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이코프스키부터 시작해 보죠. 뭐 다들 아시는 것이겠지만 이 사람은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무용 음악 작곡가였습니다. 18세기에 라모, 20세기에 스트라빈스키가 있었다면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끼 인형]만으로도 그는 19세기를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음악은 사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두 작곡가들에 비해서 그다지 리듬감이 좋지 않다는 거예요. 당시 많은 비평가들이나 무용 관계자들이 그의 음악을 지나치게 ‘심포닉’하다고 비난했다는데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디스클레이머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제가 발레에 대해서는 오페라나 다른 고전 음악 장르 만큼 아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 물론 버르토크의 [이상한 중국인]이나 [라 실피드] 정도는 들어 보기도 하고 공연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항상 즐겨서 찾는 그런 장르는 아니죠.


영화를 보고 나서 [백조의 호수]의 영상물을 하나 꺼내 봤는데, 역시 음악은 굉장히 훌륭하더군요. 제가 갖고 있는 것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의 누레예프의 프로덕션입니다. 뭐 오케스트라 파트 좋고, 공연은 고전적으로 화려하고, 댄서들은…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평가를 할 만큼 잘 알지를 못하니까요.


이 작품의 음악은 영화에서 종종 사용되기도 했었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연히 [빌리 엘리엇]인데, 여기서 무용 선생님이 빌리에게 줄거리를 설명해 주는 장면에서 그의 시큰둥한 반응이 아주 재미있죠. 역시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마지막의 빌리가 주연으로 서는 프로덕션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였고요.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티비에서 지나가다가 본 영화일 텐데, 나치 수용소에 갇힌 영국인가 미국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이 작품을 연주하고 있죠. 처음에 오보에가 주선율을 조용히 연주하는 부분에서 군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총주가 들어가자 벽을 올라타고 로프를 연결하는 장면이 음악하고 기가 막히게 어울렸죠. 무슨 영화였는지 제목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무용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몇 명 알고 있는데,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발레 컴패니들은 정말 내부 사정이 복잡다단하더군요. 하긴 컴패니에 들어갈 정도면 다들 실력은 일정 정도 이상이 될 것이고, 발레에서 이야기하는 표현력이라는 거야 사실 애매모호한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기교적으로 완벽함을 달성한 이후에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진짜 예술의 세계는 계량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줄서기, 암투, 시기, 권력 다툼, 내부 비리 등이 꽤 만만치 않게 일어나는 듯 하더라고요. 아마도 이와 가장 비슷한 세계라면 오페라 가수들이 있을 텐데, 발레의 경우는 오페라의 주연 가수와 합창단원만큼 프리마 돈나와 배경 무용수들간의 기량의 차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이 더 긴장을 부추기는 듯 했습니다.


영화가 이런 점을 굉장히 예민하게 잘 포착하고 있는데, 아마도 사전 조사를 열심히 했겠죠. 발레 관계자들이라면 뱅상 카셀이 연기한 안무가 같은 사람은 지나치게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국외자인 저로서는 그냥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프리마 돈나의 긴장감을 생생히 표현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나탈리 포트만은 얼굴 살을 쫙 빼고 목소리도 원래 자신의 것보다 한 톤 높은 갸냘프고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연기하는데, 아무튼 굉장히 생생하고 훌륭했습니다.


2. 


좋은 예술 작품은 심리 이론에 잘 들어맞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작가들이 사전 조사를 열심히 해서 그렇다기보다 (뭐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진실성이 있는 예술적 표현이나 내러티브는 딱히 이론을 뜯어 맞출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런 점에서 좋은 작품들은 어떤 이론으로 설명해도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랙 스완] 경우에도 고전적인 프로이트의 이론으로부터 안나 프로이트의 자아 심리학, 혹은 라캉 (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을 적용해도 모두 훌륭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멜라니 클라인, 위니코트, 하인츠 코후트로 이어지는 대상 관계 이론 – 자기 심리학이 가장 많이 떠오르더군요.


영화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거울의 이미지나,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자해하고 해체하려는 주인공의 시도, 어머니와의 병리학적인 관계, 베스의 물건들을 훔쳐내는 부분 등은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현실에서의 임상 사례로도 거의 매일같이 접할 수 있는 것들이죠. 대상 관계 이론 – 자기 심리학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이미지들이기도 하고. 무용수들이나 연극 배우들, 오페라 가수들이 특히 cluster B, 그러니까 히스테리성, 자기애성, 혹은 경계성 인격 특징을 갖고 있는 경우는 굉장히 많습니다. 무용수들이 식이 장애가 많은 것이야 뭐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요…(모델들도 그렇지요) 영화에서도 가끔 니나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장면들을 보여주기는 하는데, 사실 이 부분들은 약간 군더더기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뭐랄까, 무용수들의 병리적인 심리 상태를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다 보니까 억지로 끼워 넣은 장면들 같이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히스테리성 인격의 특징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감정의 미분화, 특히 감정과 신체 반응 사이의 indifferentiation 혹은 hyperconnectivity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영화의 묘사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탁월합니다. 이들이 흔히 자신의 감정을 신체적 증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죠. 편두통, 복통, 신경학적 증상들 (가령 신체 일부분의 마비 같은)은 이들이 흔히 자신의 스트레스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단골 재료들입니다. 물론 신경질적으로 피부를 긁는다던지, 손목을 날카로운 것으로 절단해서 출혈을 감상한다거나, 약물이나 알코올 등을 과다 복용하는 등으로 감정적 고통을 신체적 고통으로 전환시키는 경우들도 허다하죠.


뒤집에서 생각해 보면, 특히 신체를 표현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감정과 신체의 극단적으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연결 상태는 그들로서는 유용한 표현의 자산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표현 가능한 예술적 형태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제해야만 하죠. 그런 이유에서 ‘high-functional hystery leads to obsessive quality’라는 언명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과 표현을 극단적으로 통제해야 하지만 그것이 또 인공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완전히 해방시켜야 한다는,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과제들을 예술가들은 매일매일 수행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러한 ‘수난’을 이 작품이 얼마나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실 수 있었겠죠.


3. 


그리고 예술에서의 ‘인공적인 자아’는 일종의 ‘현실 자아’의 대체물이기도 합니다. (사실 코후트는 ‘자아 (ego)’ 보다는 ‘자기 (self)’ 라고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했지만, 뭐 이 감상문은 이론에 관한 게 아니니까 심각하게 구분하지는 않겠습니다) 발달의 과정에서 사실 이러한 상상, 백일몽, 이미지, 환타지는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발달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상상력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얼마나 유용하게 통합시키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희생시키지 않고 보존시키느냐에 있을 텐데, 아마도 예술적으로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사례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3막에서 한스 작스가 마이스터징어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발터 폰 슈톨칭에게 설명해 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니콧과 코후트 등이 모두 심각한 문제로 본 이러한 ‘통합의 실패’는 사실 예술가들은 스스로 인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대에서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 그들이 실제의 자기를 잊어버릴 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사실 자아 기능의 통합 실패와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정신 의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만 서로 유비적인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위대한 예술가라면 환상의 세계를 완벽하게 자기 손 안에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예술가는 결코 흔하지 않죠. 거의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고 제 멋대로이고, 가끔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그리고 ‘통합의 실패’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백조의 호수]의 줄거리만큼 잘 들어맞는 예가 또 있겠습니까. 영화에서도 설명하는 것처럼 대부분의 프리마 돈나들이 백조와 흑조의 역에 동시에 도전하는데, 사실 두 역을 위해서 쓰여진 음악은 정말 극단적으로 다르지요. 아마도 비근한 예로는 [탄호이저]의 베누스와 엘리자베트가 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귀네스 존스는 실제로 이 두 역을 한꺼번에 부른 적이 있죠. 그러니까 사실 이 백조-흑조의 관계는 작품 안에서의 일종의 표현력의 분열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상상계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뱅상 카셀이 계속해서 ‘너는 좀 흐트러져 봐야 돼’라면서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연기 지도’를 계속합니다만, 니나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로 예술가는 그러한 존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죠.


환상의 세계를 실제 세계에 투사하는 것은 폭발적인 창조력의 원천이 됩니다만, 이들이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영화가 갈수록 이야기가 서로 아귀가 맞지 않고 황당무계하게 전개되면서도 전혀 그 개연성이나 극적인 타당성을 잃지 않는 것은 예술가의 이러한 주관적 시점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토스카] 2막에서 토스카가 부르는 아리아가 이러한 일면을 잠깐 보여주는데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읽어도 이러한 점을 맛볼 수는 있죠. 그게 보통 수백 페이지라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이러한 ‘주관적인 예술가의 시점’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데 있어서 영화만한 장르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만 봐도 [블랙 스완]은 아주 성공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그럼 예술가들은 왜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걷는 것인가, 그리고 정말 이들이 수많은 민폐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의 이러한 존재를 사회에서 지지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거의 사회학적인 질문에 다다르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이들의 진화 심리학적인 기능은 (개인적으로 진화 심리학은 아주 조금밖에 지지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일종의 샤먼, 영적인 존재와의 소통, 그리고 역시 놀이와 오락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특질들을 보전하면서 현대 사회에까지 이어져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구석기 시대 인간들은 일주일에 열 몇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놀았다니까요.


4.


일종의 뱀다리. 불편하실 수도 있으니까 왠만하면 그냥 읽지않고 지나치시길.


(1)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자신이 이러한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고, 제 멋대로이고, 가끔은 ‘정신이 나간 듯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를 예술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Cluster B는 예술가의 필요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닙니다. 성격이 원만하고 대인 관계가 좋으면서도 생산성이 훌륭한 예술가는 널리고 널렸죠 (지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제라르 핀리 아저씨군요). 당신의 민폐 성향을 ‘예술적 기질’이라는 이름 하에 합리화하시려는 당신, 당신이 정말 인류에 공헌하고 즐거움을 줄 만큼 성공적인 예술가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먼저 냉정하게 계산해 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워낙 실용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게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술가가 될 생각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러한 성격은 스스로 어떻게 정당화합니까? 궁금하군요)


(2) 임상 경험이 없는 분들은 예술 평론에서 심리 이론의 인용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췌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갖다 대는 사람들을 보는 거 이제 좀 피곤합니다. 모 평론가께서 ‘의사는 진찰이나 잘 하세요’ 라고 하셨는데, 평론가분들도 진단은 그만하시고 ‘평론이나 잘 해 주세요’. 음 저는 뭐냐고 물으신다면, 이 글은 직업적으로 쓴 것이 아니니까 평론이 아닙니다. ‘감상문’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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