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Still Walking, 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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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

10여년전 준페이는 바닷가에서 한 소년을 구한 뒤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은 준페이의 기일입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은퇴한 뒤에도 의사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준페이는 자신의 자부심까지 고스란히 쥐어 넘겨줄 아들 그 이상의 존재였을 겁니다. 그런 유일한 준페이가 사라졌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사라진 준페이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어머니는 가슴 속에서 준페이를 키워 온거죠. 사라지지 않는 아니, 사라지게 둘 수 없는 존재로 말이에요.


준페이의 기일인 오늘, 이곳 저것으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입니다. 하나뿐인 딸은 이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자랐고 사위와 함께 네 가족으로 왔습니다. 평범한 자동차 세일즈맨인 사위는 세일즈맨답게 붙임성 좋고 아들처럼 잘할려고 하지만 사위는 사위일 뿐. 고향 집으로 돌아와 같이 살고 싶다는 딸의 제안이 어머니는 내키지 않아요. 사위가 불편한 게 아니라 이 집을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이겠죠. 차남인 료타는 오래전 도망치듯 집을 나갔어요. 자신에게 준페이의 그늘을 씌우려는 부모들에게서 그 그늘을 걷어내려고 하죠. 늘 부모님은 준페이의 행동과 말을 료타와 헷갈려 합니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료타는 자신에게 씌여진 준페이의 그늘을 매번 실감할 뿐이죠. 료타는 어렸을 적 준페이와 함께 의사를 꿈꿨지만 이제는 미술 복원사의 길을 걷고 있어요. 료타는 아직도 의사 아들에 미련이 남은 아버지와 대면대면한 관계죠. 그런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당당하고 싶지만, 제대로 된 직장도 얻지 못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의사가 되지 않은 료타를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반면 어머니는 사별한 여자와 결혼하려는 료타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요. 여자에게 아들이 있지만 어머니는 그들의 결혼도, 아이도 원치 않아요. 어쩌면 그것 또한 어머니가 료타에게 씌워 놓은 준페이의 그늘이니까요. 어머니에게는 며느리가 있었죠. 준페이의 죽음으로 사별하게된 옛 며느리. 어머니는 료타를 마치 첫째 며느리의 새 남편처럼 생각하는 지도 모르죠. 료타는 료타일뿐이지만 어머니에게 료타는 준페이이면서 동시에 준페이가 아닐 뿐이니까요.


준페이 기일에 모인 가족들의 이야기는 서로의 마음만 또 다시 확인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식들이 떠나자마자 부모는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리지만 떠난 이들은 남은 이들의 기다림을 알아주지는 않죠. 어차피 고향 집 부모님이 기다리는 건 바로 준페이니까요.


준페이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 모습 본 적 있으신가요?


<걸어도 걸어도>를 보며 왠지 저의 어렸을 적 기억과 할머니가 생각나더군요. 제 할머니는 3남 3녀의 자녀를 두셨었죠. 그 중 둘째딸과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으셨죠.

죽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이 7살. 제 나이 7살에 삼촌은 오토바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비가 오던 날,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트럭과 충돌한 사고였죠. 집안 어른들은 명절이면 삼촌의 그날을 이따금 이야기했어요. 삼촌은 여러 번 사고가 났음에도 오토바이를 포기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런 삼촌에게 할머니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며 마지못해 청을 들어 주었고 그게 정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3일장이 끝나고 발인을 하는 날, 상여를 맨 어른들과 온 가족들은 마당에 한 자리씩 차지하며 삼촌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나섭니다. 그날 할머니는 사랑채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셨죠. 그렇게 할머니는  막내 아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셨어요.


시간이 흘러 제가 중학생이 되었고 좁은 두 칸 방에 할머니가 얼마간 머무르셨죠. 매일 집에 들어설 때면 할머니는 작은 방에 걸터앉아 계셨어요. 그리고는 닫힌 현관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죠. 쪽진 머리가 흐트러진 것도 모른채 말이에요. 그때 저는 할머니가 그러고 계신 게 너무 싫었어요. 무섭기도 했거니와 할머니의 그 무거운 기분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으니까요.

세월의 풍파와는 상관없이 집안의 풍파에 대쪽 같던 할아버지가 먼저 눈을 감으시고 일 년 뒤 할머니도 그 뒤를 따르셨죠.


제 기억엔 할머니의 웃음이 전혀 없어요. 막내아들과 함께 웃음을 잃으셨는지도 모르죠.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날 할머니가 작은 방에 걸터앉아 기다렸던 건 수 년 전 가슴에 묻은 막내 아들이었나 봅니다. 준페이처럼 고작 20살 초중반이었을 막내아들 말이에요.


긴 겨울을 버틴 하얀나비가 봄이 되면 노랑나비가 되어 온다는 이야기. 그건 마음 속에서라도 사라지게 둘 수 없는 남겨진 사람들의 간절함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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