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아트하우스 모모.

  

(스포일러)

  이번에도 홍상수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몇 가지 장치는 그대로 이어진다. 보이스오버 나레이션, 상황 혹은 대사의 반복과 변주, 눈에 너무 잘 보이는 줌과 패닝 등 '이거 현실 아니고 영화요!'라고 목청 높여 외치며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서 거리를 두게 하는 장치들은 여전하다. 동시에 이번 영화에서는 꿈과 말 등의 요소에 특히 집중해 가며 영원히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찾을 수 없는 기표들의 연쇄 속을 헤맨다.

  영화의 제목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는 영화의 제목을 조금 뒤틀어 '누군가의 딸인 해원'에서 시작해 보자. '누군가의 딸', 그 '누군가'의 자리에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그녀의 어머니를 보게 된다. 해원이 자신의 뿌리랄 수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사직동을 거니는 과정은 어머니의 과거를 훑는 과정이었다. 그 어머니는 사직동이란 공간과 얽힌 과거의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고 그를 통해 명확한 실체로서 존재하고, 해원은 그렇게 명확한 엄마를 가짐으로써 명확한 뿌리를 획득한 셈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이제 곧 캐나다로 떠날 것이다. 실제로도 그 어머니는 곧 영화 내에서 자취를 감춘다. 어머니와 헤어진 해원이 이 감독과 사직동에서 만나면서 이 뿌리로부터, 해원이라는 인간의 실체로부터 해원을 유리시키는 과정이 시작된다(엄마를 만나기 전 제인 버킨 꿈 장면은 일종의 예고였으리라.). 해원과 이 감독은 유명장 모텔에서 동침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지만 각각의 기억이란 필터를 거치면서 그 과거에 대한 두 인물의 말은 살짝 핀트가 어긋난다. 해원의 어머니가 사직동이란 과거에 대한 추억을 가짐으로써 그 실체를 획득한 것과 달리, 이들은 사직동이란 공간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그 과거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한다. 명확하지 않은 과거, 불안한 기억, 그로 인해 해원의 뿌리가, 나아가 그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해원의 존재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 편, 해원과 이 감독이 '사직동 그 가게'를 찾는 장면에서는 분명 해원이 어머니와 그 가게 가판대에서 책 구경까지 한 적이 있음에도 마치 그곳에 처음 가는 듯한 나레이션이 나온다. 유명장 모텔 장면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 역시 기억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가리키는가에 따라 그 실질적인 내용이 변질되는 것을 보여준다.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과거의 그 무언가가 그 실체로부터 유리되어 기표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저녁이 되자 둘은 우연히 술집에서 영화과 학생들과 합석하게 된다. 해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한 학생이 이 감독에게 '해원이 혼혈임'을 아느냐고 묻는다. 해원의 전 애인이었다는 학생은 사실이 아니라 주장하고, 해원의 전 애인이자 어쩌면 현 애인일지도 모르는 이 감독의 경우 그 이야기가 금시초문이다. 우리는 아까 '누군가의 딸인 해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한 바 있고, 그 누군가 중 한 명일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해원의 아버지를 확인할 수 없음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끝끝내 '해원의 혼혈 여부'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소문은, 그 말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기표로서의 말은 존재하는데 그 가리키는 대상은 영영 드러나지 않는다. 유명장 모텔, 사직동 그 가게에 대한 '기억'이 그랬듯, 우리는 '말' 역시 기표를 그것이 가리키는 어떤 실체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방식으로 작용함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해원은 이 이후에도 수많은 말과 기억들 사이를 끊임없이 헤맨다. 수많은 사람들이 해원에게 이런저런 소문들을 들이대며 진실 여부를 묻는다. 해원은 이에 대해 때로는 거짓을 말하고 때로는 진실을 고백하다 상대와 싸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변명하며 어떤 때는 나서서 자신이 먼저 비밀을 고백하려 하기도 한다. 한 편, 다른 인물들은 '너만 알아야 돼'라 말하면서 여기저기 해원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리는가 하면, 자신들만의 비밀을 숨기(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모두와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소문들이 사실상 비밀이 아닌 비밀로서 퍼져 나가는 과정에, 홍상수 영화에 늘 존재하던 반복과 변주가 끼어들며 진실과 거짓, 환상과 현실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흐려놓고, 그 시작과 끝점을 알 수 없는 '해원의 꿈'이나 늘 '어제'를 말하며 시간축을 뒤틀어놓는 '해원의 일기'는 이를 더욱 심화시킨다. 이 아수라장 한복판을 지나다 보면, 우리는 '기억'과 '말'의 함정을 거치면서 진실과 거짓,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와중에 수많은 기표들이 그것들이 가리키던 대상들로부터 동떨어져 기표 그 자체로서만 유령처럼 떠다니게 되는 현상들을 목도하기에 이른다.

 

  김의성이 연기하는, 마틴 스콜세지와 친하며 대통령상을 받았고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마인드컨트롤 능력을 지녔다는, 그 자체로 '어떤 거대한 기표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실존하지 않는 듯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는 정점에 달한다. 말들이, 기억들이 기표의 유령으로 변하는 그 현상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 극중 인물까지 기표의 유령으로 바꾸어 놓을지 모른다는 어떤 전조가 그 부분에 배어 있다. 해원은 어머니와 지났던, 그리고 그 뒤에 이 감독과 지났던 사직동 곳곳을, 사직단과 사직동 그 가게를 그 인물과 다시 지난다. 어머니와 사직동을 걸을 때의 해원은 명확한 뿌리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 '실체'를 의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 감독과 사직동을 걸을 때의 해원은 그 뿌리로부터 유리되어 조금씩 그 존재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해원은 '기표 덩어리로서의 인간'과 그 길을 동행한다.

 

  해원과 그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둘은 넘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사직단 안 쪽의 영역에서 만난다. 이전에 이 감독과 그 곳에 갔을 때, 해원이 그 안쪽 영역에 들어서자 영화는 이 감독과 해원이 그 안쪽 공간에 공존함을 보여주기 직전 황급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 바 있다. 그런데 그 남자와의 만남은 아예 그 안쪽 장소에서 처음 이루어진다. 이는 어떤 선언처럼 느껴지기까지 하고, 이를 긍정하듯 그 뒤부터 해원은 마치 말들에게서, 기억들에게서, 그리고 그에게서 병이 옮은 것마냥 슬슬 기표의 유령으로 변해 간다.


  그 뒤, 해원은 친한 언니, 그리고 그녀의 유부남 남자친구와 함께 이 감독과 갔던 남한산성에 다시 오르고, 그들에게 그 기표 덩어리 같던 남자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마치 그 후 기표의 유령이 될 자신의 모습에 대한 예언 같다. 해원은 친한 언니와 그 남자친구, 등산객, 이 감독 등의 인물들과 함께 비밀과 소문과 말을 둘러싼 상황들의 반복과 변주(이 반복과 변주는 관객의 기억을 건드린다. 같지만 다른 상황. 극중 인물들의 기억이 그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어긋나고 동시에 실체로부터 멀어졌던 것처럼, 영화는 일부러 유사한 기억을 겹쳐 놓음으로써 관객의 기억을 호도하려 한다. 극중의 게임에 관객이 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길 바라는 호소처럼 느껴진다.), 그로 인한 기표의 유령들의 아수라장을 지난다. 그 와중에 유준상과 예지원이 연기하는, 마치 '하하하'에서 넘어온 듯 보이는 두 캐릭터가 깃발을 바라보며 그 깃발로 인해 바람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음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고 가리켜 말하는 깃발, 그러나 이 영화 속 기표들은 더 이상 그 깃발과 달리 그 무엇도 가리키지 못한다.

 

  해원과 이 감독이 음악을 들으며 울 때, 두 인물이 비로소 서로를 포용하며 화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때, 영화는 대뜸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담은 마지막 장면을 툭 던진다. 이는 얼핏 영화 중반쯤 해원이 도서관에서 잠들고 깨는 그 장면의 연장선 상에 놓인 듯 보이지만, 동시에 전혀 동떨어진 장면처럼 느껴진다.

 

  하필 그 마지막 장면에서 해원은 '망자'처럼 '잠들어' 있다, 그것도 홀로 '외로이'. 그리고 이전에 해원이 읽던 'The Loneliness of Dying(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란 책이 여전히 그 옆에 놓여 있다. 영화는 해원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장면을 끼워넣으면서도, 심지어 그 위에 그 일을 일기로 쓰고 있는 시점의 해원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까지 덮어씌우면서도, 절대 해원을 깨우지 않고 그녀가 여전히 잠들어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끝내버린다. 일기를 쓰고 나레이션으로 이를 읊는 해원은 잠을 깬 뒤의 해원이지만, 영화를 마무리짓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는 해원은 잠들어있는 해원이다. 일종의 유체이탈이지만 장면을 장악하는 것은 분명 후자의 해원이다.

 

  이는 홍상수가 '하하하'에서 과거의 시점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내고, '다른나라에서'에서 이야기 속 안느가 이야기 밖 화자 대신 영화를 마무리지은 방식과 유사하다. 홍상수가 세계 간의 역전을 시도하는 익숙한 방식.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난 해원이 아닌 잠들어있는 해원을, '뿌리로부터, 실체로부터 유리되어 죽어버린' 해원으로서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실체와의 접점처럼 존재하는 듯 보였던 꿈 밖의 해원 역시 그저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으로 유령처럼 죽은 해원 곁에 머물며 '기표의 유령'으로서의 해원을 완성시킬 뿐이다.

 

  영화는 말들이, 기억들이, 어떤 인물이 실체로부터 유리되어 기표의 유령으로 화하는 과정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인공 해원으로 하여금 이 아수라장의 한가운데를 지나도록 했다. 해원은 명확한 뿌리를 가진 명확한 '실체'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떠났고 그녀의 아버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그녀의 과거는 말들과 기억들이 기표의 유령으로 화하는 과정 속에 흔들리고 휘발되었다. 이제 그녀는 오프닝 크레딧에 나왔던 영화 제목 그대로 '누구의 딸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다시 말해, 그녀를 가리키던 기표에 그 존재 자체가 압도되어 버린 셈이다. 나아가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을 '해원의 꿈'이란 영역 아래 가둠으로써 그들 모두가 해원처럼 기표의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책 제목 'The Loneliness of Dying'이 말하듯, 그렇게 실체로부터 유리되어 기표가 되어가는 과정은 삶으로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고 또한 실체로서 상대와 소통할 수 없으니 외로운 과정이다. 그들은 모두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그렇게 외로이 죽어갔고, 죽어가며, 또 죽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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