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헌트

2013.01.19 09:34

menaceT 조회 수:3397


1월 18일, 아트나인.

  영화 '더 헌트'는 이성의 불완전성, 이 불완전한 수단에 기댐으로써 오히려 맹목적인 상태에 빠지는 인간의 나약함, 이들이 모여 이룬 현 사회에서 이성이 폭력의 논리로 변질되어 결국 서로가 서로를 겨누게 되는 그 아비규환의 장을, 누명 쓴 한 남자의 이야기와 '사냥'이라는 소재로 엮어 스크린에 펼쳐낸다.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과잉 없는 건조한 연출로 최대한 사회의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려 노력한다. 한 편, 매즈 미켈슨은 괜히 남우주연상 받은 게 아니다 싶은 존재감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도 교회 씬에서의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포스터에도 나온 그 눈빛, 스크린으로 보면 그 눈빛에 내 몸이 막 뜯겨서 먹히는 기분이다.

  덴마크의 풍습인지 아니면 그 지방 풍습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여튼 영화 속 마을에선 나이가 차면 성인식 개념으로 사냥 허가를 받고 총을 선물받는다. '성인이 된다'는 말이 곧 '사냥을 시작한다'는 말로 통하는 셈이다. 그리고 영화 제목으로도 쓰인 '사냥'은 그 자체로 인간 사회를 꿰뚫는 은유로서,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단어가 된다. 영화에는 총 두 번의 사냥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소년이 사냥 허가를 받는 날에 대한 언급 역시 두 번 나온다.

(스포일러)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사냥 장면에서 루카스는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한다. 그리고 곧 그는 자신이 사냥한 사슴처럼 마을의 사냥감이 된다. 그가 누명을 쓰고 그렇게 사냥감으로 전락해 가는 과정에서 우린 누구도 비난하기 힘들다. 클라라는 자신이 짝사랑하던 선생님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데 토라져 자기 입장에선 대수롭지 않은 거짓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른들은 어설프게나마 심리학 이론까지 주워섬겨가며 나름의 이성적인 판단을 한 끝에 나름의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지배하는 섬뜩한 명제 하나가 여기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성인이 되면 사냥을 시작한다'. 

  이제 그 문장이 터놓은 커브를 돌면, 우리는 '성인'들이 세상을 대하는 가장 믿음직스런 도구라 믿었던 그 '이성'이 쉽게 '총'과 '사냥'의 논리로 변해버리는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이성으로 인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린 이들은 진실로부터 동떨어진 자리에 사냥터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한다. 

  이때 사냥감 루카스의 곁에 아들 마쿠스가 찾아온다. 루카스의 친구이자 마쿠스의 대부인 브룬이 마쿠스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인식 날에 대한 두 번의 언급 중 첫 번째 언급을 듣게 된다. 브룬은 마쿠스에게 사냥 허가를 받는 날을 묻더니, 그 날은 '쥐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쥐가 되는 날'이라 말한다. 사냥 허가를 받고 사냥을 시작하는 날은 곧 성인이 되는 날이며, 동시에 브룬의 언급대로라면 사냥의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역전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기 시작하는 날이다. 사냥 허가일의 언급이 두 번, 사냥 장면이 두 번이라는 점에서 우린 이 첫 번째 언급을 앞서 나온 첫 번째 사냥 장면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쥐와 인간의 관계는 곧 사냥의 대상과 주체의 관계로 이어지는 한 편, 다시 사슴과 루카스의 관계로 이어진다. 브룬의 언급대로 첫 번째 사냥 장면에서 사냥의 주체였던 루카스는 이제 사냥의 대상,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 있다.

  루카스와 마쿠스는 사냥터의 한복판에서 함께 쫓기는 두 마리의 사슴이다. 루카스가 재판을 받고 무죄를 인정받아 풀려난 뒤에도 위협의 강도는 오히려 점점 강해지고, 아들과 본인의 생명마저 위험해질 지경에 이르자 루카스는 마쿠스를 떠나보낸 뒤 자신을 둘러싼 총구들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한다(그리고 이 부분에 이르러 매즈 미켈슨의 연기가 그야말로 폭발한다.).

  루카스가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하자, 오랜 친구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믿음이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이성이 해내지 못할 일을 해낸다. 그런데 영화는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대신, 회복의 희망이 미약하게 보이는 그 시점에서 갑자기 1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모든 게 해결된 듯 보이는, 마쿠스의 성인식 날의 모습을 관객 앞에 들이민다.

  그 1년의 간극에 당연히 관객은 적응할 수 없다. 영화는 이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어색한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을 불안하고 칙칙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위태롭게 잡아낸다. 그 와중에 사냥 허가, 성인식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이 드러난다. 브룬은 '소년이 성인이 되고 성인이 소년이 되는 날'이라며 루카스 집안에 가보로 물려져 온 소총을 '아버지 루카스가 주는 선물'이란 말과 함께 마쿠스에게 선물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영화 속 두 번째 사냥 장면이다. 루카스가 이번에는 사슴을 보고도 사냥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슴이 되는 경험을 뼈저리게 겪은 그는 이제 이 땅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 사냥을 한다는 것이 품고 있는 위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때 루카스에게로 총알이 날아든다. 가까스로 총알은 빗맞고, 루카스는 총을 쏜 자의 실루엣을 본다. 영화는 그 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지만 그 실루엣은 왠지 루카스의 아들 마쿠스를 닮아 있다.

  첫 번째 사냥 장면이 성인식의 첫 번째 언급과 맞닿아 있던 것처럼 두 번째 사냥 장면은 두 번째 언급과의 연관 관계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이 성인이 되고 성인이 소년이 되는 날'. 첫 번째 언급, '쥐가 인간이 되고 인간이 쥐가 되는 날'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마쿠스는 한 동안 아버지와 함께 두 마리의 사슴이 되어 마을의 사냥감처럼 쫓긴 바 있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 되어 사냥의 주체가 되었던 아비가 '인간이 쥐가 되듯' 사냥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험 끝에 사냥을 그만두게 된 것과 달리, 사냥의 주체가 되어 본 바 없이 사냥의 대상으로서 쫓겨본 적만 있는 마쿠스는 오히려 그 날 난생 처음 '쥐가 인간이 되는', 또한 '소년이 성인이 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아비가 사냥의 싸이클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들, 그 싸이클은 '아버지의 총'으로 형상화되어 그 아들에게로 상속된다. 이제 그 아들은 다른 수많은 성인들이 그랬듯 이 땅 위에서 '아버지의 총'을 들고 끊임없이 무고한 이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루카스를 겨눈 이의 실루엣에서 마쿠스를 연상케 하는 마지막 장면이, 이 섬뜩한 사냥이란 유산의 흔적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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