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라고 물어보면 일반적인 대답 외에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만,

자고 일어나서 먹고,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때 되면 먹고, 누군가를 만날 때 기왕이면 맛있는 걸 찾아서 먹고, 역으로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하여튼, 먹는다. 거기엔 분명히 (김영삼 옹이 말씀하신 "먹어야 산다, 먹지 않으면 학실히 죽는다"를 넘어서) 탐식이 있다. 탐식.

여기서 할 일 없는 룸펜인텔리겐챠의 생각은 스노비즘과 동물화(철학적 의미에서의)에 대한 것으로 번진다. 커다란 이야기가 사라진 곳에서 자기 욕구에 충실한 작은 이야기를 탐하는 것.  스노비즘의 탐식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라는 내 내면의 욕구도 중요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도 무척 중요하다(혹은 더 중요하다). 그렇기에 먹는다는 것엔 "누구와 먹었다" 혹은 "어디에서 먹었다" , "어떻게 먹었다" 같은 이야기가 중요하게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동의를 구한다(혹은 자랑을 한다). 한편으로 동물화의 탐식은 그것과 다르다. "먹고 싶다", "먹는다"는 욕구 자체, 그것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는 그저 양념에 불과할 뿐이다.

후자의 "먹는 것"은 예로부터 "미련하다"와 "대단하다"의 사이를 오갔다. 뭐, 미련곰퉁이처럼 밥만 처먹는다든지, 아이고 참말로 복스럽게 먹는다라든지, 장닭 한 마리를 먹어치우는 것을 보아하니 장군감이라든지. (이것은 마치 바보와 장사壯士, 광인과 초인의 경계와 같다) 현재에 와서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미련하다 보다는 대단하다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위의 시선과 타인과의 관계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 먹을 것에 집중하는 행위를 보고 있자면, 예를 들어 하정우의 먹방이라든지, 윤후의 먹방이라든지, 그런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맛있겠다라든가, 나도 먹고 싶다 같은 생각보다는 먼저 감탄이 나오고 만다. 감탄. 보는 것만으로 감탄. 이런저런 배경이야기는 잊고 그들의 먹는 행위에 시선을 빼앗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엔 음식 드라마가 별로 없다. 유흥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회를 생각해 보면 참 의아하다. 물론 <여섯시내고향>류의 프로그램 같은 꾸준한 먹방의 전통이 있지만, 그래도 음식(조리와 탐식) 소재의 이야기는 아주 미미한 편이다. 그에 비해 옆나라 일본에서는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음식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이,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 바로 '먹방의 초인'이 등장하는 <고독한 미식가>라고 하겠다.

 

 

주연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 좀 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눈에 익을, 멀대 같고 약간 싱거운 느낌의 마츠시게 유타카라는 배우다. 시즌3이 방영중인 이 이야기는, 어, 말하자면 간단하다. 주인공 고로가 한 오 분 정도 간단히 영업을 하고, 나머지 이십 분간 먹는다. 다른 거 안 하고 먹는다. 혼자 묵묵히(물론 생각은 수다스럽지만) 먹는다.

파격이었다.

인간군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가득한 <심야식당>이 쓸고 간 자리에 깃발을 꽂은 것은 이야기 따위 우걱우걱 해버리는 고로 씨인 것이다. 이게 참 예전 같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드라마랍시고! 뭔 이런 바보 같은! 하는 소리 듣기 딱 좋았을 텐데. 이게 또, 먹힌다. 아무 맥락없이 먹기만 하는데도. 아까 얘기했다시피 바보와 장사, 광인과 초인의 경계에서 고로 씨는 시청자의 감탄사를 이끌어낸다. 시즌 파이널에서 화룡정점하듯이 고로 씨가 너무나도 맛있게 먹고 먹고 또 먹어치우며 기염틀 토할 때에, 역동적이면서도 (드라마 속 표현을 빌리면) 우주적인 분위기의 배경음악이 깔리며 고로 씨의 먹방을 초인적인 경지로 끌어올린다.

그렇다. 이야기에도, 타인과의 관계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묵묵히 "먹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 고로 씨는 그 순간 초인인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고독한 미식가> 시즌3을 보고 있는데, 거 참, 또 한 편의 동물화된 음식 드라마가 나왔다. 제목은 <먹기만 할게>.

정체불명의 여인이 등장, 말 그대로 등장하여 번민에 빠진 중생들과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우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다. 주연은 고토 마리코라는 가수. 식욕과 활력, 성욕을 단순하게 연결하는 약간 에로에로하면서도 귀여운 맛이 있는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인 듯하다. 그러니까 <고독한 미식가>에 에로와 귀여움을 끼얹은 듯한 그런 것. 차이가 있다면 고로 씨는 혼자 먹지만, 정체불명의 여자는 주변 사람 또한 먹게 만든다.

그럭저럭 재밌게 보고 있다. 보고 있는데, 이게 원작이 만화다. 넷공간을 돌아다니다가(듀게에서도 봤었는데) 언뜻언뜻 이름을 듣고 귀담아 두었던 만화. 그래서 만화를 샀다. 그리고 봤다. 아. 이것 참. 아무래도 만화쪽이 더 의미심장하다.

 

 

 

매화마다 다른 인물 하나가 번민에 빠져 있을 때 정체불명의 여자가 등장, 아무 말도 없이 막무가내로 밥을 해달라는(혹은 사달라는) 뜻을 전한다. 그리고 첫입은 살짝 야시시하게, 그리고 두번째 입은 복스럽게, 이어서 세번째 입은 먹는 것 자체와 물아일체 하여 텁텁텁 먹어치운다. 번민은 그 와중에 어느새 승화되고 만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여자는 홀연히 사라진다. 말도 없이. 드라마는 원작의 이 방식을 대체로 잘 따라한다.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참 안타깝다. 원작의 가장 강력한 부분을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고독한 미식가>가 자칫 미련하거나 한심할 수 있는, 아저씨가 밥 먹는 이야기를 생명력 넘치는 배경음악과 함께 초인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힘을 발휘하는데, <먹기만 할게>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먹기만 할게>의 원작에는 그 못지 않은, 아니 좀 더 큰 규모의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초인을 넘어서 신화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번민과 고뇌에 찬 인간이, 신에게 공양을 바치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나보다 큰 존재에게 바치고 마음에 안식을 찾는 것, 비록 현실에서 무엇이 변하지는 않더라도 그 현실을 견디고 이겨낼 힘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 아닌가. 만화의 정체불명의 여자가 정체불명인 것, 어디에든 불쑥 나타나고, 홀연히 사라지는 것, (이것은 만화에서 좋은 개그로 사용되지만) 한편으로 전형적인 신화의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만화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번민남은 연애 운세 문자를 받는다. "오늘 당신 곁에 여신님이 나타납니다.")

고로 씨는 혼자 묵묵히 먹어치움으로써 초인으로 상승하지만, 정체불명의 여자는 먼저 먹어보임으로 중생을 따라 먹게 하여 구제한다. 이로써 정체불명의 여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어디에든 편재하며, 오로지 먹는 행위 자체에 혼연일체하고, 만조창생과 함께 먹음으로써 신화의 경지를 넘나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드라마는 그것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드라마는 한정된 등장인물과 얽히고 섞여 한정된 이야기 속에서 약간 야시시하며, 제법 복스러우며, 미스테리해서 살짝 매력적인, 그 정도의 이미지에 갇히고 만다. 원작이 신화의 경지를 넘나드는,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일상은 신화화되고, 신화는 일상으로 내려온다.

대중문화에서, 그중에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장르인 음식드라마에서의 먹방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되도 않는 소리이고, 마지막에 오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었지? 하고 헷갈린다.

난처하고 그러니 오늘 점심 사진짤 투척.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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