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007 skyfall

2012.11.04 16:07

ML 조회 수:6316

MANRULES

새로운 007 영화가 나올 때 마다,작품의 시대 배경인 냉전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선배 Bond들을 죄다 소환해 일일이 비교 대조하는 작업을 하는 비평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글쎄요.그간 전 그런 종류의 Bond 영화 비평들에 대단히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전 Bond 영화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은 그 작품이 사나이들의 혈기를 얼마나 자극했는가,(그래서 얼마 만큼의 돈을 벌었는가,)오로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오십년 세월을 이어온 시리즈’,‘냉전 시대의 산물’같은 수식어들은 007 시리즈의 ‘출발점’이지만 그것의‘본질’은 아니라는 것이 비평가로서의 제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선배 Bond 소환하고,냉전에 대해 언급하는 따위의)이 불가피해진 순간이 왔습니다.그것도 비평이 아닌 제작의 단계에서 말입니다.냉전이 끝났거든요.여전히 남자들은 근육질 몸에 싸움 잘하고 어딜 가도 미녀가 따라붙는 남자 주인공을 동경하지만,그런 건 Bond가 아니어도 많죠.〈007 skyfall〉은,냉전이 끝났고,젊은 후배 첩보원들이 이미 영화 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음에도 Bond가 계속 현장에 남아야 할 당위성은 무엇이고,Bourne 요원이 채워줄 수 없는 Bond만의 ‘그 무엇’이 무엇인지,극 중에서,관객들 앞에,심지어 투자자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태생적 부담을 끌어안고 기획된 작품입니다.

 

부담은 또 있습니다.‘M’을 연기한 Judy Dench는 이제 다음 작품에의 출연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가 됐습니다.그는 Bond와 달라요.후임 M은 있을 수 있어도 Judy dench를 대체할 인물은 없습니다.극중 가장 중요한 조연을 퇴장시키는 일은 고민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죠.

그것 뿐입니까.007 탄생 50주년이랍니다.이를 기념하기 위한 장치도 영화 곳곳에 심어야만 합니다.

 

독립된 Bond 영화로서 제 기능을 하기 전에,해결해야하는 숙제가 너무 많은 기획이었던거죠.

 

다행히도 영화는 이 모든 과제를 훌륭히 수행해냈습니다.기존 관객들은 영화를 어떻게 볼지 모르겠습니다.Bond girl은 십분도 안 나오고,뛰고 싸우고 터지는 장면들은 거칠고 멋있다기보다는 ‘아름답습니다’.그러나 Bond 영화이기 이전에 하나의 영화로서,그리고 지난 반세기 007과 앞으로의 007을 이어주는 가교로서,영화는 확실히 제 할 몫을 해내고 있습니다.작품 자체가 그냥 ‘007 시리즈 유지의 당위성’에 대한 하나의 연설이에요.특히‘냉전마저 끝나버린 마당에 은둔형 첩보원이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예 극중에 청문회 장면을 마련해서 그 대답을 M의 대사로 직접 처리해버립니다.‘폭력의 동기’는 이제 국가에서 개인으로 이동했고,겉으로 드러나는 국가의 공격이 아닌 그 속을 알 수 없는 한 개인의 위협이야말로 더욱 치명적이다.그렇기 때문에 MI6,나아가 ‘double O’로 시작하는 첩보원들의 역할이 오히려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그녀의 대답이죠.답변 과정에서 Tennyson의 시가 등장하고,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로 위장해 스스로를 ‘보이지 않게’만든‘위협적인 개인들’이 청문회장에 총을 난사합니다.구시대적이라며 M을 공격하던 장관은 그 위협을 눈으로 보고,자신이 구시대적이라 비난한 단체의 예비 수장 덕에 목숨을 건지죠.청문회 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는 퇴장하지만,아마 어딜 가서도 더 이상‘Bond 무용설’을 외치진 못했을겁니다.그 장면을 본 관객들,투자자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M이 ‘말’로서 시리즈 유지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동안,Bond는 철저히 개인적 동기로 작동하는 악당과의 결투도 얼마든지 멋질 수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합니다.Javier Bardem 역시 악당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냉전 괴물이 아님에도,그는 역대 그 어떤 007 악당보다 강렬하고 매력적입니다.

 

주어진 숙제들을 이토록 기가 막히게 소화한 탓에,역대 007 작품들에 대한 헌정이나 존경을 직접 드러낸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skyfall은 개별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하나만으로 연작 탄생 반세기 전체를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M의 장엄한 퇴장도,시의 적절한데다 그 울림도 무척이나 강해 작품의 상징성을 더욱 선명하게 해 주지요.

 

각본의 힘이 컸습니다.단순히 숙제만 잘 마친 게 아니에요.전 위에도 언급한 ‘청문회 장면’을 포함해,영화의 기호와 상징들이 무척이나 영리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군요.악당의 첫 등장을 보세요.‘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bond와 자신을 땅굴에 갇힌 두 마리 생쥐로 비유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이 장면은영화사 백년을 아울러 ‘악당이 늘어놓는 장광설’중 최고로 쳐도 좋을 장면입니다.(뒤에 이 둘이 정말 쥐새끼처럼 땅굴 속에서 쫓고 쫓기는 상황이 되는 건,일종의 영국식 농담이죠)영화 시작과 동시에 오발탄에 맞아 폭포에 떨어져 ‘사실상 사망’으로 처리되는 장면은,007 반세기를 기념하는 이 작품의 목적이 단순한 ‘추억’이 아닌 또 다른 반세기에 대한 부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이는,‘취미가 뭐냐’는 악당의 질문에 ‘부활’이라고 답하는 bond의 대사,그리고 후반부,bond가 어린 시절 통과의례를 거쳤던 땅굴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장면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총이란 총은 다 팔고 아버지 엽총만 남겨놓은 아저씨는 어떻습니까.아버지 세대의 가치에 대한 존경과 긍정을 이보다 명료히 드러낼 방법이 있을까요.어리고 경박하지만 bond와 한편인 Q의 위치,그러니까,bond의 구시대적 가치와 우열을 겨루지만 결국 bond의 편이고,그러면서도 결코 새로운 007이 될 수는 없는 그의 지점은 십대 이십대 영화 소비자들에 대한 애증어린 초대의 손짓으로 읽힙니다.

 

007 관객들은 언제나 임무를 근사히 완수한 Bond의 후련함을 공유하며 상영관 밖을 나섰었죠.그러나 skyfall의 관객들은 임무 수행 후 미녀와 놀아나는 Bond 대신 장렬한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아야 합니다.심지어 악당에 대해서도 연민을 품어야 해요.(그의 마지막 행동을 보세요.)그러나 냉전의 굴레를 벗어던진 007은 이제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보입니다.상징적 어머니였던 M을 보내는 일은 분명 슬픈 일이죠.마치 냉전이라는 배경을 떠나 보내는 것 처럼 말입니다.하지만 부모로서의 상징성이 없는 후임 M을 자기 상사로 덤덤히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한 그가,상징적 어머니를 잃은 직후 다시 한 번 성장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극의 중반,Bond는 자신에게 오발탄을 쐈던 후배에게 이런 농담을 합니다.‘그 덕에 쓸데없는 장기 몇 개 내다 버리고는 더 가벼워졌어.’오발탄 때문에(영화적으로)사망했다 부활한 이의 대사인 만큼,함의는 분명하지요.

 

Skyfall의 후련함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그 어느때보다 가벼워진 Bond의 새로운 오십년을 기대해 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3595
424 [애니] 주먹왕 랄프(Wreck-it, Ralph, 2012) [2] [3] hermit 2013.01.16 4082
423 [드라마] 다섯 손가락 [1] 감동 2013.01.15 3656
422 [anff] 더 헌트 [1] [1] kick&push 2013.01.14 4511
421 [애니] 공각기동대 : SAC(Ghost in the Shell : Stand Alone Complex, 2002) [5] [207] hermit 2013.01.12 9555
420 [영화] 마진콜 [3] 눈씨 2013.01.09 3341
419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1] menaceT 2013.01.07 3793
418 [영화] 2012년 최고의 디븨디 열편- 블루레이 열한편 (북미 리전코드 1 및 A 중심) [18] [21] Q 2013.01.03 10426
417 [영화] [프로메테우스] 진화론으로 푸는 우주적 미스터리들... (스포일러 有 // 이미지 수정 완료) [4] [1] 또롱또롱 2013.01.03 5038
416 [드라마] 황제의 딸 [2] [1] 감동 2012.12.31 3540
415 [영화] 피에타 [1] menaceT 2012.12.25 3149
414 [영화] 파우스트 [11] menaceT 2012.12.25 2985
413 [영화] 신의 소녀들 [4] menaceT 2012.12.25 2308
412 [영화] 아무르 [1] menaceT 2012.12.23 2840
411 [영화] 대학살의 신, 돌이킬 수 없는 [3] 비밀의 청춘 2012.12.07 5987
410 [영화] 나의ps파트너 [13] ML 2012.12.06 4332
409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The City of Lost Children, 1995) [21] hermit 2012.12.06 3962
408 [영화] 홀리 모터스 [2] [10] menaceT 2012.12.04 4951
407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211] menaceT 2012.12.04 5541
406 [애니] 인랑(Jin-roh, 1999) [15] [1] hermit 2012.11.29 7594
405 [영화] 창 [1] [18] ML 2012.11.18 462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