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BBC Sherlock 2, 7-3, 7-4.

2012.02.05 20:02

lonegunman 조회 수:3284





7-3. 이중주 duet


왓슨의 정직한 얼굴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홈즈가 사태를 과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축소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막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왓슨은 사색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이므로, 곧장 이 난국을 타개하려 들었다

왓슨 : 내가 자넬 돕겠네, 어차피 며칠 동안은 할 일도 없었어

홈즈 : 양심도 없군, 왓슨. 이제 거짓말까지 하나? 요즘 자네에게 환자가 쉴새없이 몰려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 마자랭 보석



셜록 홈즈가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감정을 느끼고, 인간적으로 변해서, 인간 세상의 일원으로, 인간답게 살아간다면- 참 훈훈한 일일 겁니다. 주위 사람들은 좀 덜 시달릴테고, 관계는 한결 수월해질 것이며, 셜록 홈즈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삶과 생활의 일화들을 지켜보는 것 역시 우리에게 보다 버라이어티한 감정의 유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묻고 싶은 건, 그렇게 돼서 셜록 홈즈 자신에게 좋을 건 뭡니까?


해서, 셜록 홈즈를 인간화한다느니, 감정을 가르친다느니 하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못마땅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셜록 홈즈가 유사 연애를 하고, 형과 베프가 그 감정을 돌보며 지켜주고, 셜록 홈즈가 자신을 향한 짝사랑을 눈치채고, 그녀의 감정을 돌아봐주고, 셜록 홈즈가 친구의 상한 마음을 염려하고, 사과하며 애쓰고, 기타 등등. 특히 시즌2 1화에서 비춰진 셜록 홈즈의 변화를 처음 봤을 땐 경악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존 왓슨 덕에 인간 세계로 한 발 나와서 그 세계에 적응하며 물들어가는 셜록 홈즈라니. 존 왓슨, 무슨 짓이냐, 너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니거든?


막상 뚜껑을 열고, 시리즈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는, 작품을 보신 분들이라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겁니다. 셜록 홈즈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셜록과 존 두 사람의 관계를 지지하고 긍정하는 구경꾼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마틴 프리먼은 시즌1 촬영에 들어가며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존 왓슨은 셜록 홈즈의 도덕적 바로미터같은 존재'라고 분석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포지셔닝입니다. 존 왓슨은 셜록 홈즈의 내부에 침투해서 그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무척 신뢰할만한) 참고와 참조의 기준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전에서 왓슨이 스스로를 '나는 하숙집의 명물인 바이올린이나 새그 잎담배, 해묵은 검정 파이프, 색인집같은 존재였다.(기어다니는 남자)'며 탄식했던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그 탄식에 섞인 자기 비하와 원망의 색채만 걷어낸다면 그것은 홈즈-왓슨 관계의 정곡을 찌르는 통찰입니다. 바이올린, 새그 잎담배, 파이프, 색인집. 그 얼마나 필수적이고 중요한 아이템들의 나열입니까? 셜록 홈즈에게 대체 불가능하며 유의미한 존재임을 밝히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의 비교나 의미 부여가 필요합니까? 그걸 어떤 관계라고, 우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냐고요? 그게 흠이라고 생각한다면 셜록 홈즈 말고 다른 거 읽으면 됩니다. 멀게는 삼총사라든가, 배트맨과 로빈, 그것도 아니면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던가, 많지요.


무언가가 결여된 존재를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good'이라면, 그 결여된 존재를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단지 그 곁에서 그 결여로 인한 실수를 정정하고 메꿔주는 것은 'best'일 겁니다. 그게 우리의 두 주인공 사이에 형성된 관계가 위대해지는 지점입니다. 홈즈에게 왓슨은 천재성이 결여된 존재이고, 왓슨에게 홈즈는 인간성이 결여된 존재이지요. 비인간적인 범죄자들을 혐오하는 존 왓슨과, 지적으로 열등한 보통 사람을 경멸하는 셜록 홈즈 사이에 형성된 그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상호 존중이 위대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이 위대하겠습니까. 


극이 진행되며 감상적으로 기울 수 있는 손쉬운 오류에 빠지지 않고 그 관계의 핵심을 유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BBC 셜록에 박수를 보냅니다. 

시즌1 3화에서 결정적인 논쟁 ('생명을 담보로 한 거야, 셜록! 진짜 사람의 목숨 말이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그거 알고는 있어?' / '내가 그걸 신경쓰면 그들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나?' / '아니' / '그럼 앞으로도 그런 실수는 안하겠어' / '그게 너한테는 쉬운가보지?' / '매우. 여태 몰랐어?' / '아니' / '실망했나보네' / '잘했어, 아주 훌륭한 추론이야' / '애먼 사람 영웅 만들지 마, 존. 영웅은 없어. 영웅이 있다해도, 난 그 중 하나가 될 생각 없고') 이후 존은 셜록이란 인간에 대한 마지막 의혹을 떨치고, 인간성의 결여가 도덕성의 결여를 함축하지 않음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적이지 않아도 셜록은 도덕적으로 옳은 판단을 하고, 피해자를 연민하지 않아도 셜록은 피해자를 구하는데 목숨까지도 걸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셜록은 이미 첫 만남 이후 존의 반응 -의도치 않게 신상이 털리고 충분히 불쾌할만한 상황에서 나온- 을 통해 ('정말 놀랍군' / '그렇게 생각해?' / '당연하지, 천재적이야, 아주 비범하다고' / '남들은 보통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 / '뭐라고 하는데?' / '꺼져') 가치 판단이나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 공정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존의 비범한 능력을 간파했지요. 


그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진척된 두 사람의 세계가 시즌2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범죄를 반기고, 엉뚱한 순간에 환호하고, 타인의 감정에 무감하고, 자각없이 상처를 주는 셜록에게 비난의 뉘앙스없이 담백한 조언과 정정의 말을 던지는 존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말 잘 듣는 아들처럼 꼬박꼬박 그 조언에 따르는 셜록의 모습은 또 어떠합니까. 그러한 셜록의 태도는 우정이나 감정적 유대에 의한 순응이 아닙니다. 이미 범죄 수사가 아닌 인간 세계의 컨벤션에 대해선 셜록 자신을 포함한 다른 누구보다도 존이 한 수 위라는 걸, 존이 가장 공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걸 머리로 알고 수긍했기에 나오는 제스추어지요. 그렇습니다, 셜록은 감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이 시즌2에서 그린 캐릭터 설정 중에서 제가 가장 감탄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2화 '바스커빌의 개'에서 셜록과 존의 사과 소동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과하고, 추켜세우고, 사과하고, 사과하다, 그만 좀 사과하라는 면박까지 들으며 커피 셔틀을 해대던 셜록의 모습을. 거기서 조금이나마 셜록 홈즈의 진심을, 변화를, 감정적 성숙을 읽고 싶었던 우리를 그가 어떻게 배반했는지 말입니다! 커피 타는 모습을 근심스레 바라보다 그 모든 게 결국 임상 실험의 일부였음을 깨닫고나서야 오히려 안심하듯 '네가 한 짓이구나' 하고 넘기던 존은 또 어떻고요. 여기에 대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시청자는 셜록과 아이린의 감정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보았지만 존은 그렇지 않죠. 거슬리는 문자 알림음을 수개월간 바꾸지 않고 상황을 즐기는 걸 보면 아이린을 사랑하는 것 같다가, 침착하게 시신을 확인하는 걸 보면 아닌 것도 같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바이올린 삼매경에 빠지는 걸 보면 또 그런 것 같다가, 미국 망명으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도 무관심한 걸 보면 아닌 것도 같다가, 핸드폰 달라고 떼쓰는 걸 보면 또 그런 것도 같다가. 궁금할 법 합니다. 호기심이 들만 하죠. 그러나 존은 그 지점에서 셜록의 세계에 더 깊이 침범하지 않고 판단도 해석도 하지 않으며, 단지 그 모든 것을 미스테리로 남겨둡니다. 마치 '과학자의 두뇌로 탐정이 되었어, 이 사실을 통해 셜록의 마음을 무어라 추론하면 좋겠나?'라는 마이크로프트의 질문에 단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아주 심플하고 공정하게 말입니다. 아... 항복. 위대합니다, 위대해요.


누구도 존 왓슨 역에 마틴 프리먼을 캐스팅한 것이 헐리웃판의 주드로 캐스팅만큼이나 놀라운 발상이라곤 할 수 없을 겁니다. 시즌1의 리뷰에서도 밝혔듯, '마틴 프리먼의 캐스팅은 신선하다기보단 안전한 쪽에 가깝죠. 그가 한 대 맞은 듯한 벙찐 표정이나, 난처함과 민망함과 뻘쭘함과 어색함과 당황스러움과 수치심과… 기타 등등의 비슷비슷한 감정들을 때에 따라 미묘하게 배합하여 얼마나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연기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신선한 것은 캐스팅이 아닙니다. '진지한 얼간이'류에 정통한 그를 캐스팅해놓고,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릴 법하며 손쉽고도 편리한 '어리석은 존 왓슨' 해석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신선하죠.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원전의 열렬한 팬들이 제작한만큼, 셜록 홈즈처럼 존 왓슨도 단지 원전에 충실하게 표현된 것일 뿐이라고도 할 수 있을테니까요. 셜록 홈즈가 인정할만큼 선량하고 정의로우며 현명하고 공정한 관찰자 말입니다. 


다만, 충실한 원전의 초상보다 이후 세월을 타며 희극적으로 해석된 존 왓슨에 조금 더 가까워보이는 마틴 프리먼이기에 드라마판의 존 왓슨이 새삼 신선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1화의 죽은 줄 알았던 아이린 애들러가 등장한 순간 몇 초간의 정적 이후 '셜록에게 살아있다고 말해'라는 대사를 뱉기 전까지 보여준, 그 단독샷 속에서의 복잡한 표정. 혹은 2화의 바스커빌에서 셜록의 실험 대상으로 공포에 질려 있다가 '나도 그 괴물을 봤어!'라고 패닉 상태로 고함을 질러대는 연기같은 건 참 의외였습니다. 극 안에서 판단하자면 시청자에게 캐릭터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좋은 연기였고, 극 밖에서 판단하자면 '이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싶은 발견이었죠. 개인적으로 시즌1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좋은 연기자를 발견했고, 시즌2에서 그는 그 연기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마틴 프리먼의 경우, 시즌1이 그를 재발견하는 기회였다면, 시즌2에선 시즌1에서 보여준 것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7-4. 협주곡 concerto



<허드슨 부인>


홈즈 : 터너부인이 음식을 갔다 놓았으니, 슬슬 먹으면서 얘기하지

그는 우리의 하숙집 주인이 차려준 소박한 음식에 게걸스레 달려들었다

-보헤미안 스캔들


셜록 홈즈가 '터너 부인'이라 불러도 셜로키언은 '터너'라 쓰고 '허드슨'이라 읽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뭐, 꼭 그 이유는 아니지만) 캐릭터지요. 소위 히어로라는 자들이 지각없이 폭력을 휘둘러댈 때 환호하기보단 주로 뜨악해하는 저이지만, 아메리칸의 허드슨 습격에 대한 셜록의 폭주는 절로 흥이나더군요. 이러면 안 되는데.

사립 탐정-물론 셜록-을 고용하여 남편을 투옥시키고, 불륜의 주인공이 되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셜록의 핸드폰을 숨겨주고, 사람이 2층에서 떨어져도 화단 망가질 걸 걱정하는, 알고보면 가장 하드코어한 캐릭터입니다. 부디 221B의 핸드폰 사건이 원전 '빈 집'에서 허드슨 부인의 활약을 대신한 게 아니길 바랍니다. 그녀의 하드코어한 활약을 기대하는 건 제 나름의 시즌3 관전 포인트거든요.




<아이린 애들러>


애들러 : 내가 그 유명한 셜록 홈즈씨의 표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 남편과 저는 도망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주 무시무시한 적이 쫓아오니까. 내일 홈즈씨는 빈 둥지만 발견하게 될테지요

-보헤미안 스캔들


네, 논쟁의 핵, 폭풍의 눈, 아이린 애들러입니다. '더 우먼, 셜록 홈즈를 한 방 먹인 여자다' '먹이긴 뭘 먹이냐, 과대 평가된 거다' 고리적부터 그녀의 존재에 대한 의견이 셜로키언 사이에서도 분분한데 어찌 논쟁이 없기를 바라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더 우먼'파고,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태껏 그 어떤 리메이크판에서 등장한 아이린 애들러도 100% 맘에 든 적이 없었습니다

BBC 셜록에선 고위층을 대상으로 한 성노동자로 그녀의 직업을 설정합니다. 원전에 그렇게 해석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배우라는 직업, 고드프리 노튼경과의 사랑 등 잔가지를 다 쳐내고 '셜록에게 반한, 셜록에게 끝없이 성적인 농담을 던지는, 상류층 콜걸'이라는 설정이 캐릭터의 핵심이 되고나니, 반발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 돼버렸습니다.

배우도, 캐릭터도 매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하필 '아이린 애들러'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갖다 붙인 것이 패착이라면 패착이겠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실 시즌2 1화의 '아이린 애들러'는 '셜록 홈즈의 미공개 파일 the private life of sherlock holmes'이라는 영화의 '일자 폰 호프만슈탈'의 캐릭터에 훨씬 더 가깝죠. 아무래도 작가들이 원전의 팬으로서 셜록 홈즈를 한 방 먹인 '아이린 애들러'를 등장시키고 싶기도 하고, 영화판의 팬으로서 뇌쇄적인 '일자 폰 호프만슈탈'을 써먹고 싶기도 한 마음에 둘을 섞어버린 것 같은데- 결론적으론 아주 훌륭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가 캐릭터 해명 인터뷰까지 해야할 정도였으니, 두 캐릭터의 결합은 혼란만 가중시킨 격이죠.




<레스트레이드>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일등 객차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악수로 그를 맞았다

홈즈를 바라보는 레스트레이드 형사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어려있었다

-바스커빌가의 개


시즌1에서 못마땅해하면서도 셜록의 능력을 인정하고, 지적으론 당하지 못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에선 어른스럽게 꾸중하기도 하는 레스트레이드의 캐릭터 설정은 꽤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특이한 논리 기계가 아니라 괴물, 싸이코패스로 해석되며 대치 상태에 있는 세계와 셜록 홈즈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캐릭터가 있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시즌2에 와서 원래 레스트레이드가 담당하고 있던 상당 부분을 존이 흡수하고 나니, 정작 레스트레이드의 캐릭터가 좀 애매해진 경향이 있습니다. 시즌2 2화에서의 등장도 반갑기는 했으나, 기능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지는 느낌이 강했지요. 그러니까, 문제 제기는 계속 비슷한 궤도로 반복됩니다. 시즌1이 구축해놓은 세계와 등장 인물들이 스토리의 논리에 따라 기능적으로 이용되는 듯 보인다는 것. 어차피 만들어진 이야기란 게 다 그렇다 해도 그걸 계속 시청자에게 들킨다는 것.

캐릭터는 좀 애매해졌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기능이 약화된 것은 아닙니다. 3화 모리아티의 동화 속에서 아더왕에 비유되며 스코틀랜드 야드를 지키고 있는 레스트레이드의 무게는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하긴, 세월이 흐르고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계속 조금씩 톤을 달리할 셜록과 존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변화의 여지가 없이 거의 고정적일 셜록-레스트레이드의 관계가 꼭 여분으로 치부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시즌2에 비친 레스트레이드의 애매함은 잠시간 존과의 설정의 겹침으로 여기고 넘길 수도 있을테고요.




<모리아티>


홈즈 : 이제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은 위험해. 그 인간은 할 일을 잃었어

-마지막 문제


범죄를 예술로 치부하는 악당, 모든 시스템의 경계를 벗어나 미쳐 날뛰는 악당, 너무나 똑똑해서 세상이 발 아래 있는 악당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똑똑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미쳤고, 또한 이렇게 예술적 장인 정신의 극한에 있는 악당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대단한 캐릭터가 탄생했다는 말 밖에는요. 원전을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시즌이긴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시즌2 3화는 거의 전적으로 창작 에피소드라고 해도 좋은 작품이지요. 하물며 원전을 떠나 그냥 보통의 스토리텔링에 비교해봐도 이 에피소드는 정말 보편적인 예측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큰 틀은 예측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성품이죠. 하지만 그 안의 디테일을 보자면 계속 '여기서 이렇게 진행될 줄 몰랐다'의 연속이고, 시청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개에 정신없이 끌려가기 바쁩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리아티라는 캐릭터의 독창성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될 줄 몰랐다'는 지점들을 대강 나열하자면 '셜록이 악수하자 상대방에게 총알이 날라올 줄이야' '키티의 집에서 그 타이밍에 모리아티가 튀어나올 줄이야' '거기서 그런 식으로 자살할 줄이야' 등등- 어디서 본 것 같으면서도 생각해보면 그런 건 본 적이 없는, 모리아티라는 전무후무한 악당의 덕인 겁니다. 

우리의 셜록 홈즈 역시 그가 만들어놓은 덫 안에서 허우적거리느라 바쁘죠. 무력해보일 지경으로 말입니다. 스스로의 정체를 '동화 구연가'로 세탁한 자 답게도, 3화에 비춰진 모리아티와 셜록-두 적수의 관계는 '작가'와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의 역학 관계에 대한 은유로까지도 읽힙니다. 완벽하게 짜여진 논리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작가(모리아티)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그조차도 결국은 이미 쓰여진 이야기의 활자 안에 포함되어 있는 주인공(셜록)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동화는 이미 결말까지 쓰여져 있고, 그 결말의 빈틈은 작가가 스스로의 피로 메워버렸습니다. 그토록 완벽한 스토리를 구성할만큼 천재적이고, 그것을 실현할만큼 미쳐있으며, 그 완성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만큼 장인에 가까운 예술가. 네, BBC 셜록 시즌2는 모리아티의 시즌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이크로프트>


살아 있는 인간 가운데 최강의 기억력을 가진 그의 두뇌는 그지없이 질서정연해. 다른 모든 사람들은 특수 분야의 전문가인데 형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지

-그리스인 통역사


본격 민폐 캐릭터로 둔갑한 마이크로프트입니다. 시즌1의 충격적인 등장과 그 효과에 비교하자면, 라이헨바흐에서 추락하는 건 리차드 브룩도, 셜록 홈즈도 아닌 마이크로프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드라마가 원전에서 벗어나자 가장 손해를 본 캐릭터는 결국 마이크로프트이지요. 

마이크로프트 캐릭터가 이렇게 몰락하는 것은 원전의 팬으로서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그 명성을 회복하길 원하지만, 한 편 그 회복엔 약간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모리아티의 만능키에 속고, 증거도 없이 그를 잡아 고문하고, 힌트를 얻기 위해 동생의 신상을 낱낱히 공개하고, 늘 감시한다면서 221B가 모리아티에게 털린 것도 눈치 못 채고, 동생의 자살까지 수수방관한- 그 모든 실수들을 만회할 방법은 오직 그게 실수가 아니라 전략이었다는 전복 뿐일 겁니다. 그러려면 어느 시점에서부턴 마이크로프트가 모리아티의 술수를 파악하고 한 발 앞서 있어야 한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이번엔 시즌2의 핵심이었던 완벽에 가까운 모리아티의 캐릭터가 약화되는 겁니다. 마이크로프트 캐릭터가 살려면 모리아티가 죽고, 모리아티를 살리려면 마이크로프트가 희생돼야 하는 처지인 거죠. 물론 비중상 후자로 밀어붙이는 게 당연한 선택일 겁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의 캐릭터 해석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한쪽을 지나치게 어리석어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 쉽고 나태한 수법입니다.

 


<몰리>


쇠사슬 전체의 힘은 가장 약한 고리에 걸린 힘에 비례한다

-공포의 계곡


몰리가 드디어 일을 냈습니다. 

드라마판이 원전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가면서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거의 재창조되다시피한 모리아티가 그랬고, 진짜로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인 몰리가 그렇죠.

사실 원전과 아주 희미한 링크조차 찾기 힘든 캐릭터는 몰리가 유일하다시피해서, 시즌1때부터 몰리의 존재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주로 악당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었죠. 그녀처럼 하찮은 존재가 비관과 좌절로 악당이 되는 식의 전개는 쉬우니까요. 그런 그녀가 그 하찮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하찮음으로 인하여 (아마도) 셜록 홈즈 부활의 키가 된다는 것은 박수를 치고 무릎을 치게 되는 선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이린 애들러로 들었던 여성 캐릭터 묘사에 대한 실망감을 상쇄해준다고 해도 좋을만큼, 몰리 캐릭터의 활용은 허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찮아서 누구에게도, 그 대단하다는 셜록과 그를 분자 수준으로 해체해서 연구한 모리아티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녀가 존에게는 보였습니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존의 시각은 공정하고 정확하니까요. 시즌1 3화에서 몰리에게 상처를 주는 셜록을 존이 타박한 이후로, 셜록 역시 존의 눈을 통해 그 하찮은 몰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었지요. 그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의 추론, 바츠 연구실에서의 대화로 셜록의 시야 안에서 몰리는 서서히 형체를 갖추게 됩니다. '감정을 배우되, 감정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셜록 홈즈의 캐릭터 설정이 스토리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기도 하지요. 셜록을 분자 수준으로 분석해도 모리아티가 그 안에서 몰리를 찾아내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까요. 변화한 셜록이 몰리를 본 것이 아니라, 셜록은 그대로인 채로 존의 시선을 통해서 몰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 그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보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셜록에겐 심장이 없고, 다만 셜록의 심장이 존이라서- 리뷰의 첫머리에서 밝혔듯 셜록은 심장을 이식받고 제2의 존재로 개조된 게 아니라, 기존의 논리 기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존을 통해 감정이라는 탈찰식 무기까지 얻어 업그레이드된 것이라서. 그러니 모리아티가 셜록을 분해하고 탈탈 털어봐도, 그 안에서 몰리가 나오지 않을 수밖에요.

셜록이 속해있는 베이커가의 작은 세계와, 거기에 더해진 셜록과 존의 관계, 그리고 모리아티의 개입. 그 이해 관계와 감정 싸움이 하나의 게임으로 얽혀들어가는 와중에, 게임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 유일한 해법으로 부상하는 존재가 몰리라는 것. 시즌2의 감상적인 톤이 단순한 감상에 머물지 않고 그조차 논리적 게임의 해법으로 활용된다는 것은 일견 절묘합니다. 결국 모리아티가 말한 그 시시하고 하찮은 보통 사람들, 착한 사람들의 편이었다는 그 이유가 셜록 홈즈의 약점이 아닌 무기가 된다는 점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바라건대, 어디서 끝나든 시리즈가 끝나는 날까지 몰리 그녀는 먼지처럼 하찮은 모습으로 보존되기를. 혹여 나중에 캐릭터 변화로 지금 시즌2 3화가 갖고 있는 하찮음의 미학이 수정되거나 훼손된다면 약속하건대 저 정말 화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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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드라마] 주군의 태양 [4] [21] 감동 2013.10.03 4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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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 [영화] 블루 재스민 [30] menaceT 2013.09.29 4147
488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10] 감동 2013.09.24 3660
487 [영화] 우리 선희 [26] menaceT 2013.09.24 3493
486 [영화] 밀양 [1] menaceT 2013.09.24 2751
485 [소설] 전사 견습 - 보르코시건 시리즈 03(SF) [2] [24] 날개 2013.09.22 2783
484 [소설] 퍼시픽 림 (한국어 번역본) [37] Q 2013.09.22 4182
483 [영화] 뫼비우스 MOEBIUS (김기덕 감독, 결말과 상세한 내용 있음) [2] 비밀의 청춘 2013.09.15 5280
482 [만화] 돌아가는 펭귄드럼 (輪るピングドラム, 2011) [2] [2] 쥬디 2013.09.08 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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