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King's Speech/Somewhere

2010.12.30 15:26

베베른 조회 수:6294



[The King’s Speech] 


로버트 알트먼의 [The Player]에 나오는 프로듀서들이 하는 식으로 [The King’s Speech] 의 플롯을 한 줄 요약해 보자면, ‘옛날에 말을 심하게 더듬는 왕이 있었는데 과격한 언어 치료사의 도움으로 고쳐졌다더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2시간짜리 영화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요. 그러나 올해 나온 또 다른 훌륭한 영화 [The Social Network] 가 ‘하버드에 살던 해커가 페이스북이라는 걸 만들어서 졸지에 떼부자가 되었습니다’에서 출발해서 근사한 영화를 하나 만들어낸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엄청나게 풍요롭고 흥미진진한 영화를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은 아이디어로부터 굉장히 성공적으로 뽑아냈습니다. 


영화는 사실 제 업계의 이야기와 많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프리 러시가 맡은 언어 치료사 (Speech Therapist 를 이렇게 번역하자니 좀 어색하기는 한데 다른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리오넬 로그와 조지 6세의 관계는 단순한 언어 치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의학 교육이나 훈련의 경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doctor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 게다가 당시에는 대영 제국의 변방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죠 – 자기 집 지하실의 허름한 진료실에서 Duke of York ‘버티’를 데리고 최근의 정신 의학에서라면 인지 행동 치료, 정신 분석학, Relaxation technique, 자기 반영 치료 등으로 명명되었을 갖가지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의 말더듬이 버릇을 고쳐낼 뿐 아니라, 그를 영국의 가장 어려운 시기 중 하나였던 제 2 차 세계대전 시에 국왕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조지 6세’로 만들어 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사실 얼마나 실제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리오넬이 조지 6세의 주요 연설 장면 때마다 그의 바로 곁에서 그를 도왔던 것은 사실인 듯 하지만, 사실 조지 6세의 말더듬이 버릇은 이미 1927년 경부터는 상당히 호전되었던 듯 하니 말이죠. 리오넬의 치료 성과는 영화에서 묘사되었던 것 보다 훨씬 빨랐던 모양입니다. 그가 실제로 사용했던 치료 기법들이 당시에 굉장히 급진적이고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인 듯 하지만, 과연 얼마나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정교하고 광범위한 기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리오넬이 ‘내가 환자를 너무 빨리 다그쳤기 때문에 오히려 치료 관계를 망쳐버렸다’고 고백하는 부분에 다다르면 ‘환자를 충분히 기다리는 능력이야 말로 훌륭한 정신 치료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는 수많은 경험 많은 정신 치료자들의 언급이 떠오르면서, 이 영화는 어느 순간 시대극의 탈을 쓴 정신 치료 드라마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요크 대공에게 이 문제를 가지고 사과를 하러 찾아가는 장면은 그래서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치료자들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죠. 조지 6세가 리오넬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는 장면은 굉장히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왕족들은 정말 끔찍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했더군요. 그러고도 제대로 된 성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게 기적인 것이겠죠. 하긴 영국 역사에만 하더라도 에드워드 8세나 메리 1세 같은 왕들이 더 자주 눈에 띄기는 하니까요. 


아마도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에 대항할 수 있는 영어권의 강력한 연설자들로는 처칠과 루즈벨트를 들 수 있겠죠. 실제로 영화에 나온 것 처럼 조지 6세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습니다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런던이 독일로부터 심각하게 폭격을 당하던 시기에 그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민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했던 장면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비쳐졌던 것이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죠. 그러나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이후 조지 6세가 최초로 라디오 방송으로 연설한 장면은 제가 영국인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으로 기억에 남을 만 했습니다. 이 장면은 뭐랄까, 제프리 러시가 연기한 리오넬이 조지 6세라는 악기를 데리고 정말로 황홀한 연주를 들려주고, 그것을 전 세계의 관객들이 라디오를 통해 감명 깊게 감상하는 그런 예술적인 느낌이었죠.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그는 이 장면에서 조지 6세를 지휘하고 있습니. 그런데 이 장면에서 베에토펜의 교향곡 7번을 사용한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물론 장면에 아주 어울리는 음악이기는 한데, 베에토펜에 지나치게 익숙한 제 귀에는 좀 식상하게 들렸단 말이죠. 


  제가 워낙 1920-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국 시대극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한참 많은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말 스타일이 좋았던 세계에서 살았단 말이죠. 배우들은 정말 다들 엄청나게 좋습니다. 특히 콜린 퍼스로서는 아마 일생 일대의 가장 훌륭한 연기 중의 하나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싶어요. 단순 우직한 듯하면서도 복잡하고 섬세한 내면을 가진 이 영국 신사가 고뇌하는 장면들을 기가 막히게 연기해 냅니다. 아마 실제 인물로서의 조지 6세도 이만큼 흥미진진한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가이 피어스가 연기한 에드워드 8세도 좋죠. 이 적당히 속물적이고 얄팍한 듯 하면서도 매력 넘치는 왕자를 이만큼 해낼 수 있는 다른 배우가 있을 것 같지 않죠. 물론 실제 윈저가의 이 왕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엄청난 현실과의 괴리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반대로 실존 인물로서의 리오넬 로그는 제프리 러시보다 훨씬 훤칠한 인물의 소유자셨더군요. 그러나 러시도 아무튼 굉장히 좋았습니다. 워낙 훌륭하게 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역을 제대로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리고 헬레나 본햄 카터가 ‘퀸 마더’를 연기하는 날이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80세를 훌쩍 넘긴 엘리자베스 2세가 이 영화에 나오는 자신가 마가렛 공주 (벌써 몇 년 전에 고인이 되셨죠)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도 궁금하기도 합니다. 영화가 사실에 가깝다면, 그는 사실 영국 왕실 역사상 가장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아마 그 자신도 그만큼 훌륭한 부모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책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단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윌리엄의 결혼 발표 소식이 마케팅 팀에게는 굉장히 호재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Somewhere]



 


소피아 코폴라는 이번에도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공허하게 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공허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이전에 도쿄, 베르사이유와 파리를 배경으로 했던 이야기가 이번에는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다시 변주됩니다. 아마도 헐리우드의 배우가 주인공인 만큼, 코폴라로서는 이전의 어느 작품들보다 더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엘르 패닝이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연기한 클레오의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코폴라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해 봤습니다. 


 이전 영화들보다 테이크들이 훨씬 길어졌고, 거의 최면적인 효과를 내는 이런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 화면들이 비추고 있는 피사체가 엘르 패닝이나 스티브 도프 같은 배우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것이겠죠. 특히 저로서는 스티브 도프는 완벽하게 새로 발굴해 낸 배우나 다름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 사람의 작품은 데니스 호퍼와 나온 작정하고 만든 B급 SF [Space Trucker]밖에 없기 때문이죠. 조시 브롤린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이제부터라도 훌륭한 커리어를 쌓아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스 스케이팅 장면 같은 부분은 올해 나온 영화들 중에서 최고의 명장면들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두 배우는 전혀 아무런 대사를 하고 있지 않죠. 하긴 워낙 영화 전체에 대사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특히 헐리우드 배우들에게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가십 잡지들을 열심히 구독하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일종의 ‘재활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그들의 정신 건강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로 농담 거리로 삼아서도 안 되는 거죠.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조니가 전화로 친구에게 울먹거리는데 ‘자원 봉사라도 해봐’라고 대꾸를 듣는 장면은 그래서 웃을 래야 웃을 수 없었지만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장면들 중 하나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감독의 사적인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소피아 코폴라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분명 지나치게 얄팍하고 공허하고, 지나치게 감수성이 많은 이런 영화를 코폴라가 자신의 배경 없이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아마도 개인적인 이유에서 팬이 될 수 밖에 없는 소수의 관객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영화이기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스티브 도프는 이보다 좋은 각본을 만나서 좋은 연기를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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