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빼미 ふくろう (2003)

2012.02.15 15:05

Le Rhig 조회 수:4268

에미코와 유미에, 굶주린 모녀



! 이 영화의 첫 감상을 앞둔 분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Backspace를 누르세요. 이 감상을 읽지 마세요.괜히 그러는 게 아닙니다. 영화의 첫 감상에 앞서 이 감상을 읽게 되시면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중요한 감상 하나를 놓치게 되실 겁니다. 첫 감상에선 아무런 정보 없이 보아야 하는 영화거든요. 심지어 여기까지 읽으신 것만으로도 큰 실수를 하신 겁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얼른 Backspace를 누르시길! 경고했습니다.

영화는 굶주린 모녀의 짐승 같은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식물의 뿌리로 삶을 연명하던 이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 삶을 개척하기로 영화의 시작과 함께 결심합니다. 이를 위해 행동하기 시작하지요. 그들은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그들의 외모를 가꾸고 그들의 말을 꾸미고, 남자들을 죽이기 위해 특별 서비스인 소주에 독을 탑니다. 그렇게 남자들의 욕정과 돈과 삶을 빼앗아 그들은 그들의 삶을 개척해나갑니다. 목표인 150만엔을 향하던 그들의 삶은 그러나 예상치 못한 그들의 과거와 조우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습니다.

줄거리를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마치 굉장히 심각하게 구는 영화인 것만 같은데 사실 영화는 코미디입니다. 그것도 첫 장면에서부터 슬랩스틱으로 시작해 캐릭터 코미디에, 시츄에이션 코미디에, 전혀 가리지 않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일본 근현대사의 암울한 사건을 소재로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과 그 사건에 연루된 생각을 다룬다는 것이지요. 줄거리 소개에서 말한 '그들의 과거'가 바로 '일본 근현대사의 암울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조합을 떠올릴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고요. 그러나 드문 조합은 아니에요. 선입견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뿐이지요. 선입견으로 떠올린 '굉장히 심각하게 구는 영화'처럼 클리셰로 느껴질 정도로 흔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이런 조합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업 영화 중에서도 많이 있습니다. 장르를 옮겨 소설로 넘어가면 그 수는 엄청나겠지요. 심지어 이런 조합을 지칭하는 장르까지 있습니다. '블랙코미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극단적인 상황이라는 건 늘 블랙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과거의 중요한 사회 문제라면 더욱이 그렇습니다.

이 조합은 그 '일본 근현대사의 암울한 사건'에 대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이겠다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신도 가네토의 의도와 정확히 맞아듭니다. 여러가지 방법론이 있었겠지만, 신도 가네토가 블랙코미디와의 조합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의도와 잘맞기 때문이지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영화의 소재와 형식을 묶어 기획의 측면에서 조합이라고 놓고 드문 것이라며 감탄하거나 흔한 것이라며 비웃는 것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짓인 겁니다. 이 영화의 기획은 신도 가네토의 의도대로 정확히 영화화하자는 의지의 결과물이지 성공하는 상업 영화를 만들어 떼돈을 벌어보자는 의지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기획은 한 가지 일을 오십 년 넘게 해온 장인의 손길이 들어갔다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프로페셔널합니다. 제게 있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사실은 바로 그거에요. 이 영화는 작가의 의도를 정확한 계산을 통해 구현한 결과물입니다.

'정확한 계산'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 영화는 웰메이드 영화이기도 합니다. 먼저 플롯에 대해 설명해드려야겠군요. 영화의 시작에서 '굶주린 모녀'가 결심을 한 이후, 영화는 바로 본론으로 뛰어듭니다. 그 본론은 '굶주린 모녀'가 남자를 유혹해서 죽이는 장면들과 남자들로부터 갈취한 돈으로 음식을 해먹는 장면들이지요. 영화의 플롯은 이 두 장면을 기본 개념으로 장면의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화의 플롯은 이 제한된 기본 개념을 십분 활용하여 장르적 재미를 만들어내고,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발전시키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시도하고 있는 바를 모두 정확히 성공해냅니다.

영화의 웰메이드 성격은 플롯을 떠나 촬영, 연기, 세트, 음악 등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촬영은 플롯 만큼이나 제한된 구도 안에 갇혀 있는데 영화는 이 제한된 구도를 반복과 변주를 통해 십분 활용하여 담고자 하는 것을 모두 전달해냅니다.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실버 세인트 조지상을 받은 오오타케 시노부의 연기는 메소드 연기이지만, 단순히 절정을 향해 치달아 나가는 연기가 아니라 정확한 계산을 통해 나온 정확한 연기를, 극의 흐름에 맞춘 연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웰메이드 연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영화의 싱글 세트 프로덕션이라는 제한도 반복과 변주를 통해 십분 활용되어... 가끔 외부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 타이밍이 굉장히 교묘합니다. 외부 장면에서의 룰이 있어요. 이 장면들의 효과 또한 대단합니다. 음악의 경우, 저는 홍상수를 떠올렸습니다. 클래식 한 곡을 영화 내내 사용하였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 사용은 거의 동일한 효과를 내는데도 그렇습니다. 남용하지 않고 정확한 계산으로 필요한 곳에서만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영화는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것을 끝까지 끌고 갑니다. 변주가 있고 국면 전환이 있어도 결국에는 모든 게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것의 활용일 뿐 새로운 유입이 아니에요. 정확한 계산으로 활을 쏘아 살을 과녁 중심에 맞춘 것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 일관성이야말로 영화의 웰메이드 성격을 구체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영화의 웰메이드 성격은 잘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인위적이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게 늘 웰메이드의 문제에요. 잘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인위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좋은 인물과 그 드라마, 장면, 장르적 재미 등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하기사 그런 것 없이 인위성만을 가졌다면 웰메이드라고 부르지 않았겠지요. 작위적인 졸작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잘 만들어졌다는 인상이 인위성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경우가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희극이 현실의 일본 근현대사와 맞닿는 지점입니다. '사건'의 정황을 이야기하는 모든 정보들이 관객에게 단순한 인위적 나열으로 느껴질 수 있는 거지요. 그 느낌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과 장르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게 할테고 극단적인 경우 영화로부터 아무런 공감이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관객은 영화나 '사건'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극장을 찾은 관객이에요. 제가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서 첫 감상을 앞둔 분들께 경고한 이유가 그 때문이지요.


정보의 유무에 따른 감상의 차이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해, 먼저 영화나 '사건'에 대해 아무 정보 없이 본 제 첫 감상에 대해 얘기해드리지요. 초반에 저는 이 영화를 순전히 코미디로 봤습니다. 영화의 발단 단계에서 슬랩스틱과 캐릭터 코미디가 나오고 시츄에이션 코미디가 나오다 보니까, 내러티브 자체를 코미디를 위한 도구로 인식한 겁니다. 그래서 오가는 대화 모두와 벌어지는 일 모두를 코미니의 '해프닝'으로 치부했습니다. 세금 낭비하는 정부 얘기나 만주 이주 실패 얘기나 모두 코미디로 여겼던 거지요. 그 밖으로 생각하게 하는 맥락을 첫 감상 때에는 몰랐으니까요. 낄낄거리며 보던 중 복지과 지원담당 공무원이 등장하고 '모'의 기나긴 독백이 등장하는 중반의 국면 전환을 통해 코미디로 여긴 이야기가 모두 사실에 근거한 정보였음을 깨닫게 되었죠. 그 이후 영화를 코미디가 아닌 사회적 문제를 다룬 멜로드라마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영화를 중의적으로 바라보았지요. 코미디 장르와 멜로드라마 장르의 결합을 본 겁니다. 입체적인 감상이었고, 때문에 재미있는 감상이었습니다.


만약 첫 감상에서 영화에 대한 정보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영화를 보았더라면, 영화의 코미디를 순전한 코미디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오가는 대화 모두와 벌어지는 일 모두를 정보의 나열과 장르 조합의 실험으로 보았겠지요. 그리고 그런 방식의 감상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기에, 그런 방식의 감상으로는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도 입체적으로 볼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밋밋한 감상이 되었겠지요. 때문에, 이 영화는 첫 감상과 두 번째 감상의 감흥이 다른 영화이기도 합니다. 처음 감상의 입체성은 단지 그 첫 감상의 순간에 그칠 뿐이고, 그 다음 감상부터는 비교적 평면적이고 비교적 밋밋한 감상이 되겠지요. 물론 플롯만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두 번 감상하는 게 무의미한 영화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제 이야기의 요지는 첫 감상이 중요한 영화이고 영화에 대한 정보는 플롯의 힘을 잃게 한다는 얘기지요.


마스터피스는 아닐 수 밖에 없습니다. 데케이즈를 걸쳐 사랑받는 영화들은 그 플롯의 힘이 단순한 재감상을 통해 약해지지 않습니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탓에 플롯의 힘이 약해지지 않고요. 이 영화가 마스터피스일 수 없는 건 그 때문입니다. 여전히 시치미 뚝 떼고 보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긴 합니다만, 그거야 관객의 관람 태도와 의지이니 영화의 힘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아, 영화 감상 준비에 게을렀음에도 오히려 그 때문에, 첫 감상을 입체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제가 영화에 대해 불만인 것은 이토 아유미가 연기한 에미코라는 캐릭터입니다. 유메이가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반짝반짝거릴 때에 에미코는 하는 게 없어요. 비록 후반의 낫 들고 발광하는 장면은 꽤 재미있습니다만, 그러기까지 이 캐릭터는 얼마나 지루하던가요. 수동적으로 유메이에 끌려다니며 시츄에이션 코미디에 동원되는 것과 유미에의 드라마를 강화시키는 것 외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던 캐릭터인 겁니다. 유메이라는 매혹적인 캐릭터와 붙어 있기 때문에 그 단점이 더 도드라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유메이를 연기한 오오타케 시노부는 얼마나 대단했던가요. 캐릭터의 단점은 배우의 연기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토 아유미의 연기는 평면적이고 밋밋하며 단편적으로 보여요. 사실 이토 아유미가 아무리 노력했단들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연기를 한 사람은 이토 아유미입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제게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은 꽤 좋습니다. 오오타케 시노부라는 중견 여배우의 멋진 연기를 볼 수 있었고, 에미코라는 캐릭터나 이토 아유미의 연기에 대해서 좋게 보진 않았지만 유메이라는 캐릭터와의, 오오타케 시노부와의 앙상블은 좋게 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도 만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프로페셔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소재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장르와 플롯을 가져와 내러티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다루는 장르와 플롯의 전문가입니다. 앞으로 웰메이드라는 장르를 떠올릴 때 이 영화를 제일 먼저 기억할 것 같아요. 어디 그것뿐이던가요? 영화의 싱글 세트 프로덕션이라는 제한과 그곳에서의 제한된 촬영을 오히려 활용하였다는 점은 영화 제작에 있어 충분히 영감이 될만한 사항입니다. 영화의 일관성을 빼놓을 수도 없지요... 신도 가네토의 영화를 더 찾아봐야겠습니다.



2012.2.15

르 뤼그

http://blog.daum.net/lerhig/8



가지가지.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2월 7일부터 2월 26일까지 신도 가네토 회고전을 열고 있습니다. 영화 올빼미의 상영은 2월 22일 7시에 한 번 더 남아 있고요.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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