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력은 없다 (1975)

2011.07.27 09:51

곽재식 조회 수:2619

영화 내용을 미리 알면 재미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경우 ( http://gerecter.egloos.com/2849512 ) 가 있겠습니다만, 이 1975년작 한국영화는 이 영화의 "감독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본다면, 그게 재미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도입부와 영화 제작진을 보여주는 자막이 올라가고 영화를 시작하는 그 맨처음 연출이 아주 화려하고 신나기 때문에, 누가 도대체 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나 하는 것이 궁금해 지게 됩니다. 이 영화는 전과자와 이 전과자를 붙잡은 노형사 박노식의 이야기로, 사연을 보면 전과자가 범죄의 세계와 사회에 적응하는 가운데에 펼치는 사연을 소재로 삼는 범죄물 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이 두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시작 장면이 썩 훌륭한 것입니다.


(포스터)

굳 이 영향 관계를 따져 보자면야 이 시작 장면의 연출은 현실주의가 가미된 일본 야쿠자 영화의 연출 기술을 닮은 부분이 많아 보입니다. 70년대에 일본 야쿠자 영화에는 야쿠자들이 멋있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궁상 맞고 우중충하게 사회의 밑바닥의 보기 싫은 부분을 드러내는 추한 모양으로 나오는 영화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꽤 나왔습니다. 이 영화, "폭력은 없다"는 그런 영화들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 합니다. 멋있게 칼을 휘두르거나 호쾌한 발차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빠지고 나뒹굴고 머리채를 잡고 바짓가랑이를 잡습니다. 그런 모양을 불안하게 흔들리며 뛰어다니는 화면이 격하게 좇아 다닙니다. 소리지르고 우는 사람들의 표정, 날뛰는 모양, 진이 빠져 주저 앉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출발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어느 집에 나타나 마구 종을 울리면서 나오라고 나오라고 소리치며 날뛰는 것이 시작 입니다. 이 사나이는 이후로도 행패부리고 난리 치면서 마구 뛰어 다닙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사연이 뭡니까? 박노식하고는 어떻게 엮이는 겁니까? 늙은 형사인 박노식은 또 어떤 사람인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보여 주는 도입부로 바로 이런 격렬한 화면 연출을 한껏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데 그 속도가 매우 빠르고, 갑자기 얼굴 바로 앞까지 확 들이대는 극단적인 화면 구도는 정신을 뒤흔드는 힘이 강합니다. 거기에 드럼 소리가 넘쳐 흐르는 록큰롤 음악이 배경에 엮여 들면 흥겹게 넘어가면서도 과격한 장면으로 가득한 화면들이 아주 근사하게 와닿습니다. 전과자 주인공, 사회에 불만이 많아서 불안하게 확 다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그 심리가 그대로 필름에 녹아 들어 영화로 변해 버린 듯이, 이 빠르게 날뛰는 도입부가 기막힌 것입니다. 거기에 기괴하게 화면에 비치는 웃는 인형의 모습이라든가, 그 인형의 웃음 소리에, 박노식의 좀 엉뚱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과감함 만은 넘치는 유도실력 보여주는 장면도 끼어들면, 영화 장면로부터 도시의 비정함이 다소 환상적인 파도처럼 밀어 닥치는 맛까지 느껴집니다.

90년대 후반에 영화평을 보다보면, 영화 감독이 예전에 광고를 찍은 적이 있거나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이 있으면, "이 감독은 출신이 뮤직비디오 출신이라서, 영화의 화면이 뮤직비디오처럼 요란하고 '감각'적이다"라고 주로 출신에 기대어 평을 써놓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1975년작 영화의 도입부를 보다보면, 그런 뮤직비디오 식 연출, 광고 같은 연출이 무엇인지 한 번 보여줄 수 있을만큼, 빠르게 건너뛰며 확확 생략하고 격한 감정을 계속 터뜨려 나가는 그 돌격하는 듯한 내용이 멋드러졌습니다.


(노형사 박노식: 자료 사진은 흑백사진 밖에 없습니다만, 컬러 영화 입니다.)

이 영화는 전체 이야기 구도와 대체적인 줄거리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입니다. 막나가는 전과자가 서서히 마음을 잡고 살아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고, 운명이 꼬여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좌절에 빠진다는 쓸쓸하지만 여운이 남는 형태의 이야기 입니다. "영웅본색"류의 한 세 대 후의 범죄자들의 좌절감을 다룬 이야기와도 통하는 갈등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결말도 괜찮습니다. 결말을 이야기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마음 잡고 잘 살아 보려고 한 범죄자가 자신의 은인인 형사를 돕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살인을 하게 된다는 안타까운 내용인데, 오 헨리 소설 시절부터 내려온 범죄물의 감상적인 결말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배 우들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주인공 범죄자를 연기한 원석은 영화 내내 무수히 쏟아져 끊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격하게 화내고 속이 뒤집혀 울고 불고 하는 감정 표출이 뛰어납니다. 원석과 어울리는 의지가 굳건하면서 온갖 일을 다 겪은 노회한 형사를 연기하는 박노식의 늙은 모습 또한 썩 멋집니다. 허구헌날 행패부리며 난리치던 범죄자 남자 주인공이 행패 부리다 다쳐서 들어간 병원의 지극히 순수한 간호사 여자 주인공과 엮인다는 것도 만화, TV극에서도 자주 보일법한 꽤 정형화된 이야기 거리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대체적인 틀은 모자랄 것이 없었다고 생각 합니다.


(형사와 범죄자)

그 렇습니다만, 이 영화를 갉아 먹는 가장 큰 문제는 그 이야기의 세부를 보여주는 세부 각본이 조악하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전체 갈등 구조와 줄거리는 꽤 잘 잡아 놓았지만 그걸 어떻게 대화와 동작 속에서 표현할 지 세부 사항을 제대로 지어내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상황 표현은 그냥 배우 둘이 무슨 웅변 대회 처럼 서서, 상황을 스스로 제 입으로 해설하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어색하고, 전혀 사실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자식이 없는 늙은 형사 박노식이 제 손으로 잡은 날뛰는 범죄자 원석을 붙잡고 대하는 과정에서 원석을 마치 자식처럼 여겨서 형사와 범죄자간에 정이 들어간다는 이야기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걸 어떻게 표현하냐면, 박노식이 그냥 원석 옆에 서서, "나는 자식이 없어. 그래서 너를 자식 처럼 생각하고 어떻게든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하고 있어" 라고 주절주절 말을 하게 해 버립니다. 앞 서서 나오는 복선도, 뒤이어 나오는 사연도 없이 그렇게 그냥 대뜸 뼈대만 확 치고 마는 대사로 내용을 채워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 주인공과 얽히는 부분은 더욱 정도가 심합니다. 간호사 여자 주인공이 반항적이고 불안한 남자 주인공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고 모성본능도 좀 느끼고 이런 식으로 호감을 갖게 된다는 부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안한 감정을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고, 좀 위험한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또 그런만큼 영화 속의 꼬여 있는 극적인 상황으로는 한 번 들먹여 볼만한 내용이기도 할 겁니다. 이걸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이 영화에서는 그냥 간호사 여자 주인공이 앞도 뒤도 없이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져요."라고 그냥 대놓고 확 말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남자 주인공이 미치광이처럼 스토킹 두 번 쯤 하고 나니 여자 주인공과 사랑이 확 이뤄져 버립니다.


(멧돼지 같이 날뛰는 남자와 간호사)

여 자 주인공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부분의 각본은 이렇게 괴상하게 다 잘라먹고 말하는 이야기의 극치를 이룹니다. 갑자기 어느 산 속에서 - 이게 무슨 산 속이고 산을 왜 이렇게 뛰어다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남자 주인공이 뛰어가고 있고, 여자 주인공은 그 남자 주인공을 막 쫓아 갑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뭐가 뭔지도 모르게 이 이상한 산에서 뛰어 다니는 장면이 확 튀어 나오는 데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산속에서 영화 산업의 특성상 여자 주인공은 옷이 나무에 걸려서 좀 찢어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화면이 확 건너 뛰어서 영화 포스터 찍기에 좋은 여자 주인공의 다리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면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 웅변조의 대사를 주고 받고, 어두운 세상이지만 서로 사랑하자는 요지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문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도 입부의 그 힘이 넘치고 기세 좋게 달리던 연출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중반 이후에는 이런 식으로 전형적인 배경에서 직접 줄거리를 입으로 주절주절 지루하게 읊어 대면서 억지로 다음 장면, 다음 장면으로 진행시키는 것으로 영화를 계속 때워 나갑니다. 너무 감정 없이 하면 재미없으니까, 상당수 장면은 한국식 신파극 연출로 버티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처절하게 엉엉 울면서 대사를 주절주절 계속 지겹게 혼자 들려주는 연설을 하는데, 그 내용이 별다른게 있는게 아니라 그냥 필요한 줄거리와 감정을 소개해 주는 정도를 가지고 그렇게 늘어 뜨려 놓았다는 겁니다. 요즘도 TV 연속극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한국식 신파극의 전형적인 연출 방식의 폐해가 무엇인지, 그런 방법을 쓰면 얼마나 안일하게 줄거리를 표현할 수 있기에 그런 장면이 아직도 독버섯처럼 계속 피어나 나타나고 있는 지 이 영화는 좋은 예시가 될 법하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리하여 재미 없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억지를 쓰며 장면과 장면을 넘기는 바람에 재미가 확 떨어진 영화 입니다. 이게 더 아쉬워지는 것은, 그러면서도 영화 내내 영화 초반부에서 보여 주었던 폭발력 있는 연출 기술이 잊을만 하면 한 번 씩 튀어나와 주는 멋이 구석구석에 묻혀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것 입니다. 분노, 좌절, 후회, 절망 등등의 감정을 면상에 온통 부라리는 배우의 얼굴을 극히 과감하게 잡아내는 가까이서 찍은 화면이 묘하게 활용되는 대목이라거나, 맨 마지막 모든 것이 끝난 허망한 상황에서 직사각형의 황량한 병원 건물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경찰과 범죄자의 모습을 멀리서 수평-수직 구도로 잡아 한참 보여주는 장면이 처연한 감정을 전하는 모습은 기억에 남습니다. 누구나 강한 인상을 받을만한 영화 도입부의 빠른 화면하며, 쿠엔틴 타란티노 즈음의 영화팬 감독들이 따라해 보고 싶을 만한 장면들이 꽤 많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결투)

끝 으로, 이야기가 다루는 소재 덕택에 사회상을 드러내는 현실주의 소재들이 틈틈히 비치는 것도 짚어 볼만 합니다. 이 영화 속에는 무작정 서울에 왔지만 집이 없는 빈민층이 사는 "합숙소"라는 곳이 소개되는가 하면, 당시 "재건대"라고 불리우던 넝마주이들의 모습이 소개 되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영화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아마도 사회 비판적인 일본 야쿠자 영화의 연출법을 잘 계승한 이 영화 도입부의 모습과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가 대충 묶여 있는 통에 망나니처럼 날뛰는 폭탄 같은 주인공 원석이 갑자기 필름 한 자 도는 사이에 휙 돌변하여 착하게 살자고 왠갖 희생과 번뇌를 감수하고, 미묘한 사람의 심리들이 오직 다 엉엉 울면서 신파 대사 하는 것만으로 그려져 있는데도, 그런데도 이런 몇 가지 날카로운 소재들은 남아서 엮여 있는 것 입니다.


그 밖에...

신파조 대사가 많고 우는 장면이 많기 때문에, 울면서 흘리는 콧물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남자간의 의리를 강조하는 일부 일본 야쿠자 영화들의 방식을 따라하다보니, 이런 부류의 영화에 묘하게 드리우는 남자들끼리 부둥켜 안고 애절하게 우는 장면 등등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박 노식은 자식이 없는 늙은 형사인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을 자식이라고 부릅니다. 박노식은 자기 등판 위에 과자 같은 것을 올려 놓고 그 등판 위에 강아지들을 기어 다니며 과자를 먹게 하면서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놀이를 하며, "얘들아 아빠 등이 넓고 참 좋지?" 등의 대사를 하며 즐거워 하는데, 평화롭고 즐거운 장면으로 나오는 부분인데도 어째 좀 괴상 하게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 유쾌하게 웃는 인형으로 나오는, 웃음소리 내는 인형의 웃음소리가 어째 무시무시하게 들려서 영화 장면이 기괴하게 보일 때가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도 생각 납니다.

막판에 악당들이 형사 박노식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자, 주인공 원석은 가랑이를 잡고 늘어져 악당들을 저지하는데, 이 때 혼자서 세 사람인가 네 사람인가 가랑이를 한꺼번에 잡고 늘어져 못가게하는 괴이한 기술을 보여 줍니다.

이 영화의 제목 "폭력은 없다"는 당시 박노식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들이 언론과 당국으로부터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폭력물"로 비난 당한 일이 있었던 것에 대한 반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박노식은 보청기를 쓰는 노형사라서 전화가 오면 수화기를 보청기가 있는 가슴쪽으로 대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보청기 쓰는 형사"는 이 영화 말고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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