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잃어버린 주말 The Lost Weekend

2011.03.19 12:48

곽재식 조회 수:4973

1945년작 "잃어버린 주말"은 고전 느와르 영화 중에 명망 높은 영화로, 이 시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뭘 주제로 뭘 찍든지 간에 평균 이상의 실력을 한껏 뽐냈던 당대 최고의 실력자 빌리 와일더가 감독을 맡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처음 시작하면 뉴욕의 어느 아파트에서 주인공이 주말을 맞아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장면으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표정이 어딘가 불길하고 불안합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입니까? 뭔 비밀이 있는 것입니까? 이 영화는 바로 이 평범한 사건을 앞에 둔 사람의 사연을 하나 둘 드러내 소개시켜 주는 것이 내용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채 보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그 사연이란 것이 첩보물이나 대활극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가까이에서 느껴질만한 것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포스터)

사 연이 무엇인고 짚어 보면 이렇습니다. 바로 이 주인공은 알콜 중독자였던 것입니다. 우애 있는 동생도 있고, 주인공을 사랑하는 주인공의 애인도 있습니다. 사람도 멀쩡하게 생긴데다가 말하는 품새나 행동거지를 보면 똑똑한 신사로 틀도 멀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비밀이 있고, 한 가지 틈이 있고, 마지막 빠진 구석이 있으니, 바로 알콜 중독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소재고, 갈등의 초점이고, 내용의 거의 전부 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소재를 이렇게 잡아 놓은대로, 이 소재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충분히 다 뽑아냅니다. 요점만 잘 뽑아낸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은 알콜 중독자라는데 어떻게 알콜 중독자가 된 겁니까? 알콜 중독자라서 인생이 얼마나 피폐해 졌습니까? 사방에서 술을 못먹게 했을 텐데 어디서 술을 구하겠습니까? 폐인 비슷한 주제에 어떻게 여자 친구는 잘 만났습니까? 이 사람은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 과연 갱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요즘 "인간극장"이나 80년대 "인간시대"에서 비슷한 사람을 다루는 이야기를 한다면 짚어 볼만한 내용들을 다 짚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충분히 볼거리, 곰곰히 생각할 이야기 거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들이 촘촘히 배치되어서, 주말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의 긴장감 있는 줄거리로 흥미진진하 모험극처럼 진행됩니다.


(술이 웬수지... - 가만히 있는 술이 무슨 원수겠습니까. 술을 먹는 그 술꾼이 웬수같은 인간이지)

이런 실화, 다큐멘터리보다 이 영화는 훨씬 더 재밌는데, 그 까닭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 선은 단연 주인공을 맡은 레이 밀란드의 연기 입니다. 레이 밀란드 연기의 최고봉을 볼 수 있는 영화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영화이며, 이리저리 뜯어볼 구석이 많은 멋드러진 솜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단 이 영화에는 주인공 혼자 버텨야 하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술을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중독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어야할 때가 있는가하면,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감 있게 당황스러움이나 부끄러움 같은 일상적인 장면들을 보여 주어야 하는 때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같이 동작을 주고 받는 내용보다 혼자 카메라 앞에서 설치면서 이런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대목이 많기도 합니다.

게다가 대사들도 옛날 연극적으로 길게 죽죽 늘어지면서 읊어대는 내용이 많기도 하고, 문어체에 가까운 음유시인의 노래 같은 구절이 군데군데 덧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1인극이나 연극성을 강조한 소극장 연극 같은 부류의 대사들이, 현실감을 중요시하는 현대 뉴욕의 생생한 배경 속에서, 사회문제를 비판하고 당시 시대의 군상을 그려내는 현실주의 화면 속에서, 그대로 어우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레이 밀란드는 잘 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무릇 영화배우란 "영화배우처럼 생긴 사람"들이 나오고, 영화 속에서는 "영화 같은 일"이 생기기만 하던 고전시대 할리우드 영화라서 이런 묘한 배합이 이상하게 어긋나지 않고 잘 뭉쳐져 어울리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편적으로 연기를 잘하는 것도 잘 하는 것입니다만, 레이 밀란드가 인물의 개성을 절묘하게 잡아내고, 이 영화의 주인공 돈 버냄 만의 특색있는 강렬한 인물상을 그려내는 그 힘도 매우 중요했다고 생각 합니다. 이 영화 속의 돈 버냄은 그냥 단순한 폐인이 아닙니다. 김갑수 같은 사람이 주특기로 삼고 있는 그냥 우울하고 추하기만한 어두운 지식인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런 인물들에 비하면, 훨씬 반듯하고 성실해 보이는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카롭고 냉정하고 건실하고 여유롭고 부유하고 지도자다운 인상마저 선명하게 한 쪽에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알콜 중독자고, 패배자고, 백수라는 한 쪽 면을 더 크게 잘 보여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레이 밀란드의 모습은 위대한 명배우 제임스 스튜어트의 대표 걸작들과 견줄만한 위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기증"이나 "이창" 같은 영화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모습을 보면, 세상 어느 배우보다 건실하고 충직한 "이 나라의 얼굴"이라 할만한 믿음직스럽고 선하면서 훌륭하고 건실한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과 동시에 그 언뜻언뜻 스쳐가는 파란 눈동자에는 어딘지 미치광이 같은 광기가 번뜩 흐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묘하게 일탈적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엇박자의 틈이 있습니다. 이 영화 속 레이 밀란드도 바로 그런 방향과 일맥상통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 밀란드)

이 런 인물은 그 인물 자체로 이 영화의 현실적인 이야기 속의 입체적인 주인공이 되기에 아주 좋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멋진 사람입니다. 가능성이 있고 훌륭하고 위엄있는 성공한 인물에 어울려 보이는 분위기를 한 껏 풍길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알콜 중독자로 주저 앉은 것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과 그 마음이 엮여 있는지, 자기 스스로를 냉소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날카롭고 매서운 면은 멋지다면 멋집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더 궁금해지고, 알콜 중독자로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대목들은 더 안타까워 보입니다. 주인공이 주정뱅이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응원하게 되고, 아슬아슬하게 실패할 때 마다 같이 더 안타까워지는 것입니다.

조연들의 연기나 음악도 훌륭한 영화 입니다. 조연들 중에는 주인공의 동생이 일단 출중합니다. 비중은 큰 면이 아닙니다. 연기할 동작이나 대사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동생은 마치 "80일간의 세계일주"에 영국인 괴짜로 나올만한 기이한 인물일지모른다는 특이한 인상을 잠깐잠깐씩이지만 튼튼하게 내뿜어 줍니다. 이게 기억에 남을만하기도 하거니와, 이 영화 속 사건의 불안한 분위기, 주인공의 광기에 어울리는 데에도 그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연 중에 이 동생 역할 이상, 최고로 꼽아야할 사람은 바텐더 입니다.

이 영화 속 바텐더의 역할은 줄거리를 진행시키기 위해 연결 토막으로, 말하자면 진행요원 배역 입니다. 그러니까, 사극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시장에서 웅성웅성하는 단역 배우들이, "그 이야기 들었나? 세종대왕께서 새로 만든 글자가 그렇게 편리하다지?" "이제 우리도 배우기 쉬운 글이 생겼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퍼뜨리고 살아보세" 부류의 대사를 하면서, 다음 줄거리를 위한 배경설명, 중간 상황 설명 역할을 억지로 하게 하게하는 따위 말입니다. 이 영화 속 바텐더의 기본 역할도 사실 그 정도인데, 그 역할을 이 영화 속에서는 진짜 바텐더의 현실 그대로 모습 같은 느낌이 충분히 나도록 현실감도 지키고 있는데다가, 나름대로 가게의 풍미와 장사의 도리를 중시하는 "바텐더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듯한 묘한 멋도 짤막짤막한 시간에 보여주는 당당함까지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과의 대사 호흡이 그야말로 걸작 입니다. 이 영화에는 느와르 영화의 정석 중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의 독백 나래이션과 함께 펼쳐지는 과거 회상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바에 앉아서 바텐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내용이 진행 됩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은 정말 모두가 배워 마땅한 좋은 솜씨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밑천은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영화 답지 않게 독백 중심의 연극이나 1인칭 주인공 소설처럼 주절주절 읊어대면서 영화를 진행해야 하고, 상대역인 바텐더는 겨우 "줄거리 진행용 연결 토막", "진행요원 배역" 입니다. 잘해봐야, 주인공이 사설을 읊어대면서 혼자 쇼를 하고 바텐더는 관객 바람잡이 한답시고 추임새 넣는 정도에 그칠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훌륭한 리듬감과 출중한 연기는 그 선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사설 읊기 쇼도 그대로 벌어지고, 바텐더가 추임새 역할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걸 잘 하고 있고,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동시에 진짜 취객과 바텐더의 대화 같은 생동감을 계속해서 조금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바텐더 앞에서 사연을 들려주면서 느와르 영화 독백 나래이션의 세계로!)

서 서히 주인공이 알콜 중독의 세계에서 뒹구는 풍경을 보여주다가, 절정 즈음 되는 대목에서 한 번 확 치달아 주는 효과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영화 내내 뉴욕 맨하탄의 정경, 빌딜 숲, 아파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지하철 같은 뉴욕 다운 뉴욕의 현실적인 심상을 계속해서 휘감아 가는 영화 입니다. 알콜 중독과 같은 현실 비판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소재에 잘 어울려들기도 하는 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영화가 절정 부분이 되어, 알콜 중독자의 금단현상을 묘사하는 즈음에 이르면서는, 그 틀을 깨고, 금단현상으로 보이는 환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몽 같은 장면, 환상을 영상에 담아냅니다. 그래서 그 치달아가는 대조 효과는 잘 살아 났습니다.

어찌 되었건 전체적으로보면 소소한 이야기인 영화 입니다. 어마어마한 대모험이 있는 영화라거나, 난리법석이 벌어지는 대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제목처럼, 알콜 중독자 한 명이 주말 동안 헤메면서 괴로워하는게 영화 내용의 전부이고, 거기에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는지 이유를 짚어 보여주고, 어떻게 다시 되살아날 가망은 없는지 짚어보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뉴욕 시내의 빌딩들, 거리들을 훑고 지나가는 촬영이 아주 안정적인 데에 비하면, 환영 장면의 간단한 특수효과도 무척 조잡하고, 결말 즈음에 이르면 기대에 마땅한 파국적인 극적 사건 없이, 분위기 깨는 과하게 교훈적인 연설을 잠깐씩 읊는 헛점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남녀 주인공들)

그 런데, 그래서 더 대단한 맛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사회 문제인 알콜 중독자를 잘 보여준 영화이고, 그 알콜 중독자 중에서도 특별한 개성이 있는 한 사람의 사연을 잘 보여준 영화 였습니다. 그런데 그 둘을 이렇게 이어서 잘 해 놓았기 때문에, 알콜 뿐만 아니라, 모든 좌절을 겪고 헤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이 꺾이고 방황하는 순간이나, 스스로 제 밥값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신세 져야 하는 부끄러움을 잡아내는 그 모든 순간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이런 비굴한 순간,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도 시종일관 자신의 그 밑바탕에 살아 있는 존엄을 계속해서 그 멋으로 한 줄기로 잡아나가는 주인공 배우, 레이 밀란드의 연기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볼만 합니다.


그 밖에...

50 년대 전후로한 영화들 중에, "그 영화 TV에서 잠깐 해 줄 때 봤었는데 참 재밌었는데..." 싶어서 문득 찾아보면, "뭐, 이 영화도 빌리 와일더 감독작이란 말인가?" 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는 듯 합니다. 도대체 빌리 와일더 이 양반은 뭘 이렇게 재미난 영화를 잘도 많이도 잘 찍었나 하는 생각이 그럴때마다 드는데, "뭐 든 잘 찍는 최고의 '꾼', 빌리 와일더"에 대한 이런 감상은 널리 퍼져 있지 싶습니다.

IMDB Trivia를 보면,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유일한 영화라고 합니다.

역시 IMDB Trivia에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영화를 개봉하지 말라고 주류 업계에서 5백만 달러를 제시한 적이 있다고, 감독 빌리 와일더가 이야기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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