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2011.02.16 17:00

레옴 조회 수:3674

느슨한 독서 모임의 첫번째 책으로 이 게시판의 주인장이신 듀나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읽었습니다.

다른분들과 이야기 나누고 난 뒤 (http://djuna.cine21.com/xe/?mid=board&document_srl=1778340) 제 감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동전 마술

소개팅에서 만난 김민영이라는 여자가 보여주는 동전 마술에 매료된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동전 마술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끝내 이야기 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동안 지하도 천장을 바라보다가 채찍이라도 맞은것 처럼 달아나서는 김민영에 대한 파일들을 모두 지워버렸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너무 생략되어있어서 좀 허무하다는 인상이었는데 다른 분들은 책을 여는 글인 만큼 새로운 차원을 소개하는 말그대로 여는 이야기로 적당하다고 생각하신 분도 많은것 같습니다. 그런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첫 이야기는 전체적인 책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고 구매 결정에 영향도 미치는 만큼 좀 더 완결된 이야기를 통해 안정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편안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배치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나치게 "마케팅" 측면에서 생각하는 면도 있습니다만, 일반 독자로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즐거운 책이 좋다는 시각차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구요.

호레이쇼님께서 뒷부분의 작가 후기에 카톨릭 습관이 남아있는 시기에 쓴 소설이라는 구절을 보시고 종교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 그 질문을 보니 김민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종교의 메타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보여준 동전 마술의 원리가 무엇이든 간에 그건 일종의 기적 이었고 그걸 대하는 주인공의 자세는 종교적 추앙이라고 볼 수 있는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부분은 진짜로 무슨 충격적인 어떤것을 보앗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상관도 쓸모도 없는 종교에 집착하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종교 생활을 그만두는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도 있겠구요. 

그런데 이보다는 진짜 무슨 충격적인 무언가를 봐서 겁을 먹었다고 상상해보는 쪽이 더 재미는 있는것 같습니다. 사차원의 틈새로 악마가 낄낄대면서 웃었다든가, 멍한 얼굴로 동전을 계속 던지고 있는 노숙자 늙은이를 보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일상적인 상황에서 비 이성적이고 비 논리적인 일이 벌어졌을때 사람들이 반응하는 모습을 관찰하기. 이런 것도 듀나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인것 같습니다. 예전에 듀나 게시판에서 진행된 릴레이 소설, 은빛 풍선이었던가요? 그것도 그런 느낌이었구요. 잔잔한 호수에 돌맹이를 던져놓고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을 관찰하는 그런 느낌 이랄까요. 작품에 따라 그런 한가지 사건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에서 처럼 그냥 인간은 변하지 않고, 삶은 게속 되는 경우도 많은것 같습니다. 연애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상대였던 해성보여준 너무나도 예측가능한 전형적인 태도 - 바람나서 도망가기 - 는 이런 모습을 더 극단적으로 드러내주죠. 쉽게말하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랄까요.

 

메리 고 라운드

이런식으로 여러사람의 입장에서 서로의 시선으로 한가지 사건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재미있는것 같습니다.  영화 라쇼몽이나 영웅에서 처럼 말이죠. 개인적인 취향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분들도 메리 고 라운드를 재미있게 읽은 소설로 꼽으시는걸보면 저만 그런건 아닌가 봅니다. 물론 그럴 수 있는건 메리 고 라운드에서의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가 좋았기 때문이겠죠? 여기까지 세편이 이야기에 모두 일종의 연애담을 끼고 가기 때문에 이 단편집 자체가 듀게의 축소판이라거나 혹은 듀나님도 듀게를 잘 보고 계시는구나? 뭐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을 비롯 이 단편집에는 SF라고 부르기 어려운 작품들도 많긴 하지만 듀나님이 쓰신 소설이 다른 SF 작품과 비교해서 갖는 미덕이라면 우리나라, 우리 동네가 배경인것 말고도 이런 인물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는 점도 꼽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A,B,C,D,E & F

온라인에서 여러가지 가상 인격들이 만들어지고 그러다 결국은 서로 맺어지는 것은 자기가 만든 자신의 가상인격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온라인에서 작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어떤 사람의 개성과 그속에 담긴 나르시즘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호텔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갑자기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입니다. 이런 시작 방법을 미디아스 인 레스 (medias in res) 또는 인 미디아스 레스라고 하는 군요. 곽재식님의 리뷰에서 알았습니다. 듀게에서 또 하나 배워가네요. 뭐 그런데 이론가도 아닌 저에게 이름은 중요한게 아니고, 이런 류의 SF 소설은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그 세계의 시스템을 파악하는 재미가 있죠. 호텔의 시스템은 알것은 같지만 마지막 까지 영영 알수 없는 부분도 많았던것 같습니다. 왜 하필 이 게임의 이름이 "호텔" 인가 라던가.. "자자 가보 스토리 4편"은 어떤 의미라던가 실제로 있는 무언가인가? 뭐 그런것들이요. 시유의 새 애인이 똥보 놈이 아니라 뚱보 년 이었던것도 저처럼 이성애에 찌든 사람에겐 아주 살짝 혼란을 가져다 주었죠. 이성애이건 동성애이건 상관은 없고, 윤태욱의 성이 아니라 시유의 성을 물려줄 아이가 필요하다던가 하는 부분도 있고 하는 걸 보면 의도적으로 그런 혼란을 만드신것으로 보이고 사실 큰 혼란은 아니기도 하지만 저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독자에겐 작더라도 한번더 생각을 해야하는 것 자체가 노동이 되고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유가 양성애자임을 미리 언질해줬다던가 아니면 이 세계는 원래 그런걸 신경안쓰는 세계라던가, 그도 아니면 하다못해 남편이 "갑자기 동성애자가 된건 또 뭐냐" 라고 소리지르는 장면 하나라도 있었다면 좀 더 친절한 소설이 되었을것 같은데 듀나님 소설이 좀 더 많이 읽히길 바라는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구상이라든가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작품중에 하나에요.

 

죽음과 세금

사람들이 늙지 않는 므두셀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오래 산 인물이라고 하죠. 로버트 하인라인의 『므두셀라의 아이들』이 당연히 떠올랐습니다. 저주받은 망할 기억력 덕택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났지만요. 다시 뒤져보니 하인라인의 므두셀라의 아이들은 1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균의 수명을 갖고있는 상황에서 몇몇 선택받은 종족의 사람들이 불사의 삶을 누리고, 비밀로 유지되던 이 사실이 공개되는 순간의 혼란에 관한 이야기였고, 2편에서는 이 사람들이 우주로 여행을 떠나서 다른 신기한 우주 종족을 만나는 이야기 였네요. 전 1편을 훨씬 재미있게 읽었던것 같습니다. 듀나님의 죽음과 세금은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불사의 삶을 누리게 되고 인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기관에서 인위적으로 수명을 통제하게된다는 것을 전제로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이런 배경도 재미있지만 거대한 기관의 음모에 맞서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해피앤딩을 좋아하는 나이브한 인간인지라 주인공의 반란이 조금 더 성공하기를 바랬는데 아쉽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총에라도 맞아 순식간에 죽었다면 장렬하기라도 했을텐데 평범하고 지루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죽었다는 점이 더 그렇죠. 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합니다만.

 

소유권

듀게에서의 아이돌 열풍도 떠오르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자체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분명 이 소설은 무언가 철학적인 것인지 사회적인 것인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것 같은데 제가 소양이 부족해서 그 쟁점이 뭔지는 모르겠네요. 흔히들 SF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기계가 하는 예술도 예술인가? 라던가 하는 흔한 이야기 이상의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는 소재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야기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 작품은 왠지 더 그 속 이야기를 찾아내고 싶어지더군요. 어쩌면 그냥 그런것 다 관두고 실제 아이돌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으셨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돌이 그냥 생각없고 철없는 어린 아이들로만 보이냐? 그들도 다 나름 생각을 하고 있어! 게다가 그건 너보다 훨씬 더 고차원 적이지. 네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의 속마음을 아이들은 모두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게다가 그들은 이런 결정을 스스로 내렸고 그들은 물론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봤어!" 하고 말이죠.

 

여우골

옛날 이야기 입니다. 전 이런 민담 분위기의 옛날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래서이기도하고 배경은 조선시대이지만 분위기는 현대적인 공포물의 분위기가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이 책의 다른 단편들은 각자 다른 세계관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크게 묶이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단편 하나만은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여우들이 사실은 좀비라던가 드라큘라라던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읽는 내내 생각했었는데 결국 그런건 아니더군요. 리뷰도 원래 조선시대 뱀파이어 이야기를 계획하셨다니 어느 정도 제가 그런 느낌을 갖고 책을 읽은것도 전혀 생뚱맞은건 아니네요.

 

정원사

시스템에 대한 맹신이 가져오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과학자가 긍정적인 성격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해 그의 말로에 대해서는 냉정한 시선의 결말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그도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꼭 그런것만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모습 그대로 나무가 되는건 단순히 흙으로 돌아가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역시 좀 기괴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더군요.  곽재식님께서 리뷰에서 말씀하신 듀나 이후 시기의 요소라는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성녀, 걷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딱 하나를 꼽으라면 이 작품을 꼽고 싶습니다. 분위기도 따뜻하면서 공대생의 로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달까요. 성녀가 인식하는 세계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밤낮이 아주 짧게 반복되니 책에 나와있듯이 세상은 어스름한 회색이고,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전혀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성녀는 어떤 정도의 인식수준을 가지고 있을까요. 세상에 막 태어난 어린아이라서 엄마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세상이 무섭고 낯설텐데 꼭 안아줄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어요. 

 

디북

디북이라는 제목이 유령을 뜻한다는건 게시판에서 phylum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알았네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맨 뒤의 듀나님 코멘트를 보니 유태 전설에 나오는 귀신 디북(dybbuk)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분명 이것도 읽었는데 글자만 읽었지 제대로 파악을 못했네요. 호텔에서 살짝 언급된 메트릭스와 비슷한 육체를 벗어난 가상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은 기계가 더 능률적으로 잘하고, 인간이 할일은 점점 줄어들고, 가상세계가 발전하면서 인셉션에서 처럼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인간의 열 효율은 어떤 운동기관보다 효울적이고.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가상세계의 출현이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 안개바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 바다는 링커 우주가 배경인 소설 입니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 될만큼 비중이 큰 소설이고 그만큼 배경도 방대해서 링커 우주가 배경인 스페이스 오페라가 장편으로 나오길 기대하는 이야기 입니다. 할루키게니아님께서 마티아스 볼츠만의 약자가 MB라고 알려주셨는데. 개인적으로는 마티아스 볼츠만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많이 놀랐습니다. 진화가 그의 책임은 아니잖아요? 진화가 나쁜것도 아니고. 게다가 괴물이라는 관점은 너무 인간 중심적이에요. 새로운 문명과의 충돌로 진화의 물결이 회오라치는 링커우주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전 볼츠만을 옹호해주고 싶었습니다만. MB라니.. MB라니... 전 진화라던가 링커 바이러스의 역할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진 않았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로 읽으신 분들도 계셔서 이것도 신선했습니다.  희망 교회 외계 선교 사역단 버스에서는 저도 정말 낄낄 웃었습니다. 다들 그러셨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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