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는 단편집 단행본 분량으로 나온 잡지 "에스콰이어" 한국어판 2011년 10월호 별책부록 입니다. SF 단편선인 까닭으로 9명의 작가들이 각각 한 편씩 소설을 써 내서 모아 놓은 모양으로 꾸려져 있습니다. 신작이 많고, 다른 곳에 이미 실렸던 적이 있거나 공개된 적이 있는 이야기들이 조금 있는데, 정리해 보자면 수록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곽재식 -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신작)
김보영 - 진화신화 ("진화신화" 게재작)
김창규 - 카일라사 (신작)
박성환 - 얼음, 땡! (신작)
배명훈 - 발자국 (신작)
윤이형 - 오보에가 있는 토요일 (신작)
이수현 - 안개 속에서 (웹진 거울 게제작의 개정판)
정세랑 - 모조 지구 혁명기 (웹진 거울 게제작)
정소연 - 앨리스와의 티타임 (HAPPY SF 2호 게재작)

이 중에서 제가 이야기 해 볼만한 것은, 제가 앞뒤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입니다.


(앞표지)

"멀티버스"는 약간 급하게 진행된 기획이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뭐든 아무렇게나 갖다 붙여야 하는 황당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이미 써놓았거나 다른 곳에 소개된 적이 있는 다른 글을 다시 싣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한 일정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애초에는 새롭게 뭘 하나 쓰느니 보다는 이전에 이미 소개 되었던 것을 실었으면 했습니다.

"에스콰이어"는 만 부 단위로 인쇄를 하는 잡지인 까닭으로, 이 별책부록을 누가 읽을지는 둘째치고 일단 발행 부수 자체가 종래의 환상문학, SF 단편집 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왕에 이야기를 싣는다면 꽤 인상이 깊을 만한 좀 좋은 것을 내보자는 생각이 들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금 실린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이 아니라, 웹진 거울에 공개되어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었던 "달과 육백만 달러" (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g_short&no=314 ) 정도가 송고 되었습니다. 이정도면 분명히 SF 소설이면서도, 줄거리나 갈등구조는 적당히 색다르면서도 재미로 봐도 꽤 재미난 이야기로 보일만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이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에스콰이어에서 나왔습니다. 중요한 이유인즉 원래 에스콰이어 독자층이 SF 소설 독자층과 별로 겹치는 바가 없느니 만큼, 별책부록을 받아 들고 읽었을 때, SF 소설이라고 할 때 쉽게 기대할만 한 바를 확 만족시켜 주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기에, "전형적인 SF 소설"을 하나 새로 만들기로 했고, 그렇게 해서 새로 쓰게 된 이야기가 바로 지금 실린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입니다.

이러한 사연으로 우선은 일단, 아늑하고 기분 좋은 분위기를 끌어 내는 첫장면을 한 번 꾸며 보려고 했습니다. 문득 생각 나는 대로, 조용하고 안락한 옛 저택의 널찍한 서재를 배경으로 잡았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별 특징이 없을 테니, "서재"와 관련해서 그냥 이 소리 저 소리 해 볼만한 건수를 궁리해 봤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옛 저택의 널찍한 서재를 흉내낸 커피 파는 가게에는, 그런 서재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가게에 있는 책꽂이에 아무 책이나 영어나 불어로 된 책을 막 꽂아 놓는 곳도 있다는 것을 배경으로 덧붙였습니다. 이런 곳에 남녀 주인공이 들어 서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배경과 중심소재가 따로 놀기보다는 어울리는 편이 마땅하니, 이런 배경에 자연스럽게 가장 잘 어울리는 소재로 당연히 "책"을 골랐습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여자 주인공이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두터운 책을 들이미는 것이 출발 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문득 여자 주인공이 들이민 "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야기이되, 전형적인 SF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생겼습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 입니다만, 애초에 결말 짓기 직전까지는 이야기 제목도 아예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용을 짜내는 데는, 2000년대 초반에 듀나의 SF 단편 소설에서 자주 보인다고 느꼈던 수법을 갖고 와서 써먹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고전 SF 소설에서 몇 차례 거창하게 써먹어서 이제는 진부해진 반전 결말을 하나 고릅니다. 예를 들면, "알고 보니 모든 것은 가상 현실이었다."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의 전문가인 나 자신 역시 기억이 조작 당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바로 로봇이었다" "머나먼 우주 저편의 행성이라고 생각했던 이상한 곳이 다름 아닌 지구였다" 뭐 이런 것들 말입니다.

이런 결말을 대뜸 이야기의 초반이나 중반에 나오게 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 신기한 "반전"이 미치는 충격 때문에 생기는 여러가지 다양한 상황을 보여주고, 신기한 사건의 세세한 활용 방법, 그것을 악용하려는 사람들,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사회상의 변화, 뭐 이런 것들을 이리저리 엮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결말내기 위해 듀나가 자주 사용하던 것은, "이러다보니 도대체 왠갖 혼란이 다 일어나고 꼬이는 일은 계속계속 막꼬여만 가서 엉망진창 수수께끼가 더 커져만 간다"는 것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충격적인 반전으로 장엄하게 끝나던 이야기를 가져 와다가, 주절주절 그 뒷이야기를 달아서 오히려 뒤숭숭하고 알쏭달쏭한 여운이 남기는 이야기로 바꿔서 때워 버리는 겁니다.

예시를 들자면, 가장 좋은 사례는 듀나의 "태평양 횡단특급"에 생긴 "꼭두각시들" 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외에도 그 무렵 듀나의 단편 SF 소설 중에는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들이 꽤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이렇게 하면, 좋아하는 SF 소설들의 세계에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 빠져 보기도 좋고, 그러면서 은근 슬쩍 같은 소재나 주제를 다룬 다른 이야기에 대해 느꼈던 불만을 표출해 보기도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쓸데 없이 공룡시대나 먼 미래로 가서 고생 하는 짓은 안하고, 10분전, 20분전만 왔다갔다하면서 주식 단타 매매나 열심히 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그런 이야기를 풀어 놓기 좋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역시 같은 수를 쓴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큰 단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소간 쓸데 없어 보이는 연애 이야기와, 그 연애이야기로 끝맺음을 막아 넣은 모양 입니다. 소재 자체는 납득할만하다고 생각 합니다. 편안해 보이는 서재가 있고, 두 남녀가 3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 동안 남자는 우여곡절을 많이도 겪었고, 여자는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연애 이야기가 나올만도 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이 연애 이야기 속에 내용의 중심을 뚫고 지나가던 줄거리와 직접 연결되는 갈등 구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연애 이야기가 중심 내용의 필연적인 결과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도 서로 무슨 딱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나마 이 연애 이야기가 발휘하는 효과라는 것은, 지나치게 장중해지고 무거워진 중반부 분위기를 마무리에서 조금 밝게 웃고 넘어 가는 느낌으로 꾸민다는 것 정도 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위해서라면, 너무 장황하게 묘사를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쓸데 없이 주인공에게 연애 이야기에 대한 갈등을 집어 넣지 말고 다른 소탈한 방법으로 분위기를 밝히는 것이 더 나았다고 생각 합니다. 기왕에 연애 이야기를 넣는다면, 이보다야, 중간 부분의 갈등을 좀 더 입체적으로 잘 꾸미고, 여자 주인공에게 다른 역할을 더 많이 맡겨서 연애 이야기 자체가 중심 줄거리와 잘 이어지도록 해내는 것이 더 옳았다고 생각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의 우주여행" 단편집에 실린 "그녀를 만나다" 처럼 연결하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라는 것 입니다.


(뒷표지)

그 외에도 지면 제약 때문에 무리하게 깎아 내다 보니, 문장 연결이 어색해진 부분이라든가 답답하게 상투적인 표현을 쓰고 말아 버린 부분도 좀 눈에 뜨이는 구석이 있고, 더 이야기 거리가 많은 부분을 겅중 거리며 너무 빠르게 넘어 간다거나, 좀 더 읽고 상상하기 재미나게 풍성하게 묘사하고 설명해 줘야 할 부분도 건너 뛰고 짚고 내달리는 듯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다른 기회에 좀 더 가다듬으면 그나마 조금은 더 나아 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은 듀나가 한 때 많이 쓰던 줄거리 수법을 한 번 그대로 따라가 보는 아류작의 재미가 완연한 이야기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면서, 주제를 밀고 나가는 모양이나 묘사 방법, 이야기 세부에는 다른 개성이 있어서 봤던 것들을 또 본다는 지루함은 어느 정도 덜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생각 합니다. 적당한 분량이 있는 이야기에서 한 꺼풀 한 꺼풀, 한 단계 한 단계 뚫고 지나가는 구성이 있고, 그 가운데에 지루함을 덜고 경쾌하게 읽을 만하다는 것은 그래도 장점이지 싶습니다.


그 밖에...

내용 중에 "유놈 프로젝트"라는 말이 나오는 데, 유전자(Gene)에서 나온 말이 게놈(Genome)인 것 처럼, 우주(Universe)에서 나온 말로 꾸며 본 말이 유놈(Unome) 이었습니다.

말미에 보면 뜬금 없이 "류 이론"의 "포화 정리"라는 것이 나오는 데, SF 동호회 등에서 무척 인기 있었던 류기정님의 소설 "Simulation Saturated" 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상황을 두고 조금만 더 고민하다 보면, 류기정님이 소설에서 지적했던 문제가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에스콰이어" 잡지 중에도 실려 있는 내용 입니다만, 담당 편집자 께서 SF 소설 단편선을 잡지에 수록해 보자는 계획은 10년 가까이 주장했지만 번번히 퇴짜만 맞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너무도 쉽게 이번에 "상부의 허가"가 떨어지는 바람에 일정이 부족했지만 혹시라도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진행한 건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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