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다 가의 형제 자매들>

막다른 공간에서 다시 찾은 희망

가족 사진을 찍기 전, 우리는 도다 가 집안의 화목한 단면을 본다. 올케와 시누이의 관계로 짐작되는 네 여인의 담소와 어린 손자 손녀를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보듬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나눌 수 있는 단란한 행복이 화면 그대로 전해진다. 사진사의 반복된 지시에 여기저기 터진 웃음을 참아가며 마무리 지은 가족 사진 촬영 이후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저녁이 찾아 든다. 하지만 저녁의 안온함을 틈타 들어온 기습 복병의 공격처럼 아버지의 죽음이 예기치 않게 찾아 든다.

그런데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고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다름아닌 자녀들의 반응이다. 아버지의 빈소에 모여있지 않고 여러 방에 흩어져 있는 그들에게선 어이없이 부친을 떠나 보낸 슬픔의 기색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죽은 사람을 처음 본다는 어린 류이치의 천진난만함과 끝끝내 울고 마는 세츠코의 머리 위에 중절모를 씌우는 쇼지로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덕분에 집안에 드리워진 무거운 분위기는 희석된다. 그러나 죽은 이로 인하여 남겨진 자들이 겪는 고통은 시간이 지나 죽은 이의 빈 자리를 절실히 실감하는 순간이다.

세월의 역공 앞에 무너져 한 순간에 사라진 남편과 아버지의 부재는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달리 가정을 꾸리지 않은 세츠코와 늙은 도다 부인을 한없이 작고 연약하게 만든다. 막내 세츠코는 다른 이들 앞에서 늘 미소를 띄우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둘째 오빠 쇼지로 앞에서만큼은 눈물을 보인다. 그런 여동생의 마음을 헤아리는 유일한 사람임에도 쇼지로는 자신 외의 많은 형제 자매들의 존재를 든든히 믿고 홀로 계획했던 바를 따라 중국 텐진으로 떠나버린다. 도다 씨는 경제계의 거물이었지만 자매회사의 신용 보증을 선 탓에 유산은 고사하고, 그가 남긴 부채를 갚기 위해 집과 재산을 처분하자 세츠코와 도다 부인은 갈 곳이 없다. 아버지의 명성에 의거해 들어온 혼담이 무산되고, 아버지의 사회적 명망으로 작은 일조차 시도할 수 없는 세츠코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버지의 임종 직후 머물게 된 큰 오빠의 집에서 새 언니와의 사소한 갈등을 뒤로 하고 세츠코는 방 문턱 위에 걸린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가장 그리워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을 구속하고 억누르는 이름 아래,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세츠코의 뒷모습은 몇 번이고 쇼지로 앞에서 양손 가득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보다 더욱 깊은 절망으로 다가온다. 그 밖에도 큰 언니가 아들 류이치 문제로 어머니를 나무라는 상황을 세츠코가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넷째 아야코를 찾아가 어머니가 고쿠야마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겠다는 뜻을 전할 때에도 뒤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는 변질된 가족 관계 안에서 세츠코와 도다 부인의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권우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땅의 여자>에서 농민 운동에 힘쓰는 며느리의 뜻을 지지해 당뇨를 앓는 아들을 대신 간호해온 노모는 끝내 그를 땅에 묻는다. 어렵게 마주한 며느리에게 오랜 시간 말없이 쌓아온 서운함과 원망을 털어놓는 대신 '방을 얻겠다'던 노모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했다. 방을 따로 얻는다는 것, 너무 낡아 사람이 살기 힘든 별장으로 굳이 거처를 옮기겠다는 것. 이는 단지 독립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극에 달한 마음의 상처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록 이전의 풍족한 생활을 잃었지만 세츠코와 도다 부인에게 고쿠야마의 별장은 1여 년간 숨죽였던 갈등과 긴장의 기류를 벗어나 모처럼의 안식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도다 가를 이룬 첫 여성이자 마지막 여성이기도 한 도다 부인과 세츠코의 독립은 조건 없는 사랑과 신뢰에 기반해야 할 가족 관계의 공고함을 이탈하면서 도다 가의 분절을 초래하게 된다.

 

어느덧 아버지의 기일 1주년을 맞아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제사에 참례한다. 먼저 떠나간 남편을 추도하는 도다 부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엔 그리움뿐만 아니라 그녀와 막내 딸이 겪은 무수한 설움과 착잡함이 어려있다. 모두가 오지 못할 거라 예상한 쇼지로가 나타난다. 가족 사진 촬영을 까맣게 잊고 책을 읽던, 도미 낚시를 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뒤늦게 알고 나타날만큼 늘 가족의 주위를 겉돌았던 쇼지로는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 없이 맞은 1년만의 가족 식사 자리에서 쇼지로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괄시한 형제, 누이들에게 거침없이 쓴 소리를 퍼붓는다. 세츠코와 도다 부인이 처한 상황에 함께 분을 삭이던 관객의 입장에서 악인들을 한꺼번에 심판하는 듯한 쇼지로의 일갈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기네들의 치부에 성이 나거나 부끄러움을 느낀 가족 일원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세츠코와 도다 부인 그리고 쇼지로만이 남는다. 쇼지로의 확신처럼 이후 가족 간의 관계가 회복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신 세 사람은 중국 텐진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그 출발의 시작점은 고쿠야마의 별장이다. 평생 남편의 곁을 지켰던 도다 부인이 아끼는 구관조와 화초를 들고 어디든 여행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명성과 상관없이 세츠코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이 모두가 포기한 낡고 버림받은 공간을 따스한 햇볕이 스며들고, 드넓은 해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긍정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영화는 권선징악의 메세지와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듯 하지만 한편으론 하나의 원형을 그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곧 새로 맞이할 식구들과 보금자리와 함께 가족 사진을 다시 찍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즈 야스지로 영화 스터디 중입니다.

   앞으로 그의 영화를 정리하며 리뷰를 올려볼까 합니다.
   7월까지 작가론을 써볼 계획인데, 조언을 구할 곳이 없네요.  
   부족한 점이 많으니 의견이 있으시다면 호된 질책 부탁드립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388
301 [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_ 정세랑+ 두번째 후기(12.29) [1] bytheway 2011.12.11 3650
300 [영화] 장군들의 밤 The Night of the Generals (피터 오투울, 오마 샤리프 주연) [2] [200] Q 2011.12.04 6621
299 [영화] 아련한 사랑의 기록, 퀴어 멜로 <알이씨REC> [1] 나우시카 2011.11.22 4071
298 [드라마] 삼국지 2010 [2] 감동 2011.11.21 3341
297 [영화] 돼지의 왕 - 연상호 [5] [2] clancy 2011.11.05 5389
296 [영화] 어스픽스/사령 (死靈) The Asphyx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1] [16] Q 2011.10.15 4958
295 [영화] 김기덕의 분노, 눈물, 그리고 화해 - <아리랑> [2] [1] 눈이내리면 2011.09.26 5231
294 [책] 멀티버스 (에스콰이어 한국어판 2011년 10월호 별책부록) - "읽다가 그만두면 큰일 나는 글"을 중심으로 [7] [1] 곽재식 2011.09.22 4703
293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스포함유) [1] [10] jack 2011.09.22 3439
292 [드라마] 여인의 향기 [3] [1] jack 2011.09.13 4431
291 [드라마] 천사의 유혹 [5] 감동 2011.09.09 3220
290 [영화] 돈 비 어프레이드 Don't Be Afraid of the Dark-- 사족에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 [3] [24] Q 2011.09.04 5452
289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 (1967) [2] 곽재식 2011.09.03 4309
288 [영화] 진화의 시작 늦은리뷰 [3] [1] dlraud 2011.09.01 2902
287 [영화]콜롬비아나 [7] 나디아 2011.08.27 3995
286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 [4] 감동 2011.08.24 4288
285 [영화] 무거운 희망과 담백한 상실감속의 독립영화(두만강 + 혜화,동) [1] 무비스타 2011.08.23 2321
284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3] [8] 곽재식 2011.08.17 5267
283 [영화] 카우보이 앤 에일리언 Cowboys & Aliens [11] 곽재식 2011.08.15 4609
282 [영화] 무산일기 - 나이키잠바와 백구 [15] 무비스타 2011.08.14 352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