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앤 로빈' 사운드트랙에 보면 스매싱펌킨즈가 부른 'The End is The Beginning is The End'라는 곡이 있다. 해석을 뭐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끝의 시작은 끝이다'라는 식인 것 같다. 영화는 좀 그럭저럭이었지만 아무튼 이 노래는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중 '마지막'이라고 자부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바로 이 노래 제목이 가장 걸맞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배트맨의 가장 위대한 퇴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위대한 퇴장을 이뤄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었을까? 그것은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복습하며 놓치고 간 부분을 차근차근 되짚어내는 '자기반성'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자기반성은 '모든 히어로물'이 놓치고 간 여러 부분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히어로' 배트맨의 끝이 아닌 모든 '히어로'의 끝이 될 것이다.

 


정말 냉정하게 영화적으로 말하자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야기에 있어 좀 어설픈 구석이 눈에 띈다. 악당이 도시를 점령하기까지의 과정이 꽤 기계적이고 흔한 구조를 갖고 있다. 악당이 음모를 꾸미고, 방심한 영웅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구조는 앞서 말한대로 모든 '히어로'물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근래 본 적 없는 무지막지한 적, 베인(톰 하디)을 등장시킨다.


아마 이 영화가 개봉하면 꽤 많은 관객들이 베인과 조커(히스 레저)를 비교할 것이다. 두 악당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조커 내면의 악은 꽤 인간적인 구석이 있으며 그 광끼만큼은 왠만한 사이코패스 보는 것처럼 소름돋고 정교하다. 반면 베인은 무지막지한 점에서는 조커를 압도한다. 나름 자신만의 드라마로 휴머니즘을 가질려고 시도도 해보지만 영화 내내 그가 보여준 무지막지함은 치를 떨 정도 차갑고 강력하다.


베인은 확실히 악당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다. 조커가 보여준 것처럼 '배트맨 내면의 거울'과 같은 개성은 없다. 그냥 나쁜 놈이다. 하지만 이 역시 보편적 히어로물의 특성을 갖추기 위한 장치가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 단순한 장치들로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그 해답은 배트맨(크리스쳔 베일)을 보며 발견할 수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출연분량이 심각하게 작은 영화다. 위기의 도시에서 꽤 오랜 시간 그는 별로 하는 일이 없다. 아마 어떤 관객들은 "트랜스포머2'에 로봇이 안 나와서 불만"인 것과 같은 그것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처럼 그 적은 분량을 미군이 대신하진 않는다. 형사 블레이크(조셉 고든 레빗), 고든 청장(게리 올드만), 도둑 셀레나 카일(앤 헤서웨이), 폭스(모건 프리먼) 등등 영화 속 많은 인물들이 도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이 부분에서는 확실히 그간의 보편적 이야기 구조가 파괴된다. 영화가 끝날때까지도 배트맨이 전면에 나서서 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배트맨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가장 큰 일을 했다. 바로 "영웅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저 옛날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처음 강조된 '영웅의 외로움'을 송두리채 뒤엎어버린 것이다. 외로운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영웅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 가운데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영웅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붓다의 생애처럼 배트맨은 스스로 고행을 하며 그와 만나는 많은 중생들에게 "너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던 헐리우드 영화들 중 보기 드물게 배트맨은 예수가 아닌 '부처'를 다루고 있다.

 


아마 혹자들은 이 영화가 전작 '다크 나이트'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구조는 클라이막스에 이르기 직전까지 상당히 단순하고 보편적이다. 게다가 악당 베인은 파워만 지나치게 강력해서 조커와 같은 쫄깃한 매력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느 히어로물과 다른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필자 역시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모르고 지낼 정도다.


앞서 말한대로 이 영화는 배트맨의 비중이 상당히 적은 영화다. 그리고 그 부분을 많은 다른 캐릭터들이 나눠서 소화하고 있다. 저마다 다양한 캐릭터들은 영화가 흘러갈수록 도시를 구할 영웅으로 점점 성장해간다. 그 과정이 꽤 정교하고 쫄깃하다. 아마 이 영화의 진짜 재미는 시민 하나하나가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있다. 즉, 보편적인 영웅물의 구조를 빌려와서 전혀 새로운 영웅물을 탄생시켰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말이다.

 


필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액션을 참 좋아한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난 그의 액션연출은 CG 일관인 현재 헐리우드 액션과는 다른 묵직한 맛이 묻어난다. 물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액션이 말도 안되게 거대한 규모다 보니 부득이하게 CG를 사용했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이 영화는 디지털 요소를 배제한 채 정성스런 디테일을 연출해낸다. 그 디테일이 주는 감동은 사실적인 시각효과 탓이거나 그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탓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가장 보편적인 히어로물의 구조를 빌려와서 가장 특별한 히어로물을 만들었다. 아마 이 영화 이후에 나오는 모든 히어로물은 이야기면에서 유치한 애들 장난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영웅이다"라고 단정지어 버렸으니 말이다. 이러한 결론은 배트맨이 고담 시민에게 이야기한 메시지처럼 관객들에게도 마음속에 뜨거운 정의감을 고취시킬 것이다. 저 옛날 하늘을 날으는 슈퍼맨이 각인시켜준 정의감보다 이것은 한결 진지하고 깊게 박힌다.

 


앞서 말한대로 이 영화의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제 이 시리즈의 첫번째가 '배트맨 비긴즈'가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쓰베이더의 탄생보다 몇 배는 더 감동적으로, 이 시리즈의 끝은 모든 '배트맨' 시리즈의 시작점으로 회귀한다.

 


여담1) 힘을 가진 무정부주의자는 그 어느 것보다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그들이 '시민'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면 그 공포는 배가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민'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진 힘은 베인의 그것보다 더 강하고 무서울 것이다.


여담2) 앞서 말한대로 이 영화는 배트맨이 별로 하는게 없는 영화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알프레도'(마이클 케인)도 별로 하는 게 없다.


여담3)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면 가장 명확해지는 진실 : 웨인컴퍼니는 스타크 인더스트리보다 돈이 없는 회사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토니 스타크가 뭔 지랄발광을 해도 부도 위기까지는 안 가기 때문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399
441 [영화] 블루 재스민 [30] menaceT 2013.09.29 4148
440 [영화] 인페르노 INFERNO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2] Q 2014.06.18 4144
439 [영화] 스캇 필그림 vs. 더 월드(Scott Pilgrim vs. The World, 2010) [28] hermit 2012.09.22 4127
438 [영화] 실화를 '발견한' 영화 [맨발의 꿈] taijae 2010.06.11 4123
437 [영화] 바바둑 (The Babadook, 2014) <2014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1] oldies 2014.07.23 4121
436 [영화] 불타는 내 마음 (2008) : 적어져 가는 머리카락들 [1] 조성용 2010.03.26 4118
435 [영화] 어떤 자본주의인가, [부당거래] vs [소셜 네트워크] [1] [1] taijae 2010.11.19 4112
434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7] [18] 감동 2012.09.10 4104
433 [영화] 성항기병3 홍콩탈출 (省港旗兵第三集 香港脫出, Long Arm of the Law 3: Escape from Hong Kong, 1989) [1] 곽재식 2011.01.18 4101
432 [드라마] 별은 내가슴에 [9] 감동 2011.02.12 4098
431 [영화] 헝거 게임 (2012) [19] Jade 2012.04.09 4091
430 [영화] 속눈썹이 긴 여자 [1] 곽재식 2010.09.24 4090
429 [영화] 마스터 [1] [1] menaceT 2013.07.13 4085
428 [영화] 브라더스 (Brødre, 2004) : 다른 스타일의 같은 이야기 [2] 조성용 2010.03.31 4083
427 [영화] 아련한 사랑의 기록, 퀴어 멜로 <알이씨REC> [1] 나우시카 2011.11.22 4079
426 [서평] 티에리 종케 - 독거미 (스포일러 있습니다) [10] 화양적 2011.07.23 4079
425 [애니] 주먹왕 랄프(Wreck-it, Ralph, 2012) [2] [3] hermit 2013.01.16 4077
424 [영화] <AK 100> 멋진 일요일(素睛らしき日曜日, 1947) [2] [1] oldies 2010.07.12 4047
423 [영화] 매란방 (2008) [1] abneural 2010.04.28 4047
422 [영화] 드라큘라 (Dracula, 1931) : "Aren't you drinking?" / "Yo nunca bebo… vino." [4] [4] oldies 2010.10.08 404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