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럼 샷 (35 Rhums, 2008) ☆☆☆1/2

 

 본 영화가 곧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기 때문에  2010년 리뷰를 약간 수정하여 올립니다.


  딱히 뚜렷한 줄거리가 느껴지지 않아서 처음엔 아리송하지만 사람들을 단지 조용히 지켜보는 동안 흐뭇함이 생기는 영화들을 가끔씩 접하고 하는데, 클레르 드니의 [35 럼 샷]은 그런 예들 중 하나입니다. 한 아파트의 이웃들인 그들은 굳이 우리에게 뭘 설명해 줄 필요가 없이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그럴 사람들입니다.   [어웨이 위 고]의 커플만큼이나 주인공들은 처음 등장 하는 순간부터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좋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일상을 지켜봅니다. 그리다 보면, 그들 사이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을 엿보게 됩니다.


   나긋하고 덤덤하게 보여 지는 지하철 운행 장면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저로 하여금 제가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게 될 걸 직감케 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영화들을 보는 동안 한 번이라도 주목한 적이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곰곰이 되새겨 보게 만드는 한 가전제품의 등장과 함께였는데, 그건 다름 아닌 전기밥솥입니다. 아마존에서도 판매 할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보다시피 그 동네 가전제품 가게에서도 금방 살 수 있으니 아주 특이한 건 아니지만, 프랑스 영화에서 전기밥솥이 이야기상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니 재미있더군요.


  영화에서는 두 개의 전기밥솥들이 등장합니다. 빨간색 전기밥솥은 지하철 기관사인 리오넬(알렉스 데스카)이 사왔고 핑크색 전기밥솥은 그와 함께 파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딸 조세핀(마티 디옵)가 사왔습니다. 다행히 그녀가 사온 전기밥솥을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딸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아버지가 구매한 전기밥솥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곧 밥이 만들어지고(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질긴 쌀이 아니라 국내 아랍 레스토랑에서도 접할 수 있는 푸석푸석한 쌀입니다) 부녀는 주방 겸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습니다. 워낙 정다운 분위기이니 이들을 부부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고 있지요.

 

 


다음 날도 이 부녀의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특히 두 세대주는 이들과 막역한 사이입니다. 택시운전사인 중년 여인 가브리엘(니콜 도그)은 조세핀이 어릴 적부터 부녀와 가까이 알아 온 사이인데 그녀는 리오넬에 대한 감정을 오랫동안 품어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2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청년 노에(그레구아르 콜랭)는 15년 넘게 산 자신의 뚱뚱한 고양이 때문에 거기에 눌러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와 조세핀 간의 관계는 단순히 친구 사이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인 듯합니다.


  이렇게 한 층에서 이웃하면서 가깝게 얽힌 이 주인공들 주변에서 여러 작은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낮에는 대학에서 사회학 강의를 듣는 대학생인 조세핀은 저녁엔 버진 레코드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그런 동안에 또 다른 관계 형성의 가능성이 보입니다. 리오넬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친구의 은퇴를 축하합니다. 동료들의 선물들과 선의를 잘 받아들이는 가운데 은퇴 기념 술자리도 기분 좋게 끝나지만, 본인은 자신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고 나중에 그는 리오넬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열심히 일해 왔다가 어느 새 일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게 된 그에게는 은퇴는 그에게 시한부 인생 선고만큼이나 암담한 소식이지요.


  이런 공허한 남은 인생을 마주하게 된 그의 슬픈 모습이 평안하게 살고 있는 리오넬과 대비되기도 하지만, 영화는 어느 한 쪽으로도 쏠리지도 않으면서 주인공들이 변함없이 같이 굴러가면서 보이는 모습들을 느긋하게 지켜봅니다. 예정대로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 네 주인공들이 차를 타고 가다가 빗길에서 차가 고장이 나서 멈추는 일이 벌어지고, 이러니 그들은 원래 계획을 취소하고 근처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거기서 분위기 잘 조성해주는 음악이 틀어지고 그에 따라 몸들은 움직여지고 말은 거의 하지 않지만, 별다른 불만 없이 살고 있는 중인 그들이 무얼 원하고 있는 지는 조용히 그들 사이에서 간파되기 시작합니다.

 

 



EBS에서 운 좋게 접했던 1988년작 [초콜렛]의 감독인 클레르 드니가 본 영화를 통해 그리는 프랑스 사회의 한 모습은 상당히 제게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리오넬, 가브리엘, 조세핀, 르네를 비롯한 여러 주인공들은 흑인들인 가운데 강의실에서나 일터에서나 그들 주변에는 흑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리오넬은 이민자이지만 여기에 뿌리를 박은 지 오래고 그나 다른 사람들은 여느 그 동네 사람들만큼이나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중에 리오넬이 딸을 데리고 아내의 독일 고향집을 방문하는데, 어색함이 별로 없는 가운데 조세핀의 이모에 의해 리오넬과 아내의 과거가 자연스럽게 회상되지요.


네 주연 배우들은 튀지 않으면서 캐릭터들로부터 호감을 많이 이끌어 냅니다. 데스카는 나이는 든 평범한 소시민인 중년 아저씨 리오넬로 멋지고 그의 사정을 이해하면서 조용히 곁에 있는 가브리엘로써 도그는 나이와 함께 따라오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옵과 는 콜랭은 그들 간의 관계의 유동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어중간하다가 어느 순간 모든 건 한 방향으로 나가고, 이를 보다 보면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과 [꽁치의 맛]이 살며시 연상됩니다.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어도 뭔가는 부족하고 그에 따라 뭔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니 이를 위해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게 요구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제목의 의미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으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35 럼 샷]은 따스한 인간적 매력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여 지는 아파트 건물들은 그리 멋지게 보이는 건 아니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훈훈하게 진행되는 동안 계속 곁을 지나는 열차들이 곁들이는 야경 속에서 이 볼품없는 건물들은 촬영감독 아그네스 고다르에 의해 나름대로의 정취를 풍기기도 합니다. 여기에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영화는 끝나고 아직 풀리지 않은 것들은 남아 있지만 그건 우리 몫이 아니라 그들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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