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령작가, The Ghost Writer (2010)

2012.06.22 19:26

violinne 조회 수:6417

           

 

 

 

            

 

                      그림자가 진짜를 위협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

 

 

스스로를 '고스트'라고 소개하는 주인공은 유명인사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저술하는 '고스트 라이터(대필 작가)'이다.

그는 운이 좋게도 전(前) 영국 수상 '아담 랭'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25만 달러+인센티브'가 걸린 특급 프로젝트의 적임자로 임명이 되었다. 고스트는 자서전을 본격적으로 쓰기 위해 아담 랭이 아내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미국의 외딴 섬으로 찾아간다. 고풍스럽고도 모던한 아담 랭의 별장에서, 그를 전형적인 정치가가 아닌 '가슴이 있는 한 인간'으로 설정하고 매력적인 도입부를 쓰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던 고스트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긴급 뉴스로 아담 랭이 불법으로 중동계 자국민들을 CIA에 이양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뒤이어 CIA에서 그들에게 가한 잔악한 물고문의 정황이 포착된다. 설상 가상으로 정계 앙숙이던 외무장관이 아담 랭을 국제 형사 재판소에 회부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다.

코너에 몰린 쥐나 다름이 없어진 전 영국 수상은 미국 정부의 도움이라도 얻어보고자 섬을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고, 별장에 남겨진 고스트는 일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되돌아갈 결심을 굳힌다. 옷가지들을 가방에 정리하던 고스트는 옷장 서랍에서 의문의 서류 봉투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아담 랭의 자서전을 쓰다가 채 완성 하지 못하고 바다에 빠져 익사한 자신의 전임자의 것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봉투 속에는 한 때 노동 당원이었던 아담 랭의 당원 카드와 그가 스탠포드 학생이었던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들이 들어있다.

안개처럼 막막하고 연결되지 않는 실마리들을 가지고 전임자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기로 결심한 고스트는 논리적인 증거를 찾아 섬을

탐방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거대하고, 은밀하고, 복잡한 어떤 실체에 점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비밀을 들쑤시고 다니는 그를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이 덮치려고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스트는 위기를 모면하며 '진짜 비밀'을 캐내기 시작한다.

 

 

 

  

 

 

 

 

<유령 작가>는 매우 다층적인 함의와 상징들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먼저 그림자로서의 고스트를 살펴보자. 그는 제대로된 작가(proper writer)를 꿈꾸지만 정작 남의 자서전을 대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상대방이 이름을 물어보면 스스로를 '고스트'라고 소개하며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단 한번도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는, 이상한 주인공이다. 그렇다고 말없고 음산한 캐릭터를 떠올리지는 말자. 그는 매우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이고, 냉소적이지만 매력적인 위트를 구사하는 전형적인 영국 지식인이면서, 자신에게 대필을 부탁한 클라이언트들의 부인들이 함께 잠자리를 가지자며 유혹 할 만큼 잘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이름 대신 구태여 스스로를 '고스트'라고 부르면서 폼 잡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이 이 작품에 담긴 함의들을 풍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를 이름없는 '고스트'로 치환시켜 놓으면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살아나기 때문인데,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고스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꼭두각시인가. 권력의 최정점에 선 이가 알고보니 줄 달린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이가 사실은 '인형사' 라면? 

 

'인형사'가 누구인지, 양파 껍질 까듯 겹겹이 싸인 알맹이속 '진짜'를 밝혀내는 것은 정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며 미덕이다. '인형사' 혹은 '알맹이'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은 어쩔수 없이 추리의 문법을 어느정도 모방하게 되는데 <유령 작가>는 이러한 추리의 요소와 분위기를 적극 반영하고 있다. 정치드라마에 강력한 추리 요소를 넣으니 주인공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추고, 머리회전이 무지 빠른데다가 당최 겁이라곤 없이 비밀을 파헤치면서 은근히 '탐정'노릇까지 겸할 수 밖에.

 

 

 

 

 

<유령 작가>가 흥미로운 또하나의 이유는 작품 곳곳에 심어져 있는 블랙코미디적인 은유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쓸어담고 또 쓸어담아도 수북히 쌓이며 청소부 할아버지를 힘들게 하는 '낙엽'이다. 카메라는 몇 번이나 아담 랭의 별장 건물 마당께에서 묵묵히 낙엽을 수레에 쓸어담고 계시는 청소부 할아버지를 비추는데, 폭우속에서도 할아버지는 쉬시지도 않으시고 낙엽을 수레에 담으신다. 하지만 거센 비바람은 할아버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애써 쓸어담은 낙엽들을 마구 공중으로 흩날려보낸다. 짜증이 나신 할아버지는 급기야 빗자루를 내팽개치시고...... 코너에 몰린 아담 랭의 상황과 대비되어 그를 풍자하는 듯한 장면이다. 아무리 쓸어담고 쓸어담아도 폭우가 쏟아지는 날 비바람 속에서는 모든것이 허사다. 정치라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비밀을 은폐하고 진실을 호도하며 한 몫 단단히 잡고 싶은 정치인이나 정치 집단도 정계에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제 자리 지키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긴다. 특히 '젖은 낙엽'이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우습기만 하다. '젖은 낙엽'은 이미 퇴출 당하거나 외면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풍자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또 하나 우스운 장면이 있었다. 고스트는 자신의 전임자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 되어 그가 익사한 채로 발견된 해안가로 가고자 별장의 직원으로부터 자전거를 하나 빌린다. 직원은 나이가 지긋한 동양인인데 친절하게도 고스트에게 자전거가 아닌 차를 빌려주려고 한다. 고스트가 사양하자 이번에는 자신의 털모자를 벗어서 그의 손에 쥐어주려고 한다. 고스트는 께름칙해 하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털모자를 받아든다. 고스트가 탄 자전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친절했던 얼굴의 동양인 직원은 짜증이 난 얼굴로 그의 뒤에다 대고 욕설 같은것을 내뱉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동양인을 비하하는 것 아닌가 싶어 불쾌해질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장면이 꽤 웃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서방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양인은 크게 몇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격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동양인'이다. 좋고 싫음이 확실하고 속엣것을 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서방 사람들은 상전 시중들듯이 외부인에게, 특히 백인 집단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동양인들이 우습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옛 동양계 이민자들이 영어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에 와서 가정부도 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시절의 일이다. 어떤 유명 신문사의 칼럼니스트가 식당에 갔는데 그곳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한 동양 남자가 별 볼일 없는 백인 손님에게 굽신 굽신 하고 백인 손님은 우월감에 취해서 마치 왕이라도 된 듯한 행동거지를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칼럼니스트는 자신의 칼럼에서 동양인들의 '순박함'을 강조하며 이런 어리숙함을 이용해서 못난 우월감을 느끼는 행동을 반성할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인종 평등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이 없었을 당시에는 그러한 동양인들의 모습이 인종적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이 지긋한 동양인 직원과 고스트의 대화 장면은 풍자-->역풍자로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 일단 친절하고 어리숙한 동양인의 전형적인 한 부분을 풍자한 후 고스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싹 달라진 얼굴의 동양인이 욕설을 내뱉는것을 비춤으로서 풍자를 풍자한다. 뒤이어, 출발할때는 멀쩡했던 날씨가 돌변하여 폭우가 쏟아지자 예의 그 '털모자'를 떠올리고 모자의 머릿냄새를 맡은 후 자신의 머리에 모자를 쓰는 고스트를 보면서는 왠지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동양인 혹은 하위 계급에 대해 백인이 느끼는 '께름칙함'에 대한 재미있는 풍자다. 재미있는 풍자라... 재미는 있는데 웃다가 입을 다물게되는 경우랄까. 이제 인종적 풍자들은 그만 좀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욕심이 과한 것일까? 동양인에 대한 백인의 비뚤어진 편견을 풍자하는 것도 어쨌거나 아주 기분이 좋아 죽을지경의 일은 아니란 말이다. 조금 통쾌하기는 하지만.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쪽은 어쩌면 동양인들이 아니라 백인들쪽이 아닌가,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다. 힘이 있는 자는 자기 비하를 곧잘 해서 웃음을 유도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통계에 따르면 지위가 높은 쪽의 자기비하는 오히려 그를 더욱 빛나게 하여 호감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나는 이 영화의 인종적 유머에서 그런 식의 자기비하를 본다.

 

 

                                       (모자를 쓴 고스트와 전임자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푸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섬의 터줏대감 할아버지)

                                                              

 


 

<유령 작가>는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정치 드라마다. 매우 섬세하게 발 끝으로 걷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대범하게 움직이기도 한다. 그런 전환이 좋은 리듬감을 만들고 있다.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연출이 매끄럽다. 배경은 미국이지만 자꾸만 영국을 떠올리게 된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영국인이기도 하지만 아담 랭의 별장이 위치한 섬의 날씨는 영국 날씨 못지않게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바다 안개가 잔뜩 낀 흐릿한 회색빛 하늘은 감성을 자극하기도 하고 사람을 불안하게도 만들며, 한번 내리면 폭우가 되어 쏟아지는 장대비는 서늘한 냉기를 작품 전반에 드리운다. 그런 비의 느낌이 영화의 온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영화가 끝날때까지 대단한 추격전이나 잔인한 장면은 없다. 조금은 싱거울수 있는 흐름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은 카메라 워크다. 카메라는 노골적일 정도로 관객들에게 "모두를 의심하라!"라고 말함으로써 시종 흥미를 잃지않게 한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카메라는 주인공보다 좀 더 오래 머무르고 있다. 주인공의 시선이 이미 벗어났는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선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보여주며 관객들이 그것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게끔 한다. 관객들은 남겨진 피사체의 표정이나 미세한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가며 마치 등장인물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제3의 인물로 영화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림자가 진짜를 위협하는 이야기, 혹은 꼭두각시가 인형사를 위협하는 이야기는 장르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그림자와 꼭두각시가 주인을 해코지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배반과 배신이라는 코드에 실려 소설과 영화의 이야기로 거듭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 그림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유쾌한 부분들의 총합이다. 숨겨진 어둠이며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에 빠져들때마다 배신을 당하는 쪽을 생각해 본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비밀이나 숨겨왔던 두려움들이 죄다 까발려진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죽는것 보다도 두려운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설프게 정의의 사도를 흉내내는 '그림자들' 보다도 그들의 '주인들' 즉, 이 영화에서는 아담 랭을 주인공으로 두고 그의 시점을 반영하여 찍었다면 <유령 작가>도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당연히 제목부터 바뀌게 될 것이고). 배신을 하는 쪽의 의도나 행동을 예측 할 수 없도록 만든 다음 배신을 당하는 쪽을 보여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조금은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대낮에 보는 자신의 그림자는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지만 한밤에 길을 걷다가 가로등 밑에 거인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오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실체가 어둠속에 가리워져 있을 때, 그것은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그럴때는 사력을 다해 불이 환하게 켜진 집까지 뛰어가는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그림자도 사력을 다해 뛰어 오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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