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트맨(Batman, 1989)

2012.08.10 18:51

hermit 조회 수:2221

 

 

얼마전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극장에서 봄으로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3부작(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 라이즈)을 모두 보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니면 제작사가 런닝타임 줄이라고 협박이라도 한건지 막판 갑자기 무리한 전개라든지, 평소 놀란 감독답지않게 현실성없는 장면(대낮에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상대에게 날 죽여주슈~하며 질서정연하게 돌진하는 경찰들이라든지 또 엄폐한 채 사격만 해도 손쉽게 학살할텐데 굳이 총 몇발 쏘다가 같이 달려들어 백병전을 벌여주는 베인 부하들의 모습은 정말 최악이었다. 니네가 든 건 총이 아니라 몽둥이냐? 차라리 어둠을 틈타 배트맨이 공중을 휘저으며 주의를 끄는 사이 사방에서 기습하는 게 훨씬 현실성 있지 않았을까?)이라든지, 무엇보다 시종일관 악당에게 농락당하는 너무 나이브한 배트맨의 캐릭터(원작 코믹스에서의 배트맨은 음침하다못해 음험한 캐릭터로 악당은 물론 다른 히어로들조차 그를 꺼릴 정도다. 타고난 비관주의자로 항상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다음 수를 준비해두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인 슈퍼맨조차 믿지 못해 그를 만나러 갈 때는 항상 크립토나이트를 휴대한다면 말 다 한거 아닌가?)가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 면에서나 메시지 면에서나 뛰어난 시리즈였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본 포스트는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얘기가 아니니 그 얘기는 이쯤...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정리되면 올려보겠다(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_=;;) 극장에서 돌아와 약간 찜찜햇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팀버튼의 배트맨, 배트맨 리턴즈를 다시 봤더니 이 두편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이었는지를 다시 느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제작 당시부터 논란이 상당히 심했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내세울만한 작품이 희대의 괴작 "비틀 주스(Beatle Juice, 1988) 뿐이던 무명의 괴짜감독에게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 그것도 가장 인기있는 히어로 중 하나인 배트맨을 영화화한 작품의 감독이라니! 더구나 브루스 웨인/배트맨 역으로 코미디 배우(그것도 미치광이 비틀주스를 연기했던) 마이클 키튼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원작 팬들마저 대대적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의 우려 속에서 탄생한 이 블록버스터 괴작은 원작 이상의 음울함과 광기를 보여주며 원작 팬들조차 매료시켰고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우려를 멋지게 배반했다.

 

배트맨이 다른 히어로들과 차별화된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가 가진 음울함일 것이다. 불길한 이미지의 박쥐를 차용한 그의 코스튬부터 어두운 과거,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그 이름부터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비롯된 고담시까지... 더구나 그는 슈퍼맨처럼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웅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반 시민들에게조차 두려움과 배척의 대상이며, 자경단원과 또다른 범죄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이는 다크 히어로다. 팀 버튼은 이런 배트맨의 어두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당시까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음울한 분위기의 히어로물을 선보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을 비롯해 이후의 모든 다크히어로물은 이 작품에 조금이나마 빚을 졌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많은 제작자들이 음울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은 성공하지 못할 거라 믿었을 테니까)

 

이 영화는 일단 분위기 면에서 탁월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모든 면에서 배트맨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팀 버튼은 오히려 현실성 대신 결코 해가 뜨지 않는 듯 음습하기 짝이 없는 고담시의 풍경 아래 서커스를 보는 듯한 과장되고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갑자기 광대복장을 한 갱들이 나타나 총을 난사하더라도 '여기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라며 관객들을 납득하게 만든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지만, 대신 믿게 만들어버린다.

 

매력적인 캐릭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코미디 배우 출신의 마이클 키튼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여전히 부모님을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브루스 웨인의 자아와 배트맨의 자아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배트맨의 음울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키튼의 배트맨을 보다보면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이 오히려 밝아보일 정도;; 여담으로, 배트맨 코스튬 역시 20년도 넘은 영화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그리고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만큼 멋지다. 잭 니콜슨이 열연한 조커는 단연 최고이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극한의 광기를 보여줬으되 너무 심각하게 리파인되었다면, 잭 니콜슨은 조커의 유머러스함까지 살려내며 우스꽝스러움과 광기 사이를 오가는 원작 캐릭터에 훨씬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항상 연기력보다는 섹시함으로 어필했던 킴 베이싱어조차 이 영화에서는 캐릭터에 썩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상, 음악, 캐릭터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특히 인상적인 몇몇 시퀀스는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고 감탄이 나오도록 한다. 또한 음울한 히어로 무비의 선구자로서 후대에 드리운 짙은 영향을 고려할 때, 결코 놓칠 수 없는 명작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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