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가 나온지도 30년이 흘렀다.(딱 내 나이다...) 역시 82년에 개봉한 E.T.(개인적으론 "미지와의 조우"를 훨씬 더 좋아한다. 가족용 영화에 그친 E.T.와 달리 "콘택트"와 비견될만한 진지한 SF다. 뜬금없이 지구 침략하고 미녀나 납치하던 문어머리 화성인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우호적인 외계인이란 설정도 참신하고. - E.T.도 우호적 외계인이란 건 마찬가지지만 시기 상 "미지와의 조우"가 빠르다. - 마지막에 UFO 대선단은 정말 환상적이다.)가 20년만에 리마스터링을 거쳐 개봉했고, 나는 "블레이드 러너"도 개봉 20주년을 맞아 재개봉까진 안 바라더라도 약간의 CG 리마스터링을 거친(아니면 감독 인터뷰 등 최소한의 셔플먼트라도 좀 곁들인) 스페셜 에디션 DVD라도 출시하지 않을까 은근슬쩍 기대를 했다. 뭐 결국 2002년엔 월트컵의 전설 빼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블레이드 러너"가 그리 절대적인 명작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허황되기까지 한 지독스럽게 깔끔하고 밝은 미래 세계에서 벗어난, 도시를 감시하는 듯 육중하게 선 흑회색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초고층 건물이라든지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어둡고 습기찬 뒷골목의 음습한 풍경 등은 멋지지만, 지구에 파견된 안드로이드가 몇 명인지조차 대사가 틀리는 등 "옥의 티" 정도로 눈감고 봐주기엔 꽤 곤욕스러운 단점들도 수없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이드 러너"가 불멸의 명작으로 군림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후의 SF물에 미친 지대한 영향 덕분일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이후의 SF물 중 "블레이드 러너"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SF물은 얼마나 될까? "블레이드 러너"의 그림자는 짙었다. 정말로 짙었다. 

잡소리가 좀 길었다.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작품은 데츠카 오사무 원작, 린 타로우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 각본의 2001년작 "메트로 폴리스"이다. 실로 엄청나게 화려한 제작진 아닌가? 지금은 타계한 일본만화계의 신 오사무, 그를 기리기 위해 린 타로우, 오토모 가츠히로 등 기라성같은 거장들이 뭉친 작품이 바로 본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3인방의 휘황한 이름을 빛내기엔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는 것. 

(이 이하는 상당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메트로 폴리스"는 시대를 초월한 거대한 스케일과 미술로 전설이 된 프리츠 랑 감독의 동명의 1927년작(뭐 불멸의 명작이라지만 70년도 더 된 영화라 못 봤음;; 이 작품 얘긴 그래서 생략)을 바탕으로 한다. 시놉시스에선 약간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인 설정과 스토리 라인(특히 엔딩 씬은 거의 똑같다.)에서는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달라진 시대에 맞춰 애니메이션에는 새로운 주제가 추가되었다. 바로 안드로이드의 정체성... 이 얼마나 블레이드 러너적인 화두인가... 

애니메이션을 보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림체가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톰과 밀림의 왕 레오로 한없이 낯익은 그 그림체...(데츠카 오사무를 기리기 위한 작품이니 당연하지만) 4등신이 될까 말까하고 허벅지에서 발목까지 한일자로 굵기가 똑같은, 귀여운 그림체에 대한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감동을 별로 오래가진 않는다. 

메트로 폴리스의 스토리는 상당히 암울하다. 지상에서 풍요로운 생활은 만끽하는 메트로 폴리탄과 지하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대립, 인간과 기계의 대립, 레드 공과 로크의 애증이 엇갈리고, 결국 노동자 층의 쿠테타, 각성한 기계들의 반란, 메트로 폴리스의 붕괴라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체는 여전히 귀엽고 인물들은 4등신이다. ...한마디로 진짜 분위기 안 살아난다.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티마가 주는 임팩트는 강렬하지만, 잘 살펴보면 티마 혼자 작품의 전반적인 그림체와 동떨어진 그림체란 걸 알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선 데츠카 오사무의 동글동글한 화풍보다는 차라리 공각기동대에서 오시이 마모루가 보여준 리얼한 화풍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반면 전형적인 오사무 식으로 그려진 주인공 케이치나 레드 공, 로크는 4등신 외모 때문에 꽤 심각한 장면에서조차 별로 긴장감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데츠카 오사무를 추모하는 작품이라지만 그림체에 좀 어레인지를 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데츠카 오사무적인 느낌은 살리면서 좀 더 리얼한 방향으로... 오시이 마모루는 자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시로우 마시무네의 공각기동대 화풍을 멋대로 바꿔버리는 만행도 저지르지 않았나.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초반에 잡소리로 길게 늘어놓은 블레이드 러너의 그늘이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티마는 묻는다. "난 누구?" 그리고 총에 맞아 자신이 로봇이란 걸 알게 된 순간 폭주하며 철인의 의자에 앉아 메트로 폴리스를 파멸시킨다. 하지만 난 오히려 티마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냐고...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케이치의 마음이 바뀐 건 아니다. 그녀는 기계들을 적대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작품 내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보다도 기계를 사랑했다. 그럼에도 왜 그녀는 자신이 안드로이드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왜 인간이 아니면 안 되는 걸까? 왜 안드로이드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는 걸까? 왜 안드로이드들은 자신이 로봇이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왜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보다 힘도 약하고, 빨리 죽고("블레이드 러너"는 예외), 추악한 인간이길 바라는 걸까? 왜 이 완전한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불완전한 창조주를 닮고 싶어 하는 걸까? 단지 피조물이기 때문에...? "메트로 폴리스"는 결국 답하지 못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30년 전에 질문을 던졌지만, "메트로 폴리스"는 아직도 그 질문을 변주할 뿐이다. 30년이 지났다면, 납득할 수 있건 없건 뭔가 해답을 던져야 할 시점이 아닐까? "메트로 폴리스"는 이 점에서 실패했다. 결국 남은 것은 "블레이드 러너"의 데드 카피일 뿐... 

비판 위주로 쓰긴 했지만 사실 "메트로 폴리스"는 매우 괜찮은 작품이다. 진지한 장면에선 좀 분위기 깨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살아난 데츠카 오사무의 화풍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이다. 암울한 분위기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이 흐르는 1920~30년대 풍 경쾌한 스윙 역시 낭만적이다. 불멸의 명곡 "I Can"t Stop Loving You"가 흐르며 오만한 거대도시가 붕괴되어 가는 클라이맥스는 정말 파괴의 미학이란 게 뭔지를 보여주며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명장면이다.(스크린에서 봤다면 정말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이다) 다만 너무도 호화로운 3인방 진용에 비하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 뿐이다. 특히 주제 면에선... 

새로운 건 없다. 많이 보던 화풍, 많이 듣던 음악, 많이 들어본 주제... 뭐 애초에 추모를 위한 리메이크작이니 뭔가 참신한 재해석을 바라기란 무리였을지도. 린 타로우 감독에게 원작을 무시한 채 자기 스타일로 소화해버리는 오시이 마모루의 배짱을 바란 건 무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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