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시픽 림(Pacific Rim, 2013)

2013.07.18 18:39

hermit 조회 수:6906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제가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입니다. 특유의 덕후 기질도 저와 잘 맞고(잭 스나이더,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더불어 덕후 삼신기!--!) 특히 이 양반의 미술적 감각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답죠. 특히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비주얼이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브라질' 시절 테리 길리엄 정도가 분위기에서 좀 비슷했으려나요.

 

어쨌든 이 양반이 한동안 공들였던 '광기의 산맥' 프로젝트가 결국 좌절되었을 때는 저 역시 크게 좌절했다가, 뜬금없이 무려 거대 메카물을 찍는다고 했을 때 엄청나게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고편이 공개될수록 기대감 상승... 결국 개봉 첫주 역시 이 영화를 손꼽아 기다리던 친구와 함께 IMAX 3D로 감상...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고지라'로 대표되는 일본 거대 괴수물과 마징가로 대표되는 메카물, ‘울트라맨이나 전대물로 대표될 특촬물 장르에 대한 거대한 오마쥬입니다. 허술한 이야기와 식상한 장면들이 넘쳐나지만 장르 클리셰로 이해해줘야 하고, 논란이 많은 여주인공 역시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좀 너그러워집니다. 비주얼부터 성격까지 80~90년대 전대물에서 전형적인 핑크 포지션 아닙니까?;;(비주얼은 핑크보다 '악의 여간부' 쪽에 가깝기도...)

 

여하튼 이 영화에서 세세한 것 따지면 지는 겁니다(...) 그저 IMAX 대화면을 가득 메운, 쇳덩이 느낌 물씬 나는 거대 메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유조선을 한손에 쥔 채 도심 한복판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뒤 카이쥬에게 죽빵 날리는 장면에서 입을 쩍 벌리면 되는 거에요. 최신 그래픽에 의해 현실화된 거대 메카와 괴수의 전투를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유일한 목적이요 가치입니다. 이런 면에서 누군가 말씀하신 로봇 포르노라는 비유는 썩 적절합니다. ‘울펜슈타인을 만든 1세대 FPS의 거장 존 카멕은 게임에서 스토리란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 있으면 좋겠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다.”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이 영화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에 이야기가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메카닉 덕후라 해서 설정과 스토리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오히려 이런 것들에 대해 가잠 꼼꼼히 따지고 드는 게 진성 덕후들이죠.),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볼거리와 스토리에 배분해야 한다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는 자명한 영화입니다. 단연코 볼거리죠. 이 영화의 목적은 애초에 영화제 작품상 따위도 아니고 일반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아닌, 덕후들을 지리게만드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런 선택과 집중의 결과인지, 영화의 비주얼만큼은 다른 모든 단점들을 잊게 만들만큼 굉장합니다. 그리고 이 시각적 충격은 스크린이 클수록, 자리가 앞자리일수록 더 배가될 것입니다. 예고편부터 거대함을 강조한 영화답게 극단적인 로우앵글이나 하이앵글 샷이 심심찮게 쓰이는 편인데, 스크린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앞자리에서 실제로 고개를 들어 거대한 예거를 올려다볼 땐 거의 경외감마저 듭니다. 물론 앞자리에 앉으면 그만큼 시야각이 좁아지고 빠르게 화면이 바뀌는 액션 장면을 쫓아가기 어렵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 예거와 괴수의 거대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델 토로는 확실히 거대 메카물의 로망이 무엇인지 꿰뚫고 있는 사람입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에 투하된 예거가 파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이라든지, 수많은 고층건물과 창을 박살내며 카이쥬와 격투를 벌이는 모습이라든지, 도심 한복판으로 유조선을 질질 끌고 와 카이쥬를 후려갈긴다든지(게다가 이딴 터무니없는 짓을 하면서도 까짓거 별거 아니라는 듯 오만한 발걸음) 하는 장면 등은 오직 거대 메카 vs 거대 괴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스펙터클이죠.

 

날렵함보다는 투박함과 육중함이 느껴지는 예거의 디자인이나(스트라이커 유레카만 좀 날렵) 집시 데인저의 엘보우 로켓, 브레스트 파이어를 너무나도 넣고 싶었지만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힌 감독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는 스트라이커의 가슴미사일 역시 메카 덕후의 피를 끓게 하는 요소입니다.(결국 집시 데인저의 터빈 열 방출공격으로 슈퍼로봇의 로망 달성) 특히 출격을 앞둔 집시 데인저의 머리가 불꽃을 일으키며 내려와 몸체와 철컹거리며 합체하는 부분은 머릿속에서는 뭐하러 탈착식인 거야?--a’란 의문을 가지면서도 가슴 속에서는 그래! 거대 메카라면 당연히 합체지!’를 외치게 되더군요.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무척 아쉬웠던 게 메카들의 움직임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는데, 예거들의 움직임은 실로 육중해 마음에 듭니다. 뭔가 거대한 피스톤이나 베어링들이 움직이는 느낌도 잘 살아있고요.

 

물론 이 영화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단점들을 장르 클리셰라 너그러이 넘어가려 해도, 빠심으로조차 실드 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죠.

 

일단 카이쥬의 강력함이 두드러지지 않아 좀 아쉽습니다. 엄청나게 크고 힘 좋은 건 알겠는데, 이게 과연 핵을 제외한 현용 병기로 감당하지 못해 예거 같은 메카를 만들어야 할 수준인지는 모르겠어요. 수백 톤 짜리긴 해도 예거의 맨주먹이나 대륙간 탄도 크기의 가슴 미사일 정도로 때려잡을 수 있는 게 카이쥬인데, 솔직히 이 정도면 굳이 비싼 예거 투입할 필요 없이 폭격기 몇 대나 크루즈 미사일 수십 발이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지금은 전투기가 나와봤자 눈앞에서 기관포나 몇 발 깔짝대다가 고지라에게 잡혀죽던 시절이 아니에요. 수십 km 밖에서도 레이더 화면을 보며 비디오 게임하듯 요격하고, 폭격기 1개 편대면 핵이 아니더라도 왠만한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과 정확도를 갖춘 무기들이 넘쳐나죠. 퍼시픽 림의 카이쥬가 현용 병기의 높아질대로 높아진 수준마저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개소리지만 카이쥬 주변의 전자파 때문에 열이나 레이더 추적이 안 되어 꼭 근거리에서 직접 보고 쏴야 한다든지, 아니면 카이쥬는 실드를 가지고 있어 폭발이나 관통무기로는 피해를 주기 어렵고 무지막지한 질량에 의한 물리적 타격만이 먹힌다든지 하는 설정이라도 넣어줬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프랭크 허버트의 에서도 실드 때문에 총이나 레이저가 무력화되고 덕분에 우주시대에 칼싸움을 벌이는데, 사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상당히 설득력 있잖아요?

 

그리고 상대가 안 될지언정 대규모 군대가 출동해 세금낭비+폭죽의 소임을 다하고, 현용 병기의 무력함 + 거대 괴수의 강력함을 부각시키며 그에 맞서는 주인공 메카의 등장을 위한 포석을 깔아주는 것이 이 장르의 고전적인 클리셰인데, 퍼시픽 림에서는 예거에게만 전투를 일임하고 군대는 코빼기도 안 비치는 등 이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 알아요. 제작비 때문이었겠죠..._델 토로 감독도 현재 쉩터돔은 정부로부터 분리된 레지스탕스나 다름없는 상태라 군대의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처지라고 변명하고 있고요. 그래도 아쉽긴 합니다.

 

, 카이쥬가 나타나는 브릿지의 위치도 정확히 알고 있고, 카이쥬의 출현 주기도 꽤 정확히 예측 가능한데 왜 연안까지 오도록 방치하는지도 약간 이해가 안 되는 요소입니다. 어차피 지금 인류의 처지가 해양 오염 따위를 걱정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브릿지 입구에 핵기뢰라도 설치해 카이쥬가 나타나는 즉시 제거하는 게 나을 듯 한데 말이죠. 또 물속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카이쥬와 달리, 이족보행형인 예거에게 시야와 움직임이 제한되는 물속은 최악의 전장인데 차라리 상륙하도록 냅두고 빨리 때려잡는게 낫지 굳이 연안 바다에서 불리한 전투를 벌여야 할지...=_=

 

마지막으로 집시 데인저와 스트라이커 유레카를 제외하면 나머지 메카들의 활약이 너무 적은 점이 아쉽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체르노 알파는 파일럿들이나 예거나 엄청 투박하면서도 강력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실제로 하는 일은..._그나마 크림슨 타이푼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게 위안이랄까요...=_=;; 스트라이커 유레카의 자폭공격 제외하면(투덜되는 아들 한센에게 나는 드리프트할 전부 비우고 탄다. 네놈만 잘 따라오면 돼, 애송이란 간지를 내뿜던 대장님이었건만 실제론 출격해서 자폭밖에 한 일이 없음...=_=;;) 집시 데인저 혼자서만 활약... 물론 보스는 주인공 용자의 몫이라지만 그래도 사이드 용자들도 밥값은 하게 해주셔야죠... 아무 활약도 못해보고 이리 허무하게 죽어버려서야 어디 완구 팔리겠어요?(실제로 현재 퍼시픽 림 완구 3종세트 중 크림슨 타이푼은 악성재고로 남아있고 집시 데인저만 광속 판매로 조기품절+가격상승 크리;;)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입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톤은 족히 넘을 예거인데 고작 헬기 8대 따위로 실어나르는 장면은 다른 의미에서 입이 떡 벌어지게 하기도 했고요...=_=;;(대당 100톤을 들어올리는 헬기의 수송력은 세계 제이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화면을 가득 메운 육중한 메카가 울부짖는 거대 괴수와 육박전을 벌이는 그 압도적인 시각적 스펙터클만으로 이 영화는 절 매료시켰습니다. 지금도 메인테마를 들을 때면 제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에요.

 

이 영화는 재미있냐 재미없냐로 평가할 영화가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있냐 받아들일 수 없냐의 영역에서 평가해야 할 영화죠. 다양한 관객층을 만족시킬 수 있는 웰메이드 상업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거대 메카란 말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두근거릴 덕후들에게 이 영화는 단연 최고입니다. 정말로 지리는영화에요... 델 토로 감독님 사랑해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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