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람보(First Blood, 1982)

2013.02.18 10:49

hermit 조회 수:7894

 

 

개인적으로 가장 어이없게 생각하는 시리즈 중 하나가 람보 시리즈입니다. 어느새 미국적 마초 영웅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람보지만, 그 1편은 미국적 가치를 옹호하기보단 오히려 비판하는 영화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_-;;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람보는 로키 산맥 근처의 친구를 찾아나서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입니다. 람보의 부랑자 행색이 맘에 들지 않은 보안관은 람보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종용하지만 람보는 이에 따르지 않고, 보안관은 억지죄목으로 그를 체포하죠. 구치소 안에서 물대포를 맞으며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던 람보는 베트남전 당시 고문당하던 악몽을 떠올리고, 급기야 난동을 부리며 탈주합니다. 이후 산으로 도망친 람보가 서바이벌 기술을 활용해 자신을 추적하는 경찰들을 격퇴하고, 그를 사살하기 위해 주방위군까지 투입된 상황에서 외로운 전쟁을 벌이는 것이 람보 1편의 줄거리입니다.

 

뭔가 기대와 많이 다르지 않나요? 람보가 맞서싸우는 것은 외부의 악당이 아니라 미국의 보수적인 백인(로키 산맥 근처라면 아마 콜로라도 주가 아닐까 싶은데 이곳은 전통적인 공화당 지역이며 스킨헤드들이 흑인을 살해하는 등 백인우월주의 색채가 강한 지역으로 알려져있죠.)입니다. 싸우는 이유 또한 애국심이나 미국적 가치 수호 등 개풀 뜯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보완관과 경찰들에 맞서 살아남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싸움이고요. 1편의 람보는 외부의 적에 맞서 미국적 가치를 드세우는 국가영웅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이후 갈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다 얼떨결에 미국 정부와 싸우게 된 반영웅 캐릭터죠.

 

주방위군까지 투입되지만 번번히 람보에 농락당하고, 결국 그를 설득하기 위해 람보의 옛 상관이 찾아오는데 그들의 대화는 이 영화의 진정한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옛 전우들은 모두 고엽제로 죽었다", "전쟁 때는 수백만 달러 짜리 장비도 맘껏 사용했는데 전쟁이 끝난 뒤 나는 몇 달러조차 벌 수 없는 무능력자다"라고 절규에 가까운 불만을 쏟아내는 람보의 모습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지만, 돌아온 뒤 얻은 건 부상과 살인자라는 반전단체의 비난 뿐이었다"라고 외치던 7월 4일생의 톰 크루즈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람보 1은 액션에 기댄 B급영화임에 분명하지만, 그 성격에서는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전영화에 가깝습니다. 이런 그가 이후 어쩌다가 미국의 대표적 싸구려 마초영웅으로 전락한 건지...-_- 특히 3편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 "이 영화를 용감한 아프가니스탄 국민에게 바칩니다."라고 나옵니다. 영화 당시엔 미국이 소련에 침공당한 아프가니스탄을 응원하는 편이었다지만 부시 시절 미국을 떠올리면 정말 어이가 반쪽... -_-+

p.s. 람보의 엔딩 씬도 꽤 특이합니다. 여느 싸구려 액션영화였다면 람보가 "미국을 구원해줘서 고맙네"란 정부 고위인사의 입에 발린 소리를 듣고 승리의 환호를 지르며 옆에 있는 골빈 금발미녀와 키스하는 걸로 끝났겠지만(...써놓고보니 언더시즈 1편 엔딩... 언더시즈도 좋아하는 영화인데;;), 람보 1은 매우 현명하게도(그리고 현실적이게도) 주방위군을 따돌리며 경찰서까지 침입했지만 결국 상관의 설득에 보안관에 결국 복수하는 걸 포기한 람보가 수갑을 찬 채 순순히 연행되고, 그걸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상관의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결국 개인은 부당한 공권력을 이길 수 없는건지... 씁쓸하지만 매우 맘에 드는 엔딩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388
761 [영화] 활 (김기덕) [30] 비밀의 청춘 2013.04.21 11489
760 [영화] 아저씨 (The Man from Nowhere, 2010) [5] [22] 푸른새벽 2010.08.18 11458
759 [영화] 2010년, 각별히 기억에 남는 영화 [4] [201] oldies 2011.01.08 11451
758 [드라마] 프로듀사 감동 2015.06.21 11074
757 [영화] 스플라이스 Splice (사라 폴리, 애드리언 브로디 주연- 약간 15금 적 글쓰기 표현 있음) [5] [23] Q 2010.06.23 11032
756 [영화] 라쇼몽(羅生門, 1950), '인식의 주관성'은 이제 그만 [1] [1] oldies 2010.06.01 10940
755 [영화] 2010년 최고의 디븨디/블루 레이 각 열한편씩 스물두편 [8] [21] Q 2011.01.03 10623
754 [소설] 도리스 레싱 - 런던 스케치 [3] 푸케코히 2010.07.06 10485
753 [영화] 2012년 최고의 디븨디 열편- 블루레이 열한편 (북미 리전코드 1 및 A 중심) [18] [21] Q 2013.01.03 10410
752 [책]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12] [206] 어둠의속 2010.08.24 10393
751 [영화] 몽상가들 (2003) [1] [16] CsOAEA 2014.03.07 10362
750 [영화] 설국열차 Snowpiercer (봉준호 감독) [12] Q 2013.07.25 10284
749 [영화] 익시젼 Excision <부천영화제> (19금: 혐오를 유발하는 비속어표현 포함) [1] [23] Q 2012.07.26 10238
748 [애니메이션, 만화책] 방랑소년 - 여자아이가 되고싶어하는 소년의 이야기 - 등장인물열전과 1화 이전의 이야기들 [2] Ylice 2011.01.23 10217
747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15] [2] lonegunman 2012.07.21 10115
746 [영화] 맨 오브 스틸 Man of Steel (캐릭터 디테일에 관해 약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7] [396] Q 2013.06.15 9905
745 [영화] 인셉션 Inception [6] [195] 곽재식 2010.07.25 9844
744 [영화] 2016년 최고의 블루 레이 스무 타이틀 [6] Q 2017.01.07 9827
743 [드라마] BBC Sherlock, 7-1, 7-2. [4] [17] lonegunman 2011.02.26 9714
742 [영화] 인셉션 Inception 제 1 부 (스포일러 없음) [11] [1] Q 2010.07.21 968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