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 선희

2013.09.24 14:51

menaceT 조회 수:3493

 

http://blog.naver.com/cerclerouge/40197597388

 

우리 선희 (2013)

 

9월 22일, CGV 신촌아트레온. 

 

  '홍상수는 늘 최신작이 최고작'이라는 명제에 걸맞으면서 동시에 홍상수의 전작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대칭을 이루는 듯한 작품이다(참고를 위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감상을 썼던 글의 링크를 덧붙인다. http://blog.naver.com/cerclerouge/40190758700).

 

  전작의 주인공 해원은 수많은 이들의 말, 소문을 거칠수록 점점 그 실체로부터 유리되더니 끝내 기표의 유령이 되어버리고 마는 수동적 존재이다. 그러나 이번 영화의 주인공 선희는 '잠수를 탔다'는 타인들의 규정에 의한 기표 덩어리로서의 상태에서 시작해 점점 자신의 존재를 그 실체와 전혀 무관하게 단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에 따라 구현해 나가는 능동적 존재이다.

 

(스포일러)

 

  선희가 극중에서 처음 만나는 존재는 이민우가 연기한 학교 선배인데, 그는 줄곧 선희에게 꺼림칙한 대우를 받더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선희가 윽박지르자 초라하게 사과하며 퇴장하는 존재이다. 자신을 원하는 방식대로 이끌려는 인물에게 오히려 윽박지름으로써, 선희는 자신이 '잠수를 타던' 동안 자신을 가리키던 수많은 기표들이 이룬 늪 한가운데서 자신을 재정립해 나가겠다고 일종의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 뒤 선희는 총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홍상수가 구조적 접근을 관객에게 요구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반복과 변주, 눈에 띄는 주밍과 패닝 등이 여전히 사용되는 와중에, 영화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 안에 걸친 음악이 마치 신호처럼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관객이 이입하기보다는 차라리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함을 주문처럼 반복하며 요구해 온다. 홍상수 영화의 가장 기본적 요소들이 이렇게 바탕을 이루고 있는 위에서, 선희는 독특하게도 세 명의 남자를 직접 불러낸다. 우연히 만나는 것도, 방문당하는 것도 아니라 '직접 호명한다'. 더 이상 수동적으로 규정당하지만은 않으려는, 이제 스스로 능동적 위치를 점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호명되어 선희의 옆에 서게 된 세 남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희를 규정하려 든다. 이때 세 남자가 사용하는 '말'들은 (첫 발화자가 누구인지조차 의미없어질 때까지) 끝없이 그들 사이를 돌고 돌면서 번번이 선희의 실체로부터 비껴 나간다. 그들은 종종 거짓도 이용한다. 무의미한 기표들이 나부낀다. 여기까지는 홍상수 영화에서 익히 볼 수 있던, 특히 전작 '...해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이던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선희가 자신을 규정하려 드는 남성들의 레토릭을 그대로 차용해 역으로 그 남성들을 규정하기 시작할 때, 이 영화는 기존의 홍상수의 세계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다(대표적 예로 선희가 교수로부터 주워 섬겨 읊게 되는 '끝까지 파고 들어야 자신을 안다'는 말을 떠올려 보자.). 선희는 자신이 비판한 그 남자들처럼 말하고 그들처럼 거짓을 이용하기도 하며 그들처럼 상대를 규정해 나간다. 전작의 해원이 아무 것도 모른 채 기표들의 장 속에 차츰 죽어갔던 것과는 달리 선희는 능동적으로 기표의 게임 안에 뛰어든 주체이다.

 

  이 영화를 좀 더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자. 이 영화는 선희가 자신이 원하는 추천서를 얻기 위한 과정, 그 속에서 세 남자와 조우하게 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추천서를 건네며 교수는 '이게 진짜다', '이게 너다'라 말하지만, 정작 원하던 추천서를 받아든 선희는 그 교수의 말에 의구심을 품는 듯하다. 그것은 선희의 실체를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선희의 이상적인 형태의 모조에 가깝고, 선희는 이를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상대의 실체에, 심지어 자기 자신의 실체에조차 온전히 접근할 수 없는 이 기표들만의 게임 안에서, 참가자들은 모두 '중요한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라 말하지만 늘 그에 앞서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함'을 전제로 한다. 전작의 해원은 그 게임에 어떠한 영악함도 없이, 결국 그 게임 안에서 실체를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그 '한계'를 인지하지 못한 채 그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철저히 희생당하지 않았던가? 마치 그 패배를 기억하기라도 하는 양, 선희는 자신의 실체에 대해 미련을 갖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향한 기표들을 조작하는 데 집중하고, 이것이 '추천서'라는 요소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카페 아리랑'에서 처음 치킨이 언급될 때 우리는 가게 주인이 치킨을 시키러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는 것까지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 비운 자리는 또 다른 남자에 의해 채워지고, 프레임 밖으로 벗어난 여주인은 돌아오지 않으며, 끝내 그녀가 시킨 치킨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다. 이때 치킨은 오로지 기표로서 호명되는 치킨일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 '카페 아리랑' 장면에서 우리는 마침내 배달된 치킨의 모습을 본다. 하지만 극중 인물들이 그 치킨에 손을 대기도 전에(맛보기도 전에) 영화는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 전에 영화는 극중 인물의 입을 통해 그 치킨의 식감, 촉감 등에 대해 말하지만 끝내 그것들은 영화 내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감각들이다. 극중의 치킨은 점차 발전된 형태의 기표가 되어가지만 끝끝내 그 실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극중 선희의 존재가 딱 그 치킨의 모습과 같다. 첫 남자의 이름(문수)을 '호명하고' 그 남자와 대면했을 때, 선희는 자신을 규정하는 남자에 맞서 교수의 언어를 빌어 그 남자를 역으로 규정해 버리고는 그 자리를 뜬다. 첫 번째 남자는 홀로 남는다. 그는 후에 선희가 만날 세 번째 남자를 찾아가 그와 대면하고 그와 선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첫 번째 남자의 이야기가 종결을 맺는다. 이 이야기 덩어리에서 남자는 선희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는다.

 

  두 번째 남자를 '호명하고' 그 남자와 대면했을 때, 선희는 자신을 규정한 그 남자의 추천서에 의문을 표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둘은 술을 마시고, 첫째 남자의 경우와 달리 이번에는 선희가 그와 동행하더니 적극적으로 그를 안기까지 한다. 다음 숏에서 선희는 사라지고 홀로 걷던 남자는 세 번째 남자를 찾는다. 그와 선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이 이야기 덩어리도 종결을 맺는다. 여기서 선희는 남자와 동행하며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시도하기까지 하나, 여전히 이야기의 종결부에서 선희는 부재해 있다.

 

  그 뒤 선희가 세 번째 남자를 '호명하고' 그와 대면한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을 규정하려 드는 남자의 시도에 '나도 이미 그 이야기는 안다'고 대꾸하더니 남자들이 하는 그 방식 그대로 남자에거 '예쁘다'며 그를 어루만진다. 이때 치킨이 비로소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보조를 맞추듯, 선희는 대담하게 남자와의 키스를 시도하고, 그에 이어 이 이야기 덩어리의 종결부에서 카메라는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 대신 우산을 들고 길을 내려가는 선희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종결부를 선희의 영역으로 확정짓는다.

 

  반복과 변주를 통해 세 명의 남자, 세 번의 이야기를 거치면서 선희는 먼저 떠나고 사라지는 존재, 보다 적극적이지만 역시 사라지는 존재, 더욱 적극적이며 동시에 남자가 사라진 뒤에도 지속적으로 프레임이라는 영화적 공간을 지배하는 존재로써 점점 그 존재감을 더해간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선희의 실체에 다가서지 못한다. 마치 치킨의 존재감이 강해짐에도 그 실체에 다가서지 못하고 기표의 강화만 체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해원이 실체로부터 유리되어 기표의 유령이 되어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한 선희는, 이처럼 실체로서의 자신을 회복한다기보다는 능동적인 기표의 수집자로써 자신을 회복해 나간다.

 

  선희는 세 남자를 거친 뒤 비로소 자기가 원하는 추천서를 받는다. 진정 가치있는 행위는 자신의 실체에 다가서는 과정이지만, 실상 이 세상이 주관하는 기표의 게임 안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표를 원하는 바대로 수집하는 것임을 깨달은 선희가 마침내 그 목표를 이룬 것이며, 이는 어쩌면 전작에서 스러져 간 해원을 위한 복수이다. 

 

  창경궁 안에서 선희는 원하던 추천서를 받아 챙기고는 창경궁 밖으로, 프레임이라는 영화적 공간 밖으로 나간다. 이는 끝까지 파고 들어 자신의 한계를 앎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다는 극중 인물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선희는 자신을 가두는 기표들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 기표의 게임에 임하고 자신을 향한 기표들을 역이용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표를 조작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자신이 실체로서 자신을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한계를 명확히 인지한 채, 말 그대로 기표들의 게임 그 끝까지 파고 들어 자신을 구성하는 기표들이 가지는 한계점까지 이르게 된다(그를 규정하려 들던 세 남자가 모두 그녀에게 실질적으로 굴복했으므로.). 그 상태에서 그녀는 프레임이라는 상징적 굴레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맞닥뜨리게 됐는지도 모른다. 반면 그를 규정하려던 세 남자는 끝끝내 프레임 안, 창경궁 안, 그 한계 속에 갇힌 채 창경궁 안 한 건물의 문 너머 어둠만을 무익하게 바라볼 뿐이다.

 

  홍상수는 2013년에 낸 두 편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는 마치 쌍둥이와 같은 대칭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전자는 홍상수가 흔히 사용했던 요소들 외에 말과 꿈이라는 소재 등을 보다 본격적으로 차용하며 그 구조적 실험을 여태까지 그가 다다랐던 수준 그 이상으로 밀어붙여 본 듯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었다. 한편, 후자인 '우리 선희'는 상대적으로 그런 구조적 실험이 전작만큼 두드러져 보이는 예는 아니다. 전자가 그런 구조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데 주력했다면, '우리 선희'는 그러한 구조적 요소들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자연스레 극 안에 포섭될 수 있도록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더불어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의 이 두 영화는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됨으로써 기표로 가득한 세상 안의 두 여인의 여정을 통해 홍상수의 영화적 세계가 얼마나 더 깊어졌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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