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로니클 - 덕중의 덕은 양덕

2012.03.19 02:09

clancy 조회 수:4340

 

크로니클

 

 
 조쉬 트랭크

 

 

 

어머니는 일찍이 병을 얻으시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에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어려운 가정환경에다가 학교에선 놈팽이들에게 만날천날 당하기만 하는 왕따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DC나 마블에서나 나올 법한 초능력을 가진다면? 영화는 십대 청소년의 백일몽 같은 설정에서 출발합니다.

영화 '킥 애스'가 현실에 있을 법한 능력(무통)을 갖게 된 소년이 코믹스에서나 나올 법한 모험을 겪으며 영웅으로 거듭나는(또는 성장하는) 이야기라면, 이 영화 '크로니클'은 꽤나 현실적 배경 속에서 코믹스에서나 나올 법한 능력(텔레키네시스)을 갖게 된 소년이 힘에 잠식되어 슈퍼 빌런(악당)이 되는 (또는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입니다.

흔한 고교 성장 드라마 같은 배경과 캐릭터들 속에서 초월적 능력에 잠식되어 악당이 되어버리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설정 만으로도 꽤나 삐딱선을 탄 스토리는 그러나 구성이나 진행에서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된 인물이 그 책임감의 무게를 인식하지 못하면 악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설정이야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이걸 고등학교 배경의 미성년 주인공에게 적용시켜 청춘성장드라마스런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년 아나킨의 몰락과 다스베이더의 탄생을 무려 세 편의 장편에 걸쳐 엮어내는 여유를 가졌음에도 '성질난 주인공, 울부짓는 주인공, 다친 주인공' 같은 무감동 병렬화면만 펼쳐놓다가 결국 오리지널 트릴로지마저 낯 뜨겁게 만든 스타워즈 프리퀄을 생각해보시길.

 

영화는 시작부터 꾸준히 주인공 앤드류의 다크사이드(?)의 단초들을 촘촘하게 이야기에 녹여냄으로서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관객이 그의 폭주에 공감하고 수긍하며 심지어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만듭니다. 그는 단순히 힘에 취해 악당이 되는 게 아닙니다. 초능력은 그가 그런 지경에 이르도록 만드는 촉매가 되었을 뿐이지요. 아마 초능력을 얻지 못했더라도 양상만 달라졌지 지금과 같은 파국을 맞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다거나,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총기를 난사한다던가, 부모를 죽이고 집에다 불을 지른 후 자기도 그 안에 뛰어든다거나...

맷과 스티브란 캐릭터는 앤드류의 이야기와 상호작용하며 이야기를 더욱 액티브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그의 가족이자 친구이고 동료이자 적이며 넘어야 할 벽이자 함께해야할 운명공동체(코피!)입니다. 코믹스적 시점에서 봐도 이들은 꽤나 개성이 분명하고 역할이 정해진 전형적캐릭터들 이지요. 비유를 하자면 힘의 위험을 깨닫고 중요 시점마다 조금은 답답하리만치 보수적 관점을 내비치는 맷은 캡틴 아메리카 같은 존재라면 은수저라도 물고 태어난 듯한 환경과 행동거지에 능글거리면서도 때론 지도력을 내비치는 스티브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 같다고 할까요.

 

앞서 스타워즈 이야기를 슬쩍 꺼냈지만 감독 조쉬 트랭크가 처음 주목을 받고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유튜브 단편영화 <레아의 22번재 생일의 칼부림> 역시 스타워즈에 관한 것이었죠. 대학생들 파티로 보이는 장소에서 싸움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광선검이 날아다니고 막판에 스타트루퍼들이 이 철없는 제다이들을 진압하는 것이 내용입니다. 감독이 스타워즈를 비롯한 서브컬쳐에 대해 애정과 지식이 꽤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데요, 그가 조금만 더 일찍 내어나 스타워즈 프리퀄의 아나킨 스토리라인을 손볼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설득력있고 훨씬 어두우며 관객의 감정을 끌어내는 다스베이더의 탄생을 보게되었을 지도 모르죠.


전문가들의 리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가 언급되기도 했는데요. 클라이맥스의 앤드류의 모습이나 액션 장면들은 정말 아키라의 장면들을 가져다 붙인 게 아닌가 의심될 지경이더군요. 앤드류=데츠오, 맷=가네다 정도랄까요? 진짜로 감독이 아키라를 참고했을지도 모르지요, 앤드류의 폭주가 시작되는 병원장면은 진짜 아키라 짝퉁스러워요.

 

스토리 설정만이 아니라 영화의 촬영 방식도 특이합니다. 영화 전체가 작중 인물이 직접 카메라로 촬영하는 장면들이라는 설정인데요 홍보 브로셔에서도 언급된 이른바 '파운드 풋티지'라는 쟝르의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될 겁니다. '클로버필드'나 '블레어위치 프로젝트' 같은 영화들 말이지요. 다만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게 조금 더 확장된 형태로 진행이 되는걸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앤드류의 카메라만으로 촬영된 모습이 진행됩니다. 만약 앤드류가 화면 안으로 들어올 필요가 있으면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려놓거나 동료가 촬영을 하는 식이지요. 그러다가 파티장면에서 역시나 앤드류처럼 카메라 덕후인 여자캐릭터가 등장하면서 두 대의 카메라가 촬영한 장면을 교차로 편집하기 시작합니다. 작중 촬영자가 늘어나는 거죠.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 '주인공이 촬영한 영상'이란 규칙은 헐거워지고 그 외의 여타 촬영장비들의 화면이 연결되어 하나의 씬을 만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엔 상점의 CCTV, 경찰차 블랙박스, 방송 카메라의 클립이나 구경꾼들의 카메라, 폰카 까지 동원됩니다. 1인칭 촬영시점에서 어쩔 수 없이 제한받게 될 스토리와 액션의 전개를 생각하면 꽤나 영리한 선택이긴한데 이쯤 되면 파운드 풋티지 보다는 '컬렉티드 풋티지'라고 쟝르를 새로이 규정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타 다른 카메라들의 촬영 화면은 풀HD급이면서 유독 CCTV화면만 구린 이유는 뭡니까(심지어 흑백도 있음). 당연히 CCTV화면이야 구릴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 폰카 화면은 반대로 너무 깔끔하다 이겁니다. ㅋ

앤드류 역의 데인 드한은 젊은 시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연상시키네요. 앞으로 여심 흔드는 영화에 샤방하게 꾸미고 나올거라는 데에 100원을 걸어봅니다.

 

영화가 끝나자 옆자리에 앉았던 여고생이 분연히 일어나더니 '내 평생 이렇게 X같은 영화는 처음이다'라며 동행에게 투덜대더군요. 뒷자리 커플팀의 여성분도 '영화가 뭐 이래...'란 식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걸 들었고요. 우와! 우와! 하면서 꽤나 즐겁게 영화를 본 저로선 당황스런 반응이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비슷한 반응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요. 대체 이유가 뭘까요? 단순히 서브컬쳐나 영화에 인용된 문화들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생각하기엔 이야기 자체의 재미나 캐릭터의 개성만으로도 수준급인 영화란 말입니다. 아무리 스토리가 좋아도 덕력이 너무 높으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걸까요. 아니면 컬렉티드 풋티지 형식의 영화 내러티브를 경험치 낮은 관객들은 쫓아가기 힘든 걸까요. 것도 아니면 그냥 여자분들이 이런 영화는 별로 좋아하질 않는 걸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400
361 [영화] 시타델 Citadel <부천영화제> [30] Q 2012.07.29 6269
360 [영화] 익시젼 Excision <부천영화제> (19금: 혐오를 유발하는 비속어표현 포함) [1] [23] Q 2012.07.26 10243
359 [드라마] 빅 [6] [1] 감동 2012.07.24 3569
358 [영화] 모스 다이어리 The Moth Diaries <부천영화제> [27] Q 2012.07.24 5189
357 [영화] 그래버스 Grabbers <부천영화제> [18] Q 2012.07.23 5891
356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15] [2] lonegunman 2012.07.21 10116
355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 - New Begins [4] [11] DaishiRomance 2012.07.16 5889
354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3] [24] 감동 2012.06.27 5242
353 [영화] 파주 (2009) [2] [1] violinne 2012.06.25 3627
352 [영화] 유령작가, The Ghost Writer (2010) [8] [215] violinne 2012.06.22 6449
351 [영화]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4] [21] Ylice 2012.06.20 7194
350 [영화] 미녀 삼총사, Charlie's Angels, 2000 [3] [202] ColeenRoo 2012.06.19 5462
349 [영화] 숏버스 Shortbus, 2006 [1] ColeenRoo 2012.06.17 4362
348 [영화] 굿바이 키스 Arrivederci amore, ciao <유로크라임/암흑가의 영화들 컬렉션> [3] [16] Q 2012.06.16 4648
347 [영화] 고백, Confessions, 告白 (2010) [2] [1] violinne 2012.06.13 5302
346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백설공주와 사냥꾼 (스포일러 없음) [6] [215] Q 2012.06.12 11875
345 [영화] 멜랑콜리아 (2011) [6] [1] violinne 2012.06.05 4356
344 [영화] 디스트릭트 9 District 9, 2009 [21] ColeenRoo 2012.06.04 3753
343 [드라마] 패션왕 [2] 감동 2012.05.22 3654
342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Dangerous Method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6] [26] Q 2012.05.12 1346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