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 감독의 <마녀의 관>

 

그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매혹되었다

 

고골의 작품을 영화화했다는 소개만으로 의아한 영화였다. 아니, 과연 어떻게 영화화했을까? 라는 의문과 호기심이 작년 CinDi에서의 마지막 관람으로 <마녀의 관>을 택하도록 이끌었다. 러시아 대문호의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19세기 고딕 문학이 21세기에 이르러 한국 독립영화의 옷을 입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드뷔시의 음악과 함께 기묘한 여자의 움직임으로 문을 여는 도입부에 이어 검은 바탕에 제작진의 이름을 큼직하게 새겨 넣기만 했는데도 너무나 세련되고 강렬했던 오프닝을 대하고선 아예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공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영화에 모든 것을 맡겼다.

 

1막 ‘이상한 여자’에서 영화감독 P는 제작하려는 공포영화의 주인공에 완벽히 어울리는 여배우를 찾아낸다. 환호하는 프로듀서와 달리, 감독은 그 완벽함에 의심을 품는다. 그녀를 영화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만 의문과 경계는 계속된다.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약을 먹으며 바짝 날을 세움에도 불구하고 P의 시선은 여배우가 머문 자리에서 마녀의 환영을 본다. 현실 곳곳에 배치된 P의 환상은 그가 촬영한 영화 장면과 혼재되어 혼란을 가중시킨다. 고골의 원작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1막은 이렇듯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을 보여준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2막 ‘마녀의 관’에서 기술적 효과를 이용해 환상의 표현이 가능했던 영화 현장을 벗어나 1막에 비해 건조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정통 연극 무대 위에 <VIY>가 재현된다. 마을 수령의 딸을 마녀로 착각해 그녀를 때려죽인 신학생 호마는 사흘간 자신이 죽인 여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황량한 예배당 안에서 호마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마녀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한다. 영화 속의 영화, 영화 속의 연극이란 중첩된 구조 안에서 서사가 진행되는 이전의 1, 2막과 달리 제 3막 ‘커튼 콜’은 언뜻 보기엔 가장 무난한 일화로 보인다. 룸살롱에서 기타 반주 일을 하는 시각장애인 악사 앙리 박은 일이 끝난 깊은 새벽녘에 젊은 연극인들이 만드는 인형극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러나 형의 늦은 귀가를 의심해 뒤를 좇은 동생의 눈을 통해 앙리 박이 삶의 유일한 보람을 느끼는 새벽녘의 연주가 폐건물 안에서 마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환상임이 밝혀진다. 공포는 극대화되고 현실 속의 환상이라는 중첩 구조가 드러나면서 영화는 막간의 일관성을 교묘히 일구어낸다.

 

 

마치 큐브같다. 고골의 <VIY>란 토대를 유지하되 마구 뒤섞인 듯한 이야기의 조각들. 그러나 의외로 주제는 명징하다.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호마의 죽음을 접한 동료 신학생이 몇 번이고 강조하는 이 메시지는 1막과 2막에서 감독 P와 호마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으로 두려움을 지목한다. 강박적인 우울증과 죄의식에서 파생된 그들의 두려움은 스스로 하여금 끝내 날카로운 과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두려움이 단지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마녀의 위험성과 불온함에 두 사람은 혐오와 기피로 대응하는 한편 불가항력의 매혹에 빠져들게 된다. P는 여배우를 경계하면서도 그녀로부터 시종일관 시선을 떼지 못하고, 호마는 마녀를 보아선 안 되노라고 기도하며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번번이 뒤를 돌아보고 만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두려움을 인지하지 못했던 앙리 박마저도 마녀의 존재를 알게 되고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두려움에 질린 이들은 약과 기도를 통해서 이성을 유지하고, 다시 아침을 맞을 수 있었음에도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매혹의 모순에 굴복해 스스로 자멸을 택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는 오히려 마녀가 조종하는 환상 속에 머물기로 한다. 영화는 공포의 본질로 두려움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론 마녀(혹은 여배우)의 기괴한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묘사하며 공포의 대상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매혹으로 자신의 논리를 역설하고 있다.

 

 

판타지 공포를 표방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마녀의 관>은 의도된 공포영화로 보기 어렵다. 정통 공포영화의 섬뜩함과 경악을 기대했던 관객은 연출자의 자의식에 피로를 느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장르를 막론하고 새로움을 찾는 이라면 이 영화는 기대 이상의 선택이 될 것이다. 공포영화의 정공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박진성 감독의 아쉬움은 오히려 영화가 어떤 법칙이나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문학에서 출발하여 영화와 연극, 음악, 인형극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예술 양식의 자유로운 충돌과 융합을 통해 기묘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예를 들면 2막에서 20여분에 이르는 마녀와의 사투 장면은 3D로 촬영되었는데 첨단의 영상 기술이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의 대표적인 극예술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영화 음악 역시 클래식 음악과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번갈아 사용되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변주되며 결합하여 영화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영화 곳곳에 내재된 혁신적인 장치와 아름다운 시퀀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경험이다.

 

세 개의 막에 걸쳐 자신을 발탁한 감독에게서 묘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킨 여배우와 호마를 공격하고 앙리 박의 환상 속에 존재한 마녀를 연기한 배우 임지영도 배역의 매력이 덧입혀져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여러모로 독립영화의 미덕을 고루 갖춘 신선한 수작이다. 다만 1막에 등장하는 영화 투자사 관계자들의 초조함에서 느꼈듯이 이른바 대박의 압력에 밀려 연출자의 상상력과 자의식이 꺾이고 있는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유독 강한 개성을 지닌 이 탁월한 신인 작가가 앞으로 만들어갈 영화 세계를 장담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다. 부디 머지않은 날에 그의 차기작을 만날 수 있길 고대해본다.

 

 

*** 현재 극장 상영작은 아니지만 작년 CinDi 영화제에서 인상깊게 본 <마녀의 관>이란 독립영화 리뷰를 쓸 기회가 생겨 이 곳에도 올려봅니다. 지금으로선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경로는 다운로드 뿐이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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