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나온 "강호정"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되어 있는 홍콩 느와르 영화 "영웅호한"은 1987년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강호정"의 내용을 몰라도 볼 수 있는 스스로 기승전결을 갖고 있는 분리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역시 주윤발인데, 족히 십수년째 암흑가에서 자리 잡아 오고 있는 관대하고 명망 높은 두목으로 나옵니다. 내용인즉, 주윤발이 나이 들어 가면서, 이제 좀 싸움질 좀 덜하고 기업화된 조직으로 자리잡게 하려고 하는데, 그 틈을 타고 흉악한 젊은 적수가 깝죽되면서 자꾸 싸움을 걸어서 위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말은 홍콩 느와르 영화 답게, 무한히 탄환이 쏟아지는 마법의 총으로 서로 난사해대는 대결전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 입니다.


(일본판 포스터에 씌인 제목은: 사랑과 복수의 만가)

" 영웅호한"이 전편 "강호정"을 안봐도 이해하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영웅호한"의 재미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역시 "강호정"을 보고 보는 편이 더 좋으리라 생각 합니다. 두 영화는 꽤나 다른 분위기의 영화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 심지어 주인공도 다릅니다. -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무엇인지 좀 더 강하게 느끼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떤지 좀 더 재미나게 맛보려면, 과거사를 다루는 "강호정"을 봐 두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요 인물이 배신해서 주윤발이 충격먹는 장면에서, 관객도 같이 "아... 1편 강호정에서 그렇게 충성스럽던 그 양반이 2편인 영웅호한에서는 배신을 하다니! 이럴수가! 이럴수가!" 하면서, 주윤발과 같이 충격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강호정"을 우선 짧게 소개하면 내용은 이렇습니다.

" 강호정"은 일단 "영웅호한"보다 조금은 더 현실감 있고 조금은 더 진지한 시각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웅호한"은 조직폭력배들이 주거니 받거니 결투를 벌이는 내용이 중심인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 입니다. 하지만, "강호정"은 출발부터가 중국 공산화 무렵부터 홍콩으로 급격히 몰려든 중국 본토 출신 이주자들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주자 출신 빈민들이 어떻게 살아 남기 위해서 자리 잡고, 어떻게 비극적인 범죄의 세계에 빠져 드는지, 그 밑바닥 세계를 한 번 처절하게 잡아 보자는 시각이 한 자리에 잡혀 있습니다.

저는 "강호정"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영향을 많이 받은 영화라고 생각 합니다. 요즘 한국영화와 비교한다면, "친구" 계열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지역적/종족적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구질구질한 세계에서 어릴 때에 나름대로의 낭만을 가진 채로 좌충우돌 살아가면서 웃고 모험도 하고 하는데, 자라날 수록 비정한 세상의 현실 속에서 그 낭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결국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끼리도 비극적으로 더럽게 싸울 수 밖에 없는 폭력배의 세계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뉴욕에 온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강호정"은 홍콩에 온 중국 본토 한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용은 착하고 성실하고 굳건한 청년인 유덕화가 가난을 극복하고 거지 같은 세계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 가기 위해서 폭력배들과 "의리"로 뭉쳐 일하게 되고, 그러다가 조금씩 생기는 갈등들이 세상의 살벌함과 비정함과 함께 자라나면서 점점 커져서 마침내, 친한 친구들, 형제들간에 총질하고 싸우는 결말로 치닫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홍콩을 구성하는 각계각층 사람들, 홍콩의 뿌리 깊은 암흑가가 어떻게 자리잡아 있고, 빈민층과 밀착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는지 그 모양을 보여 줍니다.

믿을 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민 이주자들이 그바닥의 범죄사건이나 폭력배에 시달리게 되면, 믿을 곳이라고는 조금 더 안면이 있는 다른 폭력배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다보면 자기에게 옛날에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 자기 고향 사람들끼리 엮여서 폭력배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호정"은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연기가 다소간 양식적으로 과장되어 있어서 좀 우스꽝스러워 보일 때도 있는 영화입니다만, 그러면서도, 이런 사람이 자라나고, 세상 속에서 썩어가면서 생길 수 있는 갈등상을 충실히 늘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줄거리의 이어지는 모양이 자연스럽게 죽죽 잘 뻗어 있어서, 가끔식 연기가 가짜 같아 보일 때가 있어도,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감정 속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오갈데 없는 사람들에게 믿음직했던 두목님, 주윤발)

유 덕화는 성실하고 "착하다면 착하지만", 그 성실함으로 근면과 의리를 위해, 조직폭력배 사채업자의 빚독촉꾼 일이나 패싸움 행동대장 역할을 맡아 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입체적인 인물 입니다. 이런 주인공을 맡은 유덕화의 그 순수한 청년 같은 모습은 과연 멋집니다.

여기에 대립되는 열등감이나, 잘 해 보려고 했는데 약간씩의 실수로 욕먹는 바람에 조금씩 수가 틀리면서 사악한 막나가는 놈으로 전락해 가는 악당의 모습도 잘 묘사되어 있고, 중요한 조연으로 활약하는 덕망있고 의리있고 여유있고 항상 의지할만하고 언제나 튼튼한 벽처럼 강력해 보이는 주윤발도 기억에 남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체질적으로 "폭력배 체질"이 아닌 까닭에 묘하게 정이 갈 수 밖에 없는 알란탐의 모습은 개성적입니다.

그리하여, "강호정"은 순수 청년 유덕화가 썩은 홍콩 바닥에서 조폭질 하면서 살며 자라나는 이야기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처럼 보여주는 가운데 - 심지어 배경 음악도 비슷한 풍으로 되어 있는 데가 꽤 있습니다. - 중간중간에 지루할만하면, 과격한적인 장면, 추잡한 장면을 툭툭 터뜨리는 형태로 되어 있는 모양 입니다. 이런 자극적인 장면들은 처절한 상황을 묘사하는 효과도 있고, 지루함을 가시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그 비중 조절이 잘 되어 있어서, 이런 과격한 장면 때문에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두워진다거나 더러워진다거나 하는 면이 별로 많아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영화 중에는, 70년대부터 쓸데 없이 고문 장면 같은 거 길게 보여주다가 영화 전체의 흐름을 다 망쳐 버리면서 곤두박질쳐 버리는 경우가 꽤 많지 않았나 합니다. 주로 반공물이나 일본군과 싸우는 내용일 경우에 많이 봤다는 생각 듭니다.

그 외에도 "강호정"에는 홍콩 느와르 영화 특유의 총질에 선혈이 낭자하는 장면을 파괴감, 비극성을 강조하는 시각적 효과로 사용하는 점들도 충분히 보입니다. 유덕화가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하는 대목의 총격전 장면은, 옛 서부 영화에 나오는 집안에서 집밖에 깔린 적들과 아슬아슬한 총격전을 벌이는 그 연출 방법이 아주 잘 살아 있었습니다. 집 안에 갇혀 있고, 사방에서 휩싸고 있는 그 공간감, 긴박감, 탄환 한발 한발이 빗발치는 그 요란함, 충격 모두 옛 서부 영화의 명장면처럼 잘 살아 있었습니다.

이 "강호정"은 끝장면이 좀 급작스럽고, 갑자기 툭 잘리듯이 결말을 맺으면서 "그 후의 뒷 이야기"라면서 각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소개해 줍니다. 상영시간 길기로 영화로 악명 높은 진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처럼 온갖 이야기, 온갖 감상을 다 정리할만한 처지가 아니라서 그렇게 잘랐지 않나 싶습니다. 덕분에 아련한 느낌이나, 여운이 더 사는 것도 사실인데, 한편으로는 어찌보면 뒤이어지 지는 "영웅호한"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이야기 인데 두 벌로 쪼갠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전편 "강호정"의 주인공 유덕화와 후편 "영웅호한"의 주인공 주윤발)

그리하여, 나온 이 "강호정"에 뒤이어지는 속편격인 "영웅호한"의 이야기는 "강호정"의 유덕화, 주윤발 그리고 악당, 부하들이 그대로 다시 출연하되, 약 10년 후 정도를 배경으로 하는 내용으로 펼쳐 집니다.

그 러나 다른 점은 더 큽니다. "영웅호한"은 주인공이 초보조폭 유덕화에서 조폭두목 주윤발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주제와 소재도 꽤 바뀌었습니다. "강호정"은 밑바닥 외지인들이 홍콩에서 분투하며 비정한 폭력계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약간은 사회적이고 약간은 현실적인 이야기 였습니다. 하지만, "영웅호한"은 의리의 조직과 악의 조직이 대결한다는 훨씬 더 단순하고 대신에 더 강렬한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좀 더 살펴보면 "영웅호한"의 이야기는 서부극의 싸움 이야기나 사무라이 영화의 싸움 이야기를 현대를 배경으로 그대로 옮겨 온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아무나 칼질하고 아무나 총질하지 않으니까, 등장인물들을 조폭들로 하고, 현대 홍콩이 서부의 OK목장이나 전국시대 일본과 같지는 않으니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 외에 전반적인 싸움 구도와 이야기 꾸며나가는 방법은 대거 옛 서부영화, 사무라이 영화 풍의 전통적인 구도 입니다. 스파게티 웨스턴 이라고 불리우는 이탈리아산 서부 영화들은 사무라이 영화에 영향을 받은 면이 많으니 두 부류의 이야기들을 잘 섞어서 집어 넣지도 좋지 싶습니다.

이 영화는 여기에다 홍콩 느와르 영화의 조폭 묘사 방법의 맛을 흠뻑 집어 넣어서, 배경을 현대로 옮긴 그 개성이 확 어울려서 또다른 제3의 영화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놓은 형국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 를 들자면, 이 영화의 명장면 중에 하나인 성규안이 고층 빌딩에서 적을 암살하려 할 때, 고층 빌딩 창문닦이로 위장하여 습격하는 대목을 볼만 합니다. 창문닦이 위장해서 내려와서 고층빌딩 사무실 안의 목표를 노리는 그 모습은 사무라이 영화의 닌자 습격 장면의 아이디어, 관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회화적인 다채롭고 인상적인 화면 구성을 노리는 총격 장면의 구도도 옛 사무라이 영화의 일당백 칼싸움 장면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물들의 옷차림, 총격을 묘사하는 방식은 결코 이런 영화를 단순히 베낀 것과는 전혀 다른, 홍콩 느와르 영화만의 "폼 잡고 무한탄창 권총으로 싸운다"는 감상으로 멋지게 승화되어 있었습니다.


(불타는 대결전)

이야기 구도가 단순한 만큼, 그 단순한 기둥의 주춧돌이 되어 자리를 잡아 줄 인물 묘사가 영화의 재미를 좌우하지 않겠나 싶은데, 일단 이 영화의 주인공인 주윤발은 기대에는 못미쳤다고 생각합니다.

특 유의 듬직하고 여유로운 모습은 물론 위엄 있고, 의리와 덕망이 있는 두목이라는 모습에 겉모습이 잘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장된 감정이 많은 각본과, 작위적으로 연출된 상황에서 정형화된 대사를 읊어야 하는 장면들 속에서, 주윤발은 자연스럽게 연기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각본과 부드러운 변화 속에서는 잘 어울립니다만, 극적으로 과장된 상황에서는 꾸민 느낌이 너무나 드러나는 듯 했습니다. 보통 아스라한 허망감 속의 낭만과 같은 기묘한 감상을 담아내는데 솜씨가 뛰어난 배우라서 그런지, 반대로 이 영화 속에서처럼, 그냥 보통 사람과 같이 사업이 잘 안되는데 좌절하고 늙어가는데 겁 먹는, 단순한 감상을 실감나게 연기하는 것은 각본 이상의 위력을 해낼 수는 없었지 하고 짐작해 봅니다.

물론 그게 아주 망해 먹는 수준은 아닌 것이, 그래도 겉모습 자체가 워낙 늠늠한 두목에 잘 맡기에 그래도 몇몇 장면은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중간에 주윤발이 초라하게 몰락한 모습이지만 억지 웃음을 띄고 유덕화를 찾아오는 묘하게 평화로운 광경은 관객이 보기에도 불쌍해 보이고, 감정을 돋굴만 합니다. 게다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원래 인생이란 이런 것 아닌가. 나는 내일 결전에서 죽을 걸세"라고 웃으면서 자기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할 때 즈음에서는, 주특기를 발휘 할 수 있는 장면을 제대로 만납니다. 이 대목의 주윤발은 잠시지만, 그 허망한 낭만이 불타오르면서 단연 영화의 비장감, 긴장감을 이끌어내고, 정말로 인생에 대한 어떤 한 관점을 들려주는 듯한 심오함마저 느껴질 지경 입니다.


(부유한 대부 주윤발)

그 렇다면 이 영화에서 정말로 연기력을 자신의 솜씨 끝까지 한껏 보여주는 인물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악역을 맡은 만재양(万梓良) 입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각본도 괜찮은 것이 던져졌거니와, 각본이 좀 엉기는 부분에서도 그걸 설득력 있게 보여 줄 정도로 인물을 온몸에 체득한 듯 참 잘도 보여 줍니다. 비열하고, 비겁하고, 사악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럴듯해 보일 정도의 성격 묘사도 잘 되어 있습니다. 욕심은 많고 대단한 사람으로 존경 받고 싶은 마음은 큰 데, 자존심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밀리는 느낌은 받기 싫어하고, 거짓말과 속임수에 아무런 죄책감을 못느낀 결과 꼬여 버려서, 비굴하고 더러운 놈이면서 동시에 온갖 악행을 다 벌이는 썩은 모양을 잘도 연기하는 것입니다.

일일연속극을 보다보면, 주인공 "캔디 캔디"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 악역을 맡은 배우가 "시련을 주기"위해 별별 나쁜 짓을 골라서 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 간혹, 이야기를 이어야 하고, 주인공에게 "이러이러한 시련을 주어야 한다"는 목적이 앞서다 보면, 악역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각본상 필요한 악행"을 별 이유도 없이 말도 안되게 막 저지르고 다니는 줄거리가 튀어 나와 버릴 때가 있습니다.

아 무리 악역이라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싶은 행동을 그냥 판짜주기 위해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비슷할만한 내용으로 빠질 순간에도 끝내주는 악역연기로 그걸 막아냅니다. 말이 되는 것처럼 연기해서 보여 줍니다.

물론 각본이 몸에 맞게 잘 주어진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영화와 TV물들 중에는 악당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악한 사상을 갖고 있다"라고 일부러 주절주절 악당이 읊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악당이 "세상이 그렇게 동화책처럼 되는 게 아니야. 세상은 돈과 힘이 지배하고 있는 거야. 그걸 알고 따르는 사람은 돈과 힘을 얻고, 그걸 모르는 바보들은 영원히 그 돈과 힘에 당하는 거야" 따위의 이상한 현실주의 철학이랍시고 떠들만한 내용을 강의하는 장면을 집어 넣는 겁니다. 가끔 가다보면 한술 더떠서, 여기에 주인공이 대답한답시고, "후훗, 하지만 난 아직 세상이 동화책처럼도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데, 어쩌지?" 따위의 대사로 맞대응하는 소위 "명대사"를 써 넣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아주 관객들 손발을 오징어 구이 다리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는지 뭔지.

이런 이상한 쓸데 없는 짓은 할 필요 없습니다. 이런 아직 솜씨가 미숙한 어린아이들이 그림을 잘 못그려서 선 몇개 이상하게 그려 놓고 "이거 사자 그린건데 못 알아보면 어떡하나" 싶어서 옆에 글자로 "사자"하고 써 놓는 꼴 입니다. 이 영화에서 악역에게 주어진 각본과 연기가 바로 그런 바보짓을 안하고, 정말 그런 더러운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장면으로, 사연으로, 행동으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실? 훗 진실이 뭐가 중요해? 결국 나중에는 힘있는 자의 말을 믿게 될 뿐이야" 따위의 조악한 대사를 악당이 읊게 하면서, 사회에 대해서 무슨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심 없이 거짓말을 하는 비열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관객이 스스로 "어떻게 저럴 수가!" 하고 통탄하게 하고, 그 거짓말에 따르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줘서, 관객이 다시 한번 "어떻게 이럴 수가!" 하게 하는 것이 제맛 아니겠습니까?

이 영화의 악역연기는 이런 비굴하고 더러운 모습에다가, 막판으로 갈 수록 그런 악행이 점점 쌓이고 지나치다 못해 광기와 정신나간 폭발로 연결되는 절묘한 미친 발작적인 모습까지 드러내는데, 그 모양은 과연 훌륭합니다. 헛점이라면, 몇몇 급격하게 사건이 바뀌는 부분이나 동작이 과장되어 있는 장면에서는 잠깐씩 연기의 현실감이 떨어질 때가 있기는 하다는 것인데, 미치광이스러운 모습일 때의 그 솜씨는 그런 단점을 덮어 버리기에 충분했다고 생각 합니다.


(악당이 성실한 유덕화 앞에서 깐죽거리기)

이 영화의 결말을 앞두고 벌어지는 막판 대결전은 홍콩 느와르 영화의 막판 대결전다운 "비처럼 쏟아지는 탄환"의 경지로 아주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단역들이 총탄 앞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고, 배경은 타오르며 무너져 가는 집으로 되어 있어서, 결말의 파국적인 느낌을 한 껏 더합니다. 다들 미쳐 돌아가서, 죽음의 공포와 분노, 절망, 막나가는 자포자기가 섞인 가운데 끝없이 총을 쏘아대는 모양은 "스카페이스" 같은 영화의 장면들을 좀 더 과장하고 좀 더 빠르고 길고 크게 보여준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 모양은 사무라이 영화의 결전 장면과 서부 영화의 결전 장면을 잘 섞어 놓은 느낌도 납니다.

아 쉬운 점이 있다면, 이 결말 장면에서 싸움의 중심이 되어야할 주윤발이 총싸움 연기를 좀 못한다는 것입니다. 광기로 적을 제압하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스턴트 연기 때문에 고생하는 배우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끓어오른 악역 인물과 한동안 작렬했던 막판 대결전의 거대한 무게감에 비해서, 인물들의 최후가 별로 인상적이지도 않고 극적인 사연도 없이, "그냥 죽었음 - 끝" 같은 간촐한 모양이라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그리하여, "영웅호한"은 단순한 구도에서 그다지 강렬한 변곡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이고, 정말 서부영화, 사무라이 영화처럼 현실이라기보다는 영화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속에서는 그대로 충분히 힘을 쓰는 수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영원히 두목님만을 모시는 비서와 두목님)

조 연들의 훌륭한 연기는 그 힘을 더하는 빼놓을 수 없는 점이었습니다. 손을 씻고 멀리 말레이시아로 건너가서 소박하지만 잘 살고 있는 유덕화의 정말로 "착해" 보이는 모습하며, "강호정"의 사연과 이어져서 보면 더욱 감흥이 사는 여자 등장인물들의 슬픈 연기도 출중 한데다가, 인물들의 짧지만 애절한 사연들도 틈틈히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중간에 임총(林聪)이 주윤발 앞에서 울면서 하는 대사도 대단합니다. 이 부분은 처절한 감정 표출이 강해서,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인물의 행동동기가 "저런 심정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겠다" 싶게, 개인기로 때워버리는 실력 넘치는 장면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아주아주 적은 비중을 갖고 있지만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인물로 등장하는 이수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수현은 자신의 주특기인 "실력 뛰어난 경찰" 역할을 주특기 답게 훌륭하기 그지 없게 보여주는 데, 우울한 감정으로 충만한 이 영화에 잘 어울려 드는 거친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낙천성을 드러내는 모습은 단연 멋집니다. 조폭과 음모로 가득찬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이 형사는 끝까지 고지식하게 경찰의 의무만을 고집하는 정의파 형사인데, 그 덕에 보다보면, "그래, 역시 정직하고 착하게 사는게 제일 속편하지" 싶은 교훈적인 효과마저 전해 줄 정도로 이수현은 솜씨가 좋습니다.


그 밖에...

영 화가 처음 시작할 때, "진정한 영웅이라면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건다!" 같은 부류의 뭔 홍콩 느와르 영화 보고 감동 받은 중학생 일진 모임에서 연습장 뒤에 써놓는 듯한 단순무쌍한 대사가 확 나오는데, 읽다 보면, "첩혈가두"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이 영화 속 이수현의 인물은 절대 부패하지 않는 형사라는 특징 때문에, 이수현은 이 영화 속 조폭세상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돌발 요소로도 긴장감을 더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수현의 비중이 좀 더 크게 이야기를 꾸며도 좋지 않았겠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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