양아치입니다. 주로 한강변 등지에서 집 없이 살면서 남들이 버린 것을 주워서 생계를 버티고 버린 옷을 입고 펑크 음악과 록큰롤, 미군 문화를 막 따라하던 어린이들 말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 "양아치" 어린이는 사실상 주인공을 능가하는 비중을 갖고 있습니다.

명목상의 주인공으로 공군 조종사이며 우주 괴물과 싸우는 남궁원이 나옵니다. 하지만, 남궁원보다 더 많은 장면에서 이 양아치 어린이가 등장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에도 더 많이 나옵니다. 남궁원이야, "괴물을 미사일로 폭격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다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한 박암 사령관에 의해 직위 해제 되었다가 몇차례 "출격을 허가해 주십시오" "안돼" "허가해 주십시오" 안돼"만 그대로 반복 하는 게 역할 전부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영화 끝날 때 되니까 "으으으음... 출격 하게" 하는 바람에 출격해 버립니다. 심심하고 답답합니다. 더군다나 막상 공격을 해보면 지극히 "외과수술적인" 공격을 시도 하는 것입니다. 뭔 핵탄두 미사일 공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더니.


(사령관 박암과 조종사 남궁원, 신중한 전략과 적극적 공격을 주장하며 갈등을 빚는다 - 라는 게 소재이지만, 영화에 표현된 내용은 "출격을 허락해 주십시오" "안돼! 너무 위험해!"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그래 출격해..." 이것 뿐...)

그에 비해 이 양아치 어린이는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데 부터가 시적인 풍모가 있습니다. 우주 괴물의 습격으로 서울 사람들은 모두 피난 가 버렸습니다. 양아치 어린이는 피난 갈 곳도 딱히 없거니와, 어차피 막살던 목숨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빈집에 들어 가서 남아 있는 음식을 푸지게 먹고, 신나게 음악을 듣고 부자처럼 삽니다. 양아치질 하면서 걸식하면서 사느니, 곧 죽더라도 한번 영영 누리지 못할만큼 누려 보자는 겁니다. 텅빈 도시에 남은 마지막 남루한 사람. 인류 멸망 이후를 다룬 SF 영화에 나오는 중심 소재 그대로 입니다. 전혀 처연하게 연출되어 있지도 않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지도 않고, 그냥 방정 떠는 아역 배우의 재롱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만, 그래도 그 등장만으로도 재미거리가 되는 이야기 였습니다. 아역 배우의 연기도 성실합니다.

자, 그런데, 이 양아치 어린이의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과정이 가관입니다. 양아치 어린이는 빈집에서 과일을 깎아서 푸지게 먹으며 놀고 있습니다. 그러자 우주에서 온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난리가 더욱 위태롭게 다가 옵니다. 속세의 경지를 넘어선 우리의 주인공 양아치 어린이는,

"사람들은 참 한심해. 저까짓 괴물이 뭐가 대단하다고."

라고 과하게 명랑한 60년대 성우 후시 녹음 더빙 목소리로 말합니다. 60년대 성우 후시 녹음 더빙 영화가 맞으니까 뭐 딱히 다르게 말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대뜸 다른 것도 아니고 과일 깎아 먹던 과도를 연극적으로 집어 쳐들며,

"내가 이 칼로 괴물을 죽여 버릴거야."

라고 합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이 양아치 어린이의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 과도로 괴물을 죽이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면, 양아치 어린이는 괴물이 공격하는 틈을 타서 괴물의 몸에 기어 올라가고 괴물의 귀로 들어 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과도로 괴물의 고막을 찢고 들어가서 괴물의 콧구멍으로 기어 들어 갑니다. 괴물 콧구멍에서 양아치 어린이는 저 놀라운 괴물 콧털에 매달려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 보는 장면을 연출 합니다. 그러다가, 괴물의 몸 한쪽에 붙어 있는 이상한 장치를 보고,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외계 우주선이 괴물을 조종하는 기능을 하는 그 장치를 양아치 어린이는 해체 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괴물이 혼란에 빠져서 엉겁결에 승리를 이룬다는 겁니다.

때마침, 괴물의 손 위에 붙잡힌 여자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하필이면 결혼식에 이 난리가 일어나 결혼이 망한 여자 주인공이었으며, 하필이면 또 조종사 남궁원은 그 여자 주인공의 신랑감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옛 한국영화 속 세계의 오묘한 이치에 따라 왜인지 여자 주인공의 옷차림은 이리저리 좀 찢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괴물이 쓰러지게 되면서 여자 주인공은 괴물에서 떨어집니다. 여자 주인공의 위기. 그러나, 뭔가 화면이 휘리릭 하더니, 비행기가 폭파되어 낙하산으로 내려오고 있던 남궁원이 여자 주인공을 붙잡아 채고 내려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여자 주인공을 잡아 챌 수 있는 지 보여 주지도 않고, 낙하산이 어디서 어디쯤 내려오는 지 보여주지도 않다가 확 그냥 그렇게 잡아 챈 결과만 보여 줘 버리고 마는 이 말도 안되는 행복한 결말을 두고, 우리의 양아치 어린이는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를, 신명나는 목소리로,

"이래야 이야기가 되지!"

라고 마치 어리벙벙한 관객의 허망감을 가슴으로 안아주기라도 하듯 실제로 읊어 준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주 괴인 왕마귀"는 "서울에 우주에서 온 거대한 괴물이 나타난다면"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별 투자 없고, 별 대단한 기술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 거리들을 쓸어 담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상투적인 모양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합니다만, 그래도 그런 만큼 모양이 마구 무너지고 있지는 않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트래쉬 무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막만든 해괴한 장면들과, 꽤 재미나 보이는 이야기 거리들이 이상하게 뒤섞여 웃음을 자아냅니다. 스티로폼과 종이를 이리저리 붙인 동굴 모양의 "외계인 콧구멍 속" 세트처럼, 저예산으로 대충 꾸미려고 한 티가 아주 뻔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구경거리는 되어 주었습니다.


그 밖에...

컬러 영화도 아니고, 괴물의 모습도 개성이 부족해서 괴물 구경하는 재미는 조금 적습니다만, 대체로 "대괴수 용가리" 보다는 좀 더 정상적인 영화로 보였습니다. 오십보 오십일보 이긴 합니다만.

중간에 보면, 서울에서 무슨 박람회가 열리고 있는데 90년대라는 표어 같은 것이 보입니다. 이걸 보면, 이것은 아마 60년대에 나온 이 영화가 미래 90년대의 서울을 그린 영화 아닌가하고 짐작해 봅니다. 90년대도 지금은 10여년전의 과거가 되었습니다. 하여간 이 영화에서 미래스러운 시대상이 묘사되는 부분은 군복이 이상한 번쩍거리는 은박 재질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면 조금도 없습니다.

1970년에 동아일보에 실린 TV방영판 소개에 의하면 이 영화의 괴물은 인간의 200배 크기이며, 감마성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합니다. 신문광고에는 인간의 500배 크기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원래는 인간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난폭한 괴물인데, 외계인 우주선에서 지구로 보내면서 특수 기술로 거대화시켜서 난동 부리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 역시 일본의 "울트라맨"등과 닮은 점을 찾게 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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