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2012.09.22 22:28

hermit 조회 수:2494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 우리나라의 대표적 연기파 배우 중 하나인 황정민과 오랜만에 정극으로 돌아온 차승원 주연, 상업만화계에서도 독특한 화풍과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냈던 박흥용 화백의 유명한 원작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 이름값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되는 영화였다.

 

특히 격동의 역사를 그리면서도 역사적 사건보다는 그 속의 이름없는 개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는데 강점이 있던 이준익 감독이었기에 임진왜란이란 혼돈의 시대에서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만 있을 뿐 꿈이 없던 견주가 황정학을 만나 자유로운 자아로 성장하는, 서정감 넘치는 로드무비 스타일의 원작을 누구보다 잘 그려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한다. 영화는 우선 인물의 설정부터 원작과 다른 길을 간다. 일단 원작의 주인공 견주가 천대받는 서자 출신이란 건 동일하지만, 영화에서 이몽학에 아버지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 달리 원작에서는 누명을 쓰고 관아에서 고문을 받고 버려졌다 황정학에 치료받는 것으로 나온다. 즉 견주와 이몽학은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없으며 원작에서도 둘이 충돌하긴 하나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 개인적인 감정이 섞이진 않았다. 영화에서 견주 대신 전면에 등장한 황정학 역시 원작에서는 대동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인물이며 죽음 역시 자연스러운 병사이다. 즉 황정학 역시 이몽학과 별다른 원한이 없고 둘은 사상이 다르다보니 기름과 물이 겉돌듯 섞이지 못할 뿐 서로 적대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영화에서 왕이 되려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스승을 죽이고 대동계를 이용하며 친구조차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냉혈한으로 그려진 이몽학이지만. 원작에서는 목숨을 취하는 대신 갓을 베어 항복을 받고 갓을 쓰지 않은 상대(즉 평민)에겐 칼을 뽑지 않는 정말 학처럼 고고한 의인(義人)에 가깝다. 원작에서 세 인물의 행보가 가끔 엇갈릴 때도 있고 서로 부딪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 갈길 가는 쪽에 가까운 반면 영화에서 이들의 관계는 친구의 원수, 아버지의 원수로 쫓고 쫓기며 훨씬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원작은 천한 신분의 광대가 탈 뒤에 숨어서는 거침없이 세상을 비웃으며 제 할말을 다 하고 살 듯 칼 뒤에 숨어 자유로운 자아를 만끽하는 황정학과 그를 따르며 울분을 버리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견주, 그리고 불의한 세상과 치열하게 싸워 세상을 바꿔보려는 이몽학을 그리며 세 인물의 꿈을 모두 존중한다. 물론 황정학의 후계자인 견주를 달에, 이몽학을 구름에 빗대어 '달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며 은근히 견주의 편을 들기도 하지만 고통받는 민초를 외면한 채 자기수양에만 매진하는 견주보다 꺾일망정 불의한 세상에 치열하게 맞선 이몽학을 사랑한 독자 또한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반대로 세 인물의 꿈을 모두 헛된 것으로 그린다. 이몽학은 입으로만 대동을 외칠 뿐 외적에 나라가 망하는 중에도 백성을 지키는 대신 옥좌를 탐하는 권력욕의 화신이고, 황정학은 다 같이 사는 대동의 길을 꿈꾸지만 혼란한 세상에도 "여립이, 세상이 미쳐돌아가네..."라며 탄식이나 할 뿐 정작 대동을 이룰 대안도 의지도 없는 무력한 이상주의자일 뿐이다. 견주는 울분에 휩싸여있긴 하되 그게 세상에 대한 분노인지 아버지를 죽인 이몽학에 대한 분노인지조차 불명확한, 영화 표현대로 "꿈 없는 개자식"이다. 그나마 셋 중에선 남의 여자일지언정 백지도 품어보고 주인 잃은 빈껍데기일지언정 잠시 옥좌에도 앉아보고 복수에도 성공한 견주가 나름 나아보이지만 복수에 성공한 그가 과연 조금이라도 행복해보이던가?   

 

이준익 감독은 원작을 망쳐놓았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망쳐놓았다. 강물이 합쳐지기도 하고 다시 갈라지기도 하듯 서정적이고 유려한 인물들의 삶을 복수극이라는 뻔한 틀에 가둬놓고, 각자의 꿈을 쫓아 치열하게 살던 매력적인 인물들을 각각 권력욕에 미친 냉혈한, 무능한 몽상가, 아무 성장도 이루지 못하고 가진 꿈조차 없는 개자식으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난해한 점은 이 모든 것이 의도적이란 것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세 인물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이 되지 않도록 하고 의도적으로 이들의 모든 행동을 헛되게 만든다. 왜적이 쳐들어와 당장 모두 죽을 마당에 빈껍데기에 불과한 옥좌가 왜 필요하고 대동이 무엇이며 복수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영화를 보고 난 뒤 관객들에게 남는 건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무력감 뿐이다.

 

차라리 이몽학은 제쳐두고 현실에 초탈한 듯 거침없는 황정학과 그를 통해 세상 대신 자신의 틀을 깨부수어 진정한 자유를 배우는 견주에 집중하여 서정적인 로드무비 성장기로 만들었으면 좋을 뻔 했다. 아니면 차라리 이몽학에 집중하여 불의한 세상과 신분질서에 맞서 혁명을 꿈꾸었던 협객의 비극적 서사시를 그렸어도 좋을 뻔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원작의 팬들에게도 사랑받았을테고 흥행에서도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상업영화계의 이단아답게 이번에도 다른 길을 갔다.격동의 역사에서도 항상 시대가 아닌 개인을 그려오던 그지만, 이번만큼은 반대로 원작의 매력적인 인물들을 버려둔 채 시대 자체를 그린다. 그것도 지독히도 무력했고 지독히도 답답했던 역사의 부끄럽고 아픈 기억을... 두 번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보고 나면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이 오히려 답답함만 가슴에 쌓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작역시 아니다. 어쨌든 감독이 전달하고자 했던 바를 완벽하게 전달한 영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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