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작 홍콩 느와르 영화 "용재강호"는 이소룡의 아들로도 유명했던 브랜든 리(이국호)가 주인공을 맡은 영화입니다. 내용은 의로운 주인공이 가난하지만 성실한 청년으로 잘 살고 있는데, 거물급 조직의 후계자인 한 친구가 야비하게 주인공을 이용하는 바람에 주인공이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한다는 게 전반부 입니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이 친구가 위협하는 덕택에 옥바라지 하던 애인조차 도주하게 되어서, 어마어마한 복수심에 이를 갈지만, 결국 모든 것을 묻어 두고 손씻고 조용히 살기로 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친구는 오랫만에 고향에 놀러온 옛 애인을 공격하려 하기에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대결전을 벌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나이의 분노, 드이어 폭발! 화이어 드레곤 불을 토한다!: 그러나 누가 되었건 불을 토하는 것은 맨마지막 한 5분 정도 뿐...)

이 영화의 특징이라면 폼잡는 장면이나 총격전으로 유명한 것이 홍콩 느와르 영화이지만, 영화내내 제대로 된 총격전 장면이 거의 하나도 안나온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미루고 미루고 버티고 버티다가 마지막에 한 10%, 20% 정도 상영시간 남겨 놓은 맨 끝트머리에서 사정없이 총알이 휘몰아치는 탄환폭풍을 보여주는 꼴로 되어 있습니다. 줄거리가 상당히 전형적인 홍콩 느와르 영화의 틀을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점은 좀 안맞아 보입니다. 그러니만큼, 이 영화는 좀 지루한 구색이 없잖아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총싸움 장면, 범죄 세계의 긴박한 장면들이나 치밀한 갈등 구도를 보여주는 대신에 이 영화가 상영시간 내내 다루는 것은 사건과 이야기들의 자잘한 세부 사항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주인공을 배신할 악당놈과 주인공은 친구가 되었는지, 주인공은 애인과 어떻게 만났는지, 배신하는 친구는 어떻게 해서 주인공을 배신하는 음모를 세웠는 지, 주인공에 대한 배신은 어떠한 형식으로 펼쳐지는 지, 이렇게 배신을 해서라도 일을 저질러야 할만큼 친구가 날뛰어야할만한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배경설명을 하나하나 해 줍니다. 그래서 이야기 내용이 마치 TV연속극처럼, 한 단계 한 단계 꽉꽉 차서 넘어 갑니다.

아닌게 아니라, 가난한 친구와 부유한 친구의 대립, 부유한 친구가 애인을 빼앗아 가려고 하고, 가난한 친구가 배신 당하고, 복수하려 한다는 부류의 구도는 TV 연속극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상당히 전형적인 이야기 거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80년대에 "다이너스티"류에 영향을 받은 TV연속극들이 유행한 이후로는 한국 TV극에서도 무척이나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인데, 내용이 흘러가는 형식이나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감정의 흐름이나 내용의 초점을 보면 이런 TV물들과 닮은 면들은 더욱더 눈에 많이 보입니다. 잘생기고 멋진 배우들이 원한, 사랑, 질투와 같은 극적인 감정을 재료로 해서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움직이는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말입니다.

그런 TV연속극 같은 맛으로 살펴 본다면 이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무척 잘 어울리는 편 입니다. 주인공인 브랜든 리는 상당히 개성이 있는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는 그냥 규격화된 바른 생활 사나이 모양으로 움직일 뿐이라서 조금 싱겁긴 합니다만, 그래도 허우대 좋은 청년 역할이 배역을 돕는 수준은 되어 주고, 여자 주인공의 젊고 발랄한 모습은 영화에 더 없이 잘 어울립니다. 주인공의 친구 역할, 친구에서 배신자로 변해가는 역할, 미치광이 범죄자 역할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다 자연스럽게 잘 표현해 낸 악당 같은 경우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브랜든 리에게 깝죽거리는 단역)

그렇기는 합니다만, 역시 전형적인 줄거리에 그냥 저냥 쌓아나가는 그저그런 이야기로는 충분히 재미있다고 하기란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줄거리라면, 역시 좀 아름다운 정경을 화면에 담으려고 노력해 보거나,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독특한 사회상을 잡아내는 감각 같은 것이 스며들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영화의 생동감을 살리는 방향일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배경들은 모두 줄거리 진행 갈등 그 자체만을 위한 가짜로 꾸민 상징적인 세트장 속 무대장치에서만 생겨난 막연히 꾸민 느낌의 것들 뿐입니다. 몇몇 스며들어 있는 싸움 장면이나 주인공이 극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들도 사실주의 묘사와는 거리가 매우 멉니다.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후반에 보면, 아주 오랫만에 애인과 주인공이 재회하는 장면이 주인공이 힘겹게 일하고 있는 쓰레기장을 배경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내리는 밤, 쓰레기장, 오가는 거대한 쓰레기 트럭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애인과 빛나는 밝은 빛의 우산이 대조를 이루는 모습은, 더럽고 추잡한 세상 속에서 한 가닥 순수함으로 남아 있는 이 연인간의 관계를 아주 단순하고도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도의 장면들만이라도 조금씩 더 쌓여 있었다면 이 영화는 한결 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눈물의 재회)

결국 이 영화는 나름대로 한 가닥의 개성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영화 맨 끝트머리에 물량공세의 대결전 장면을 넣었습니다. 막판 대결전 장면에서 이 영화는 일일연속극처럼 진행되던 영화의 흐름을 잠시 포기하고 갑자기 확 돌변해 버립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가난한 홍콩 청년이 복수하는 내용이 아니라, "코만도"나 "람보3" 형의 무적의 특공요원이 혼자서 혈혈단신으로 잠입해서 악의 무리들을 다 박살내는 내용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총격전 장면이 거의 없었던 영화치고는 이런 전환도 좀 어색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이상한 특공요원 대결전 장면이 그 나름대로 잘 찍혀 있다는 것만은 또 무시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한 영화 입니다. 막판에 이상하게 돌변해버리기는 하는데, 그 돌변한 장면이, 비록 돌변해서 잘 안이어지는 하지만 그대로 또 흥겹다면 흥겨운 부수는 맛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영화로 따지자면 "슛뎀업", 옛날 영화로 따지자면 "와일드 번치"나 "석양의 갱들" 같은 영화처럼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지치도록 많은 탄환을 날려대며 마구 밀어붙이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이 영화는 "홍콩 영화 총싸움 장면"의 악명을 제대로 보여 줄만하게, 현실감과는 아무 상관없이 극적인 효과와 미술적인 파괴감만을 위해 총격전 장면을 꾸민 영화 입니다. 총알이 많이도 나오고 쉽게 죽어야 할만한 적은 스쳐도 죽고, 쉽게 안죽어야 할만한 인물은 수류탄을 고이 붙들고 있어도 안 죽는 지경입니다.

거기에다가 마지막 대장인 악당 친구는 지독하게 버티고, 주인공이 처절하게 혈흔을 남기게 하면서 서로 싸우는 장면과 연기도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는 조금도 관계 없는 형태로 무슨 악기 연주하듯이 총질을 하는 총격전 장면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 충격과 긴긴싸움의 무게를 어느 정도 전달하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묘미가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초장에 나오는 권총은 복선을 위한 복선일 뿐...)

이 영화를 군데군데 보면, 브랜든 리가 잠깐씩 나오는 잡 악당들과 맨주먹 맨발로 싸우는 격투 장면들에서 무술 솜씨가 썩 좋게 잘 잡혀 있다는 게 눈에 뜨입니다. 잠깐 잠깐 별 큰 비중 없이 나오고, 영화 전체에 브랜든 리가 맨손 무술 잘한다는 게 무슨 큰 소용도 없는 줄거리라서 도움은 안됩니다만, 이런 요소가 있는 것을 보면, 영화 전체에 진지한 연출이건 혹은 싸움 장면이건 어느 쪽이건 좀 더 강화했어야 좋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차근차근 줄거리만 짚고 넘어가는 지금 영화도, 비슷비슷한 TV주말연속극들도 끝없이 인기를 얻을 수 있듯이 보다보면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거기다 막판 대결전 장면은 나름의 향취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땅히 더 나아갈 수 있었던 영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밖에...

맹해와 브랜든 리가 감옥에서 만난 친구가 되어 막판에 함께 싸우는데, 전형적인 "배트맨과 로빈" 관계로 나와 줍니다.

브랜든 리의 무술 장면이 깔끔했다는 점과, 마지막 대결전의 총싸움 장면이 좀 뜬금없이 뛰어들었다는 점, 이에 비해 이야기 내내 진행되는 줄거리 진행은 별 큰 싸움 장면 없이 평평하게 흘러간다는 점을 보면, 제작 과정에서 어떤 내용 중심으로 찍어야 할 지 몰라서 좀 갈팡질팡한 영화 아닌가 싶기도 하다는 짐작도 잠깐 해봤습니다. 이래저래 영화를 만들다보니, 갑자기 요즘 홍콩 느와르 영화식 총격전이 유행이라고 하니, "어쨌거나 끝에는 총격전 장면 집어 넣자"고 해서 편집 다시 하고, 제작비 다시 배분하고 한 결과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유난히 브랜든 리와 "이블 데드" 시리즈 시절의 브루스 캠벨이 좀 닮아 보이는 영화라는 생각도 자주 하게되는 영화 입니다.

브랜든 리의 첫 영화이자 유일한 홍콩 영화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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