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 스틸 (The Big Steal, 1949)

2011.05.26 21:06

곽재식 조회 수:3099

1949년작 느와르 영화, "빅 스틸"은 느와르 영화라고 흔히 분류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코미디 요소가 상당한 모험물 입니다. 내용은 로버트 미첨이 연기하는 수수께끼의 사나이가 멕시코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또다른 수수께끼의 사나이를 추적하는 것으로 출발 합니다. 그런 가운데 로버트 미첨을 사기꾼으로 지목하는 어느 성난 미군 장교 한 명이 로버트 미첨을 또 쫓게 됩니다. 그리하여 영화 내용은 멕시코를 따라 달리면서 미군 장교는 로버트 미첨을 쫓고 로버트 미첨은 여자 주인공과 함께 또다른 수수께끼의 남자를 쫓고 또다른 수수께끼의 남자는 계속 도망가는 이야기로 펼쳐 집니다.


(포스터)

이 영화는 느와르 영화에 대한 패러디 물의 오래된 사례로 종종 언급되곤 합니다. 제목 "빅 스틸" 부터가 느와르 영화의 대표작이자, 필립 말로 탐정 시리즈의 대표작 "빅 슬립"과 비슷하게 들리니, 과연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체크 무늬를 입지 않는다", "총알탄 사나이", "씬 시티"와 같은 본격적인 느와르 영화 패러디 요소가 강한 영화들과 비교해 보자면, 이 영화가 느와르 영화를 패러디하는 부분은 무척 적습니다. 이 영화에는 느와르 영화 특유의 "위험한 여자" 같은 것이 과장되게 묘사되어 웃음을 주는 부분도 거의 없고, 주인공의 독백 나래이션이 우습게 들려오는 것들도 없습니다.

그보다 이 영화는 그냥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신나는 활극, 모험물의 일종으로 보는 편이 맞겠다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에는 30, 40년대에 나왔던 모험물 시리즈의 전통과 어느 정도 이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용감한 주인공이 악당들과 싸우는 가운데 진기한 곳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벌인다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쾌걸 조로 시리즈나 타잔 시리즈 같은 것들은 아마 이 시절에 나온 그런 이야기들 중에 아직까지 이렇게 저렇게 전통이 이어지는 친숙한 것들이라 할만할 것입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들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해서, 미국의 백인 주인공이 다소간 원시적이고 얼마간 전근대적인 제3세계에 날아가서 모험을 겪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런고로 19세기에 나온 대영제국의 용사가 식민지에서 싸운다는 제국주의 시절의 무용담 이야기들과 일맥상통하는 어찌보면 좀 예스러운 분위기의 모험극이라 할 것입니다.

느와르 영화 시대로 넘어가자, 이런 이야기들은 좀 더 진지해지고 음모가 복잡해지며, 느와르 영화 분위기 답게 주인공도 어두워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제3세계에 가서 모험을 겪는 백인 주인공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저 의협심 넘치는 정의의 영웅이 아니라 주인공도 악당 같은 면이 있다든지 어두운 과거가 있다든지. 또는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동료도 어떤 암흑조직의 두목이나 살인자라든지 하는 침침한 분위기가 끼어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야기와 관련있는 이국적인 지명을 제목으로 붙이던 유행이 잠깐 있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들이, "마카오" "캘거타" "차이나타운" "카사블랑카" 같은 영화들일 것입니다. 이런 영화들을 "지명 느와르"라고 이름 붙여서 한 번 묶어 볼 수 있지 싶은데, 2011년작 "샹하이"가 바로 이 시절의 "지명 느와르" 영화들을 21세기에 다시 한 번 복고풍으로 만들어 본 것이라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이 영화 "빅 스틸"은 넓게 보자면 바로 이런 "지명 느와르"의 바탕에 속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줄거리와 인물 특성을 좀 재미나게 하는 정도로만 그 부류의 영화들과 비슷할 뿐, 좀 더 과거의 모험 영화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라고 불리우며 쫓기고 있는 로버트 미첨이 주인공이라서 도대체 무슨 죄를 짓고 어떤 사유로 저러고 있는 건지 궁금하게 만든다는 점은 느와르 영화다운 재미거리 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느와르 영화의 음침하고 쓸쓸한 낭만주의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에 그냥 그렇게 의문 거리가 많은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드러내서 이야기를 계속 보고 싶게 만들면서 주인공이 설렁설렁 농담을 읊조리며 활극을 벌이는 것입니다. 비 내리는 밤거리의 낭만이 없고 반대로 이국의 유쾌한 감상을 강조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험의 멕시코에 도착)

이 영화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고 느낀 것은 이런저런 농담 대사들이 많이 나오고 적당히 웃기고자 연출되어 있는 장면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명대사다운 결정적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드물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 미첨은 쫓기면서도 여유와 당당함, 로버트 미첨 다운 산 같은 무게를 잃지 않고 항상 느긋하게 비아냥거리는 대사를 읊어 댑니다. 그리고 이런 로버트 미첨에게 끌려다니는 여자 주인공은 용감하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라서 여기에 조금도 지지 않고 맞대사를 같이 읊으며 맞섭니다.

이런 구도는 소위 "로맨틱 코미디" "스크루볼 코미디"의 정형화된 티격태격 같이 하며 정드는 남녀 주인공의 모양이 됩니다. 그리고재치를 부린 다양한 대사들을 쏟아낸 모양으로 활용 되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상당수 대사들의 모양은 활극에 어울리는 속도감이나 진지한 사실감을 버리고 대신에, 흥겹게 웃기는 것이 목표인 정형화된 스크루볼 코미디의 웃기는 한 마디의 형식으로 자리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 내용이 그다지 크게 재미난 것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겨우겨우 아주 어색하지는 않겠다 싶은 정도로 버텨가는 모양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만 이런 대사들이 아주 무용지물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범죄자스러운 주인공이 나오고 도망치고 쫓고 하는 암흑계의 이야기인데, 바로 이런 스크루볼 코미디 풍의 농담 대사가 가득한 덕분에 모험 영화 특유의 밝고 신나는 분위기를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남녀 주인공들)

이 영화의 장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점은 영화에 가득한 멕시코 여행 분위기입니다. 이 영화는 멕시코의 대단한 자연 풍경이나 특별한 명소를 부각시켜 무대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휴일" 같이 만든 영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멕시코를 여행하면 재밌겠다 싶은 멕시코 심상을 잘 살려내는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명소를 많이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틈틈히 "멕시코" 다운 황야 풍경이나, 덥고 햇살이 강해 보이는 거리의 풍경을 잘 담고 있었습니다. 라틴 음악이면서도 고전적인 영화에 잘맞게 연주되고 있는 배경 음악도 이런 독특한 분위기에 제대로 한 몫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스페인어를 몰라서 헤메고 있는 점이나, 스페인어 - 영어 의사 소통에 대한 소재도 계속 이야기 소재로 엮여들고 있는데, 이런 점도 대단한 이야기거리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국적인 분위기를 은은히 멋지게 살리는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 속에 묘사되고 있는 멕시코인들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의 비빔밥스러운 점으로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 합니다. 일단 기본 방향에서는, 이 영화 속 멕시코인들은 고전 할리우드 모험물 속의 "원주민"들 분위기 입니다. 도회적이고 부유해 보이는 미국인 주인공들에 비해, 이 영화 속 멕시코인들은 농부들이고 더 가난해 보이는 떼거리로 묘사되어 풍경의 일부처럼 나타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멕시코인 경찰은, 미국인만 보면 "영어 연습할 상대"라면서 촐랑대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결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었던 "미국인과 영어 한마디 나누고 나면 기뻐하며 의기양양하여 달라 붙는 젊은이들" 행세를 하고 있고, 얼핏 그 업무 태도 조차도 부패, 비효율이 만연한 "후진국 공무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그 풍경의 일부에 불과했던 멕시코인들은 주인공들을 도와주는 선량한 역할을 수행하며, 위기에서 주인공을 탈출하게 하는 열쇠가 되어 줍니다. 멕시코인 경찰도 초반에는 그저그런 골칫거리 공무원이었다가 가면 갈 수록 나름대로 머리를 잘 굴리고 제 일을 잘 해내려고 하는 모습을 하나 둘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요컨데, 전체 이야기 구조가 틀에 박힌 제3세계 모험담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럭저럭 다른 이상한 이야기 거리들이 섞여 있어서 야비한 횡령범과 닳고 닳은 돈세탁꾼이 나오는 음침한 소재를 갖고도 고유한 명랑한 분위기를 잘 지켜 나가고, 이게 햇살 뜨거운 멕시코 태양과 그럴듯하게 엮여 있다는 겁니다.


(영화 속 멕시코 경찰)

대체로 짤막한 이야기이고, 추적하는 가운데 적을 따돌리기 위해 몇 가지 꾀를 부리는 장면이 차례로 나오고, 그러는 가운데에서 모든 정체 불명 인물들의 내막이 하나 둘 드러나면서 끝이나는 간단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자 주인공 제인 그리어는 근사한 목소리와 경쾌하면서도 위엄이 넘쳐나는 어조가 멋진데 비해서, 그 외모는 신비로운 여행의 매력적인 주인공에 어울리는 편은 아니라서 아쉬운 면도 있었습니다. 로버트 미첨도 로버트 미첨 특유의 인물로 나온다고는 볼 수 없겠습니다. 무뚝뚝하고 거칠고 말이 없지만 나름대로의 도덕이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그 "로버트 미첨" 다운 인물이 아니고, 로버트 미첨 특유의 덩치 큰 모습도 잘 드러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면모가 조금은 남아 있어서 의심스러운 범죄자의 모습을 살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명배우로서의 튼튼한 기본은 부족함이 없어서 우쭐한 표정과 당당한 몸집은 전형적인 모험물 주인공에 적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이 영화가 느와르 영화의 패러디라는 식으로 언급되는 데는, 느와르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Out of the Past"의 남녀주인공들이 그대로 이 영화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큰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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