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 했다',

11월 23일,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알랭 레네의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 했다'는 현실과 극 사이의 경계를 흐려놓고 그 연장선 상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까지 흐려놓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통찰하고자 하는 영화다.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스포일러)

 

  극작가 앙투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전에 그의 작품 '에우리디스(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극이다.)'에 출연한 바 있는 배우들이 고지대에 위치한 앙투안의 저택을 찾아온다. 에우리디스 역을 맡았던 두 여배우가 찾아오는 장면은 좀 길게 보여주더니 그 뒤부턴 배우들이 저택에 들어오는 장면들을 주르륵 이어붙여 보여준다. 늘 같은 음악과 함께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연주를 하며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 세계로 향했듯, 생의 공간에 있던 인물들이 같은 음악들과 함께 죽은 자를 찾아 (여기서는 신화와 정반대로) 높은 곳으로 올라온 것이다.

 

  집사는 죽은 앙투안이 녹화했다는 테이프를 보여주는데, 영상 속의 앙투안은 마치 현 시점에서 배우들에게 말을 걸듯 하나하나 감사를 표하더니 콤파니 드 라 콜롬브의 단원들이 찍은 '에우리디스' 데모 영상을 보여줄테니 직접 평가해 달라고 부탁한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하는 부탁.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소통. 그 중간 매개인 콤파니 드 라 콜롬브의 '에우리디스'가 뒤이어 시작된다. 콤파니 드 라 콜롬브의 '에우리디스'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듯 휑한 세트에서 진행된다(예를 들어 실을 길게 빼 두고 활로 연주하면 바이올린 소리가 나는 식으로 처리). 첫 장면은 죽음을 상징하는 배역이 커다란 추를 흔드는 장면이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듯한 그 추의 흔들림으로 시작하는 그 연극에서, 인물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끝없이 흘러내리고 거슬러 올라간다. 에우리디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마티아스는 자살하고, 그 자살에도 불구, 에우리디스는 오르페우스와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그 다음 날 또 다른 남자를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를 되살리려 하나 끝내 에우리디스의 과거를 믿지 못해 일부러 '죽음'과의 약속을 깨고 에우리디스를 다시 한 번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를 만나기 위해 결국 자살을 택한다. 삶과 죽음 사이의 끝없는 흔들림은 마치 그 추의 흔들림을 닮았다.

 

  한 편, 앙투안의 메시지도 그렇고, '에우리디스' 데모 영상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 집사가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은 늘 그 스크린의 테두리가 다 보이도록 보여진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단 한 번도 그 스크린의 영상이 실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풀스크린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극중극임을 관객에게 끊임없이 일러주고자 하는 의도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극중극인 콤파니 드 라 콜롬브의 '에우리디스'의 틀 밖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데모 영상을 보는 배우들은 모두 각각 다른 시점에(물론 동 시점에 같이 공연한 이들도 있다.) '에우리디스' 속 배역을 연기한 바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잠자코 영상을 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기가 맡았던 배역들의 대사를 읊으며 직접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다음에 나올 대사를 미리 읊거나 하는 식이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점점 능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오르페우스 역을 맡은 바 있는 두 명의 배우가 데모 영상 속의 부부에게 윽박지르는 장면처럼 데모 영상 바깥 세상과 안 세상이 소통을 하기도 하고, 과거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감정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전혀 다른 세트장으로 무대가 바뀌어 또 다른 연극이 펼쳐지듯 진행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티유 아말릭이 피에르와 사빈느가 연기하는 장면에서 한 번, 람베르와 안느가 연기하는 장면에서 또 한 번, 이렇게 연이어 두 번 똑같은 위치에서 각기 다른 방으로 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은 지금 데모 영상을 보면서 즉석에서 연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즉석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라면, 방금 나간 마티유가 바로 다음 장면에서 원래 그 자리에 돌아와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만 해도 일어서서 열연을 펼치던 인물들이 바로 다음 장면에는 자리에 앉아 있는가 하면, 바로 앞뒤로 붙어있는 장면에서 인물들의 자리 배치가 바뀌어 있기도 하다.

 

  이쯤 되면,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단순히 배우들이 영상을 보다 감흥에 젖어 자신이 과거에 한 연기들을 다시 재현해 보이는 것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배우들이 콤파니 드 라 콜롬브의 '에우리디스'를 보는 바로 그 상황에서, 배우들의 과거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감흥들을 타고 어쩌면 또 다른 세계들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제1세계는 콤파니 드 라 콜롬브의 '에우리디스'라는 극 안의 세계, 제2세계는 배우들이 앙투안의 저택에서 그 데모 영상을 감상하고 있는 세계, 제3-1세계는 피에르-오르페우스와 사빈느-에우리디스를 중심으로 구성된 또 다른 '에우리디스' 세계, 제3-2세계는 람베르-오르페우스와 안느-에우리디스를 중심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에우리디스' 세계. 위에서 언급한, 두 오르페우스가 화면 속 부부에게 윽박지르는 장면은 이제 제1세계와 제2세계가 통해 있음을 보여준 장면으로 다시 읽을 수 있고, 배우들이 갑자기 다른 장소로 이동해 연기를 해 보이는 장면들은 제2세계와 제3-1세계, 제2세계와 제3-2세계가 서로 통해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마티유가 두 번 연이어 나가는 장면을 통해 제3-1세계와 제3-2세계가 통해 있다는 것 역시 확인해 볼 수 있다. '에우리디스'의 막이 넘어갈수록 소통의 양상은 더욱 다양해져 결국 제1세계-제2세계-제3-1세계-제3-2세계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앙투안에 의해 저택에 초대받은 배우들이 모두 실제 배우들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하다. 이는 곧 제1~3세계가 갖가지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는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 했다'라는 이 영화가 다시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제4세계와 다시 한 번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제1~3세계의 끝없는 소통으로 인해 '극중극'과 극중극 입장에서 보았을 땐 외부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극'중 실제 상황 간 경계가 흐릿해진 현상이 이제 제4세계로까지 확장되어 실제 관객들이 보는 극과 그 바깥 현실의 경계까지 덩달아 흐려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영화는 질문한다. 무엇이 현실인가? 무엇이 진짜 그들인가? 무엇이 진짜 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인가? 어디까지가 연기인가? 과연 그들이 존재한 그 수많은 세계들 중 어디가 진짜 세계인가?

 

  이렇게 세계를 쪼개고 경계를 흐려놓은 뒤 영화는 위에서 말한 '에우리디스'의 내용을, 즉, 삶과 죽음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죽음'을 연기하는 마티유가 말한다. 삶은 끝없이 물고 늘어지며 고통에 몸부림치게 하지만 죽음은 달콤함을 선사한다고. 그의 말마따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의 사랑은 에우리디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둘 사이의 감정이 식어가면서 결국 또 다른 끝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우리디스의 죽음은 오르페우스로 하여금 마치 영원히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에우리디스를 갈구하게 만든다. 한 편, 에우리디스의 과거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집착은, 에우리디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상황에선 끝내 해소되지 못하지만, 에우리디스가 다시 영원한 죽음의 공간에 갇히게 되자 극복할 수 있는, 아니,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 된다. 자, 그렇다면 오히려 그들의 사랑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 아닌가? 무엇이 진짜 삶이고 무엇이 진짜 죽음인가?

 

  '에우리디스'의 4막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죽음'은 괴로워 하는 오르페우스에게 특정 장소로 향하는 길을 일러주며 그곳으로 가면 에우리디스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면이 갑자기 4분할되더니, 왼쪽 상단엔 실제 그 길이 나오고(그 어떤 배우의 형체도 등장하질 않으니 제4세계라 봐도 무방하다.), 오른쪽 상단엔 제1세계의 벨보이가, 왼쪽 하단엔 제3-1세계 혹은 제3-2세계의 죽음이 등장해 대화를 나누고, 오른쪽 하단엔 제2세계에서 배우들이(심지어 왼쪽 하단에서 연기하고 있는 마티유 아말릭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 데모 영상을 감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다섯 세계의 상황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4분할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세계의 분할과 그 경계의 모호성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극은 오르페우스의 죽음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채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는 영원히 함께 하게 되었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끝난다. 제1세계, 제3-1세계, 제3-2세계가 한꺼번에 닫히고, 관객이 보는 화면 안에는 제2세계만이 남게 된다. 갑작스런 세계의 통합. 그리고 그 자리에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앙투안이 나타나, 배우들이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는지 그리고 자기 작품이 아직도 먹히는 작품인지 궁금해서 죽은 척 해 보았노라고 말한다. 배우들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반기고 갑자기 요란한 음악이 흐른다. 뒤이어 화면에 잡히는 집사의 얼굴이 묘하다. 영화 초장에 똑같은 음악과 함께 배우들이 저택에 등장한 것을 두고 마치 오르페우스가 지하 세계로 내려간 것과 유사하다 말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그 집사는 그들을 저택으로 인도해 왔다는 점에서 극 '에우리디스' 속 '죽음'과 닮아 있고, 따라서 화면을 가득 메우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죽음의 신호처럼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이 갑자기 뚝 끊기고, 갑자기 사라졌던 제1세계, 제3세계, 제4세계가 일순간에 되살아나듯 오르페우스의 자살 장면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뒤이어 앙투안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가 화면을 메운다. 그 다음에는 앙투안의 묘를 찾은 배우들이 되돌아 나오고, 콤파니 드 라 콜롬브 '에우리디스'에서 에우리디스 역을 맡았던 배우가 그들과 마주칠까 어둠 속에 숨었다가 그들이 가고난 뒤에야 다시 나와 앙투안의 묘로 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뒤엔 새로운 '에우리디스'를 공연하는 극장의 전경 장면이 이어진다. "나를 볼 수 있나요?" "이제야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냈소." 뭐 대충 이런 대사가 흘러나오고,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는 영원히 함께 하게 되었다'는 나레이션이 다시 한 번 나오고 영화가 끝난다.

 

  엔딩에 뜬금없이 이어지는 이 장면들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세계의 분할과 경계의 모호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뒤 갑자기 과격하게 그 세계들을 다시 통합해 버리곤, 죽음과 삶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역전시켜 버리더니 그보다 더 쉽게 다시 한 번 재역전시킨다. 앙투안의 부활 장면과 앙투안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 장면 사이에 오르페우스의 자살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 것, 이는 어쩌면 '앙투안=오르페우스'라는 공식을 일러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공식 하에서 영화를 다시 보자.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스를 구하기 위해 지하 세계로 향했고(죽었고), 에우리디스를 죽음 속에 남겨두고 지하 세계에서 돌아나왔으며(부활했고), 에우리디스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다시 죽음을 택한다. 앙투안의 첫 죽음으로 인해 과거 속 '에우리디스'의 배우들은 고지대의 저택으로 모였고 그 저택은 마치 오르페우스가 향한 지하 세계와 대비되는 듯한 곳이다. 거기서 '과거'의 '에우리디스'의 배우들은 '현재 혹은 미래'의 '에우리디스'를 만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수많은 세계의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 분화된 세계들 속에서 '에우리디스'는 계속해서 다른 버전으로 재공연된다. 그와 함께 무너져가는 현실과 환상, 현실과 극, 현실과 거짓의 경계. '에우리디스'가 재공연되면서 반복, 강조되는 생과 사의 끝없는 역전에 대한 논의.

 

  앙투안은 배우들이 자신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자신의 작품이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해 죽음을 가장했다고 말한다. '배우들이 자신을 아직도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은 '배우들이 아직도 에우리디스를 공연할 때의 자신을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치될 수 있으며 이는 현실과 극, 현실과 환상, 현실과 거짓의 경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또한 아직도 자신의 작품 '에우리디스'가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하다는 의미는 '에우리디스' 속 삶과 죽음의 논의가 아직도 유효한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를 구하기 위해 지하 세계로 갔듯 앙투안은 현실과 극, 현실과 환상, 현실과 거짓에 대한 하나의 질문, 삶과 죽음이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위해 죽었던 것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르페우스의 첫 죽음에 이은 부활과 또 한 번의 죽음 역시 앙투안에게서도 반복된다. 앙투안의 부활과 또 한 번의 죽음은 앙투안이 첫 번째 죽음을 통해 던지고자 했던 바로 그 질문을 자기 스스로 몸소 통과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앙투안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제 몸으로 형상화하고, 뒤이은 오르페우스의 자살 장면에서 자신을 오르페우스로 대치시킴으로써 현실과 극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형상화하고, 다시 한 번 죽음으로써 다시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제 몸으로 보여낸다. 그 과정에서 분화되었던 세계는 한 번 통합되었다가 다시 한 번 분화된다.

 

  그 뒤의 묘지 장면에서는 가장 최근에 에우리디스 역을 맡은 배우가 다른 배우들 몰래 앙투안의 묘를 찾고, 그 뒤 장면에서는 '에우리디스'가 공연 중인 극장의 전경이 등장한다. 죽음과 부활과 또 한 번의 죽음으로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스를 영원히 얻었듯, 영화는 그 장면들을 통해 오르페우스와 같은 과정을 거쳐온 앙투안에게 상징적으로 에우리디스를 선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우리디스 역 배우가 다른 배우들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 배우가 다른 배우들과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던져 준다. 어쩌면 다른 배우들과 달리 그 배우는 '배우'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오르페우스를 만나기 위해(앙투안=오르페우스이므로) 제1세계에서 막 튀어나온 '에우리디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볼 수 있다면 묘지 장면에서 앙투안은 극 속의 인물로서의 에우리디스를 영원히 얻은 것이고, 그 뒤 장면에서 '에우리디스' 공연이 다시 한 번 성황리에 치뤄지고 마치 그 극이 영원한 생명력을 획득한 듯 그려지는(따라서 그 극 속의 질문들이 영원히 대중들에게 '재질문'되는) 장면을 통해 극으로서의 '에우리디스'를 영원히 얻은 셈이다.

 

  또한 묘지 장면과 극장 전경 장면은 제1~4세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러나 제2세계의 또다른 판본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인 제2-1세계라는 세계를 창조해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분화되었다가 통합된 세계가 다시 한 번 분화되면서 오히려 그 규모를 더 불린 셈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세계의 분화와 그 경계의 모호함이 곧 현실과 극의 경계를 흐리고 나아가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질문에 공명 효과를 일으켰던 걸 생각해 보면 마지막 장면은 그 두 질문의 힘을 더욱 키울 가능성을 낳으며 끝내는 장면인 셈이다.

 

  "이제야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냈소." 현실의 세계, 제4세계에 속한 우리들은 보통 진짜 현실, 진짜 삶에 대해 질문을 걸길 두려워 하게 마련이다('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 했다'는 제목이 곧 그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우린 진짜 현실, 진짜 삶에 대한 질문을 진정으로 마주한 적이 없고, 따라서 우린 우리가 발딛고 섰다 생각하는 현실, 삶의 그 무엇도 보지 못한 셈이다.). 앙투안에게 있어서 에우리디스나 다름없던 그 두 가지 질문을 우리는 볼 수 없었으나, 이제 이 영화가 우리에게서 그 두려움을 걷어내고 그 질문들과 마주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앙투안은 오르페우스의 길을 따라가며 제 몸으로 직접 그 질문들을 형상화해 가며 그 질문의 힘을 키우는가 하면, 배우들로 하여금 자신이 마련해둔 공간에서 세계를 분할시켜 나가도록 함으로써 그 질문들이 공명을 일으키도록 하였으며(그 과정이 이루어지는 죽음의 공간이 신화의 내용과 정반대로 고지대로 설정된 건, 이 작품이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으로 가능해지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두 번째 죽음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질문을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빚어내는 동시에 쪼개두었던 세계를 한 데 통합시키는 듯하다 오히려 최종적으로 세계를 더욱 쪼개놓음으로써 일종의 충격 효과를 매개로 그 질문이 더더욱 공명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영화 내의 공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그에게 알랭 레네 감독은 영원히 에우리디스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상징적인 선물을 선사한다. 자, 이제 그 질문들을 이어받은 알랭 레네 감독이(엔딩 크레딧 때 흐르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곡 'It Was a Very Good Year'는 이제 90대에 접어든 노감독 알랭 레네 본인의 목소리를 연상케 하는 곡이다.) 최종적으로 묻는다. "현실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지금 대답 못 하겠으면 영화 보고나서라도 계속해서 그 질문을 되새겨 볼 것을 요구하는 게, 그 감독의 마지막 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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