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이 영화를 보았던 건 고등학교 때이다. 부모님이 주말에 동반여행가셔서 간만에 늦은시간까지 TV를 독차지한 채 늘어져있었고, 아마 EBS에서 이 영화를 해줬던 것 같다. 꽤나 늦은 시간이라 반쯤 졸면서 보느라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때투성이에 넝마가 되다시피 한, 사이즈마저 헐렁한 양복을 입고 기타와 카타나를 맨 채 황무지를 거닐던 주인공의 모습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영화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다시 이 영화를 발견했을 때 그 반가움이란!

 

대부분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 오래전 그토록 갖고 싶었던 걸 손에 넣었을 땐 막상 실망하기 마련이라지만, 이 영화만큼은 예외였다. 거의 10여년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내 기억에 남아있던 것만큼이나 강렬했고, 내 기억보다도 훨씬 더 미친 영화였다.

 

1957년 핵폭탄이 떨어지고 미국은 소련의 침공에 의해 멸망한다. 라스 베가스만이 마지막 자유의 보루로 남게 되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왕에 오르게 된다. 40년이 흐른 뒤 Rock'n'roll 의 왕이 세상을 떠나고 베가스는 새로운 왕을 필요로 한다. 베가스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각지에서 기타리스트들이 모여든다.

 

...참으로 범상치 않은 인트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후의 진행은 더욱 범상치 않다. 포스트 누클리어 웨이스트랜드(Post Nuclear Wasteland. 핵전쟁 이후 문명이 쇠퇴하고 야만으로 돌아간 폐허의 미래를 그리는 세계관. 영화에서는 매드맥스 시리즈가 대표적이고 게임 폴아웃 시리즈와 만화 북두의 권도 이 세계관을 모티브로 한다고 알려져있다.)와 락앤롤이 짬뽕된 이 정신나간 세계는 기괴하지만 가볍고 음울하지만 동시에 또 유쾌하다. 시끌벅적하고 심지어 초현실적이기 한 이 세계는 시종일관 흐르는 경쾌한 락앤롤 음악과 어우러지며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 정신나간 세계에서 더욱 빛나는 것은 강렬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이다. 특히 주인공 '버디'의 매력은... 이건 도저히 적당히 표현할만한 단어가 없다. 작은 키, 부스스한 머리에 잔뜩 때묻은 얼굴과 커다란 뿔테안경... 남의 것을 얻어입은 듯 헐렁한 사이즈의 다 찢어져가는 양복... 도무지 멋을 찾기 어려워보이는 외모지만 그의 동작 하나 하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정말로 쿨하다.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동차 본넷 위에 드러누운 채 전설의 1957년제 할로바디 기타를 튕기거나 귀찮은 듯한 목소리로 "날아가렴 나비야, 날아가버려"를 내뱉을 때 그 쿨함은 절정에 달한다.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키드를 달린 혹마냥 무척이나 귀찮아하면서도(뭐 달린 혹이 맞긴 하지만) 그 때문에 온갖 고생을 사서 하는 츤데레스러움도 매력이고 평소의 심드렁한 과묵함과 달리 액션 씬에서는 괴성을 지르며 온갖 똥폼을 다 잡는 언밸런스함조차 멋지다.(...필자가 이 캐릭터에게 단단히 콩깍지가 씌인 관계로 칭찬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이해해주기 바란다...=_=;; 하지만 이 캐릭터는 정말로 끝내주게 쿨하다) 이 버디의 매력은 상당부분 주연배우 제프리 팰컨에 기인하는데, 미국인임에도 홍콩에서 자란 탓에 주로 홍콩 영화에서 싸구려 악당 역할로 커리어를 보낸 무명배우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각본과 주연, 심지어 음악에까지 참여하며 주인공 버디에 완벽하게 빙의되었다. 이외에도 때론 짜증나지만 때론 귀여운 키드, 작중 끔살당하긴 하지만 영화에서 흐르는 신나는 락앤롤 트랙들의 연주 뿐 아니라 직접 영화에 출연까지 한 밴드 Red Elvises, 건즈앤 로지즈의 기타리스트였던 슬래시의 좀비 버전처럼 생긴, 무려 데스메탈의 힘을 통해 락앤롤을 무찌르고 베가스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악역 데스와 그의 밴드, 키드를 잡아먹으려 하며 짧은 출연분량에도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미치광이 가족(당시 즐기던 폴아웃 3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황폐한 세계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밝고 건강한 가족이지만 실은 친근하게 손님을 맞은 뒤 약을 먹여 재우고는 식량으로 삼던...=_=)까지 이 영화에는 한번 보면 결코 잊기 힘든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영화의 액션 씬 역시 인상적이다. 무명의 초짜감독이 연출한 대학졸업작품(!)인 탓에 저렴한 제작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고, 아무리 베어도 피 한방울 안 난다는 것은 참 아쉽기 그지없지만, 홍콩 액션영화에서 커리어를 보낸 배우답게 제프리 팰컨이 보여주는 몸액션은 상당히 뛰어나다. 특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러누워 기타나 튕기고 있다가 어느새 기타 뒤에 숨겨진 칼을 빼어들고 괴성을 지르며 적에게 돌진하는 모습은 그 과장된 느낌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그 과장된 느낌 덕분에) 엄청난 쾌감을 준다. 의외로 액션의 합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 특히 버디 혼자 백여명의 소련군(미국은 점령했지만 이놈들도 본국으로부터 지원이 끊겨 상거지꼴...-_-;; 그냥 쏴버리면 안되냐는 부하의 질문에 "우린 더 이상 총알이 없잖아, 멍청아!"라고 성질내던 대장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을 맞아 벌이는 혈전은 짙은 비장미마저 서려있다. 이 전투에서 너무 힘을 뺀 나머지 정작 최종보스인 데스와의 결전이 지나치게 허무하게 끝나는 감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감독은 이 작품이 오즈의 마법사를 모티브로 한다고 밝혔으니 탓할 바는 아니다.(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베가스의 모습은 대놓고 오즈의 마법사 속 에메랄드 시티를 오마주한 장면이기도 하다.) 버디의 안경과 옷을 입은 키드가 기타를 맨 채 터벅터벅 베가스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 모습이 점점 버디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마지막 장면 역시 진부할 수도 있지만 매우 인상적인 시퀀스다.

 

음악에서는 가끔은 무명가수나 밴드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생의 명곡을 남긴 채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내게 그런 영화다. 감독인 랜스 문기아나 주연배우인 제프리 팰콘 모두 이 영화 이전엔 철저히 무명이었고, 이 영화 이후에도 별다른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모든 재기와 능력을 이 한 작품에 쏟아붓고 탈진한 것마냥, 이 영화만큼은 정말 뛰어나다. B급일지언정 그 충만한 센스는 재기발랄하며, B급 특유의 키치함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다. 정신나간 세계관과 가벼운 분위기의 락앤롤 음악이지만 이 둘이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어느새 이 우스꽝스러운 세계와 이야기는 모두 현실이고 지극히 진지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이 영화는 머리로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를 머리로 보려는 순간 영화의 비현실적인 설정과 엉성한 플롯, 제작비의 한계가 드러나는 몇몇 장면들은 당신을 괴롭게 할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도 믿어보기로 하고 가슴을 여는 순간, 이 영화는 어쩌면 당신을 사로잡을지도 모른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많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만큼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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