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주 (2009)

2012.06.25 20:18

violinne 조회 수:3626

                         

 

 

 

 

 

파주를 보는 동안 몇번이나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도무지 영화가 끝날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한숨만 계속 내쉬었다.

저 안개때문이다. 마침내 영화의 엔딩이 다가오자 나는 파주의 안개를 손으로 휘휘 저어 없애버리고 은모를 중식과 대면시킨 후 은모가 중식의

뺨을 후려갈기는 것을 보고 싶어져 몸이 근질거렸다. 중식이 은모의 뺨을 후려갈기는 거라도 좋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해소되지 않는 불덩어리를 안고 찬 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사정없이 상대의 뺨을 후려쳐서 이 영화를 끝내주길 바랐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또다시 은모와 중식, 제자리에서 서글픈 맴을 도는 사람들, 한발짝 다가가면 두발짝 뒷걸음치는 사람들,의 관성의 법칙에 따라

파주로부터 도망치는 은모와 또다시 혼자 남겨짐을 감당해야하는 중식으로 도돌이표 처럼 되돌아왔다.

 

 

파주는 경기도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주'는 사실 경기도에 위치한 작은 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파주는 실제하는 도시라기 보다는 공간과 시간의 우연한 교차점에서 태어난, 위태롭게 존재하는 또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그 세계에서는 21세기에도

공중전화가 요긴하게 사용되고, 젊은이는 허름한 슈퍼 한 구석에 놓여진 식탁에서 술을 시켜 마시며, 아가씨들은 '호박 나이트'로 놀러 간다.

여고생은 트럭에서 브래지어를 고르고, 신혼 부부의 방에는 미등이 아닌 새빨간색의 전등불이 켜진다. 시간이 의도적으로 퇴행한 곳이 파주의

세계다. 그러나 과거만이 그곳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용역을 빙자한 공권력에 맞선 '재개발 반대 투쟁'이 벌어지는 장면들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주요 건물은 오히려 현재의 공간감을 불러일으킨다.   

파주의 세계는 20년도 더 오래 묵어 이미 사라져버린 잔상 같기도 하고 지금 현재를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중식은 서울에 위치한 대학에 다니며 운동하다가 경찰에게 쫓기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내려온다. 은모는 언니와 둘이서 살며 중식의 집에서 운영하는 

교회에 딸린 조그만 공부방을 다니고, 중식은 공부방 선생님이 되어 은모와 아이들을 가르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모의 언니와 중식은 결혼한다.

그 신혼집에 은모도 함께 산다. 언니와 중식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던 은모는 서울로 가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가출하던날, 은모는 예기치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가 은모의 언니를 죽인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출했던 은모는 얼마후 돌아왔지만 중식은 은모의 실수를 함구하며 언니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다른 말을 지어낸다. 은모와 중식은 새 집으로 이사하여 둘이서 함께 산다. 어느날, 한 때 중식과 사랑을 나눴던 여인이 중식의 집에 찾아와
머무르고 은모는 파주를 떠나버린다.

몇년 후, 어른이 된 은모가 파주로 되돌아 온다. 그녀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철거촌 주민들이 한데 모여 투쟁하고 있는 건물에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중식과 마주친다. 또다시 도망치려고 하는 은모에게 중식이 그녀 언니의 사망 보험금 일억원의 수혜자가 은모로 되어있음을 알려준다. 

은모는 강렬한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고자 한다. 동시에 그녀는 중식을 경계하면서도 자꾸만 그에게 빠져든다.

 

 

중식은 예수처럼 숭고한 인물이다가도 욕정을 이용한다. 우선 여인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면 중식은 그녀들과 잔다(혹은 자고자 한다). 첫번째로는

선배의 여자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욕정이 동해 함께 침실로 들어가고(중식과 여자가 침실에 있는 동안 유모차를 타고 부엌을 돌아다니던 여자의 아기는

끓는 물에 심각한 화상을 입는다), 결혼 후에는 등에 있는 화상자국 때문에 중식의 화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은모의 언니를 거부하다가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결심했다는듯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서 처음으로 은모가 그녀의 속내를 조금 내보이자 중식은 말을

하다 말고 그녀를 덮치려고 한다. 무언가 다른 해결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그는 육체로 돌아가는것 같다. 그게 중식의 방식일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만인의 죄를 짊어지고 파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투쟁에 참가한 모든 철거민들을 대신하여 자신 혼자

구속되겠다고 선언한다. 잘못은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 놓고 철거민들에게 와서 죄를 사함 받고자 한다. 은모의 언니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와 결혼해 놓고, 

그녀가 죽어버리자 은모에게 보험금이 지급되도록 함으로서 죄책감을 견디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하나님은 아흔 아홉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마리의 양이 더 소중하다고 하셨어."        

 

 

 

 

 

은모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그녀의 무의식적인 의지가 언니를 죽였다. 그녀는 또한 자신을 길러주고 보살펴준 중식을 배신하고 그의 통장을 훔쳐서 서울로

상경한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중식을 세 번이나 배신한다. 처음에는 그녀의 언니를 죽게만든 후 처참한 현장만을 남기고 사라지고, 두번째는 중식의 선배의

여자가 중식을 찾아오자 예고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3년후에 나타나서는 감옥에 중식을 남겨두고 파주를 떠난다. 그 때마다 중식은 너무나도 소중했던 존재가

어느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삶을 버텨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두 번이나 그녀에게 물었을 것이다. "왜 그랬니?"

 

 

은모의 감추어진 욕망은 중식의 것처럼 갑작스럽고 절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미묘하고 은밀하게 구현된다.

첫 장면에서 은모는 택시를 합승하고 파주의 밤거리를 지나는데 택시 기사는 앞좌석의 은모와 뒷자석의 중년 남자(이경영)를 빗대어 야한 농담을 던진다.

이경영과 은모는 영화에서 총 세 번 만나는데 그 때마다 이경영은 새까만 수트를 차려입고 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다. 그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하는

느낌을 주며, 마치 '성(性)과 '어둠'을 동시에 구현하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경영과 함께 파주에 들어선 은모는 다시 이경영과 함께 파주를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은모가 오토바이를 타고 파주를 벗어날때, 그도 파주를 떠나 어디론가 간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까만 세단의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낸다. 이경영은 은모의 감춰둔 욕망의 실체 인지도 모른다. 어떤 절대자로서의 권위를 체화한듯한 그는 영화 <파주>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은모와 중식은 서로를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못한다. 은모는 중식을 사랑하지만 그를 경계하고, 중식은 은모에게 알 듯 모를듯한 가냘픈 감정의 신호를 보내면서도

그것이 사랑이 아닌척 한다. 둘은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평행선을 걷기 시작한다. 은모에겐 중식밖에 없고, 중식에겐 은모밖에 없다. 그것을 관객이 다 아는데 둘은

끝내 자신이 디디고 선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영화는 말한다. 은모는 도망치고 중식은 떠나가는 은모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면서.

 

 

 

 

 

파주의 하늘은 날마다 어둡고 파주의 대기는 빗발이 아주 가늘어진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에 잠식당한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은모와 중식의 심장에도

뿌연 안개가 차있다. 그들은 반투명으로 빛난다. 그래서 그들은 미덥지가 못하고 지금은 존재했다가 다음순간 홀연히 사라질 것만 같다.  

 

카메라는 놀랄만큼 냉정하다가도 슬픔이 닥쳐오면 인물과 함께 흔들린다. 묵묵하고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할 말을 뭉텅 잘라먹고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3년전, 7년전으로 반복되는 플래시백은 파주라는 소우주의 시간을 혼돈속에 빠뜨리고 인물들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곳에서 떠나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파주>라는 영화는 너무나 아름답고 애처로운데, 보는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파주>는 혼잣말같다. 혼잣말인데다가 소리마저 아주 작아서 

영화를 보다가 답답증에 걸렸다. 물론 <파주>가 지나치게 친절해야 할 필요는 없다. 정말이다. 폐쇄적이라 더욱 값져 보이는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나 적은 실마리들을 준다. 그리고는, 나는 원래 조심스럽고 신중해서 줄 것이 이것 밖에 없으니 알아서들 하라고 한다. 관객들은 모자이크를 하다가 색종이가

부족해서 여백만 잔뜩 만든다.

꼭 인물이 파토스를 토해내고 (앞서 말한 것처럼 뺨을 때린다던지) 속엣것을 다 드러내며 드라마틱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켜보는 관객조차 숨을 틔울 데가 

한군데도 없다는건 아쉬운 일이다. 완벽하게 밀봉된 세계... <파주>의 세계는 어쩐지 그런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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